#081
“나에게 이 사실을 전한다는 건, 레오나르드와 일리야 세이드가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뜻인가?”
베로니카는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카르예니프, 난 널 언젠가는 제거해야 할 경쟁자로 여겼어. 필요하다면 목숨을 취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 그 방식이 저주든 독이든 그건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어. 하지만…….”
베로니카가 눈을 치켜떴다. 푸른색보다는 하늘색에 가까운 눈동자였다. 세 형제 중 가장 맑고 차가운 빛을 가졌으나 그 안에 품은 온도는 불길처럼 뜨거웠다.
“나도 정도를 알아. 이건 완전히 미친 짓이야. 무고한 백성을 한 해에 백 명씩 잡아다 죽인 미친놈이 황제가 된다고? 형제든 부모든 목숨을 걸고서라도 저지하겠어.”
제단의 존재를 알게 된 베로니카는 협력을 요구하는 레오나르드의 손을 뿌리치는 대신 협조하는 척했다. 황궁에 있는 그의 남편과 딸 때문이었다. 베로니카는 레오나르드의 곁에서 정보를 모으는 한편, 남편과 딸을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피시켰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황제도 지하 제단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어머니에게 축출당하기 전에 미리 선수를 친 거야. 반란은 한두 해 준비한 게 아닌 것 같았어. 그들이 치밀했던 건지, 여태 눈치채지 못했던 내가 우둔했던 건지 모르겠지만…….”
말을 잇던 베로니카는 카르옌보다 먼저 작은 기척을 느끼고 말을 멈췄다. 고개를 돌린 그가 눈을 의심했다.
“폐하!”
베로니카는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지팡이가 흰 대리석 바닥을 구르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베로니카는 지팡이를 줍는 대신 절뚝이며 침대를 향해 다가갔다. 황제가 눈을 뜨고 있었다.
“정신이 드세요? 어머니, 미리암에 도착했어요.”
“…….”
반쯤 눈을 뜬 황제는 경황이 없는 듯 여러 번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황제가 눈동자만 움직여 방 안을 훑었다.
“……로디언은?”
깨어난 황제의 첫마디였다. 쉰 목소리로 흘러나온 물음에 베로니카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동공을 떨었다. 이내 베로니카가 고개를 떨구었다.
황제는 예상했다는 듯 눈을 감았다. 감긴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마치 악몽에서 깨어나고 싶은 사람 같았다.
그러나 다시 눈을 떴을 때, 황제의 눈빛은 죽음을 앞둔 사람답지 않게 맑았다.
“베로니카, 카르예니프. 유언을 남길 테니 증인이 될 만한 이들을 모두 불러와.”
* * *
“다음 월계관의 주인은 2황자, 카르예니프 델 카샤프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내 마지막 황명의 증인이다.”
작지만 위엄 있는 목소리가 적막을 가르고 울려 퍼졌다.
“황명을 받듭니다, 폐하.”
미리암 공작이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엄숙히 복창하는 목소리들 사이로 간간이 비통한 울음을 참는 소리와 흐느낌이 섞여들었다. 특히 황녀 베로니카와 황제 직속 친위대원들은 깊이 숙인 고개를 들지 못했다.
“울지 말렴, 베로니카.”
황녀의 손을 붙잡아 위로하는 황제의 또렷한 목소리는 곧 죽을 사람의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얼핏 보면 곧 털고 일어날 사람처럼 건강해 보였다.
그러나 카르옌은 알았다. 저 기이한 또렷함이야말로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증거였다. 때로 죽음을 목전에 둔 이들은 마지막 불씨를 태우듯 기력을 되찾는 경우가 있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길지 않으나, 후계자에게 짧은 가르침을 줄 수 있도록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 주게.”
“……폐하…….”
온건한 축객령에 떠밀린 이들이 모두 자리를 피해 주고, 방 안에 남은 것은 오랜만에 마주하는 모자뿐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대화는 어머니와 아들의 애틋한 작별 인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내 너를 다음 대 황제라 천명했으나, 마지막에 월계관을 쓰고 옥새를 손에 쥔 자가 곧 황제다. 옥새는 이미 그 아이의 손에 있을 터니 너는 월계관을 찾아가라.”
“어디에 있습니까?”
“나의 온실.”
황제궁의 유리 온실은 엘제니아가 즉위 후 지은 곳이었다. 황제는 두 손에 흙을 묻혀 그 안의 꽃과 식물을 직접 가꾸었다. 오직 황제만이 출입할 수 있었던 그곳을 아무렇지 않게 드나든 사람은 친위대장 로디언뿐이었다. 카르옌조차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엘제니아가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 내밀었다. 푸른 보석이 박힌 금빛 반지였다.
“이건…….”
“네가 열다섯 살 때, 내가 네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법을 써 달라고 부탁했었지.”
엘제니아의 생기 없는 얼굴에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를 제외하면 오직 너만이 풀 수 있는 마법이야. 이걸 가지고 온실로 가면, 영광을 네 머리에 쓸 수 있을 것이다.”
“……저를 선택하신 이유는 제가 로디언의 아들이고, 마법사라서입니까?”
손바닥 위에 올려진 반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카르옌이 물었다.
“감히 그 이유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야.”
“…….”
“레오나르드는 총명하나 탐욕스럽고, 베로니카는 정직하나 영민하지 못하지. 네가 마법사가 아니었어도 나는 너를 황태자로 삼았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이미 마법사의 운명을 타고 태어났으니 이 모두 부질없는 가정이지.”
얼굴에 걸려 있던 희미한 미소가 사라지자 엘제니아는 한순간 생기를 모두 잃은 것처럼 보였다. 착각이 아닌 듯 엘제니아의 목소리도 점차 작아졌다. 카르옌은 그가 편히 누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얄궂은 운명이 나를 이 자리로 밀어 넣었지. 결국 내가 유일하게 사랑한 남자의 목숨까지 앗아갔어…….”
엘제니아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명심해라, 카르예니프. 운명은 결코 네 편이 아니다. 원하는 자리에 앉히기 위해 소중한 이들을 빼앗고 너를 마음대로 휘두를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어머니.”
카르옌이 어머니의 텅 빈 손을 맞잡았다. 엘제니아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나는 부족한 황제이며 못난 어머니였으나 너는 다르지. 손에 쥔 것을 놓지 말고 맞서 싸워라.”
기력이 다한 듯 말소리가 점차 줄어들었다. 끝내는 속삭이는 것처럼 들렸다. 속삭임은 끝내 한 사람의 이름이 되었다.
“그이는 고지식하니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나를 기다릴 거야.”
“…….”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
엘제니아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 얼굴이 이상할 만큼 편안해 보였다. 기다렸던 자유를 맞이하는 사람처럼.
* * *
황제가 서거했다. 거대한 제국을 다스리던 천자의 죽음이라기엔 너무나 조용한 마지막이었다.
일행의 숙소로 배정된 서쪽 성 한구석을 차지한 토파즈의 방은 과할 만큼 넓고 화려했다.
둥근 천장에는 누가 그렸는지 모를 화려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곳곳에 달린 샹들리에는 깔리기라도 했다간 목이 부러질 정도로 거대했다. 바닥은 먼지 한 점 없이 매끄러웠으며 테이블 위에 놓인 촛대 하나까지 예술 작품처럼 섬세했다. 욕실에는 황금색 욕조가 있었는데 진짜 금인지 궁금했지만 혹시 맞다고 할까 봐 묻지도 못했다.
그동안 카르옌 일행과 함께 다니며 돈지랄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미리암 공작성의 손님방은 동네 여관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좋은 방에 혼자 묵어 본 적은 처음이었다.
토파즈는 그때 자신이 몇 달 만에 처음으로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렌로샤 숲의 오두막에 세 사람이 들이닥친 이후 하루도 조용히 넘어가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지금 조용한 것은 ‘소공작의 손님’이라는 이름하에 이곳에서 묵고 있지만 외부인에 가까운 토파즈만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잠시 의식을 차렸다던 황제가 깊은 밤에 끝내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드러내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는 상황에 모두가 침통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했다.
황실에 대한 충성심 따위는 개미 눈물만큼도 없는 토파즈에게 높으신 분들의 일이야 먼 나라의 사정이나 다름없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 황제가 누군가의 가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은 달랐다.
‘다녀올게요. 편안히 쉬고 계세요.’
카르옌이 황제를 만나러 간 이후 아직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다. 어제까지 앓아누웠던 놈이 지금은 괜찮아진 건지.
손님방으로 안내된 이후 부드러운 옷으로 갈아입고 끼니마다 황송할 만한 식사도 대접받아 몸 상태는 최상이었으나 기분은 묘하게 답답했다.
결국 토파즈는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창문을 통해 뛰어내려 놓고 뒤늦게 허락을 구했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토파즈가 뺨을 긁적였다. 어차피 정원이나 산책할 생각이었으니 들키지 않고 방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달빛이 밝은 밤이었다. 미리암도 밤공기는 제법 서늘했다.
네모꼴의 안뜰을 둘러싼 회랑을 지나던 토파즈는 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먼저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뻔뻔하게 지나갈지 왔던 길을 조용히 되돌아갈지 고민하는데 기둥 너머에서 작은 새 한 마리가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왔다.
새는 토파즈의 머리 위에서 한 바퀴 빙글 돌더니 겁도 없이 어깨에 내려앉았다. 토파즈는 수상쩍은 눈길로 그 새를 바라보다가 기둥 뒤에서 몸을 드러냈다. 새가 푸드덕 날아갔다.
아치형으로 뚫린 회랑 너머, 중정에 긴 그림자 하나가 보였다. 익숙한 인영이었다.
“토파즈님.”
부드러운 목소리가 토파즈를 불렀다. 카르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