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80)화 (80/110)

#080

황제는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했다.

카르옌은 황제의 어깨 위에 얹고 있던 손을 떼어냈다. 손끝을 감싸고 있던 금빛이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황제는 잠든 사람처럼 편안히 눈을 감고 있었지만 혈색은 좋지 못했다. 어깨의 상처에서 시작된 독이 심장까지 퍼져 온몸을 중독시켰다. 마수의 독이었다. 30년여 전, 황제의 형제와 백성들을 죽게 만든 것과 같은 극독.

외상이 아니었기에 카르옌의 치유 마법도 별다른 소용이 없었다. 치유 마법은 정화와는 결이 달랐다. 미리암 공작에게 비밀스럽게 불려온 신관들도 간신히 숨을 붙여 놓는 것 이상은 하지 못했다. 신관의 신성력도, 마법사의 치유 마법도 만병통치는 아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머리끝까지 드리운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기적이라도 일으켜야 했다.

그리고 카르옌은 일생에 단 한 번 기적을 일으킬 기회를 이미 써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것이 후회되지는 않는다면, 그가 몹쓸 불효자이기 때문인 걸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침실 안에는 베로니카와 카르예니프 단 둘뿐이었다.

베로니카는 카르옌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모습과 달리 초췌해진 모습이었다. 부상을 입었는지 다리까지 절뚝였다. 지팡이를 짚은 베로니카가 뚜벅뚜벅 걸어와 침대 근처에 놓인 긴 소파에 앉았다. 이렇듯 지척에 앉은 기억도 까마득한 남매였다.

“레오나르드가 어머니를 암살하려 했어. 계획을 실행하기 직전에 내가 그 정보를 알게 되었고.”

“…….”

마찬가지로 안부 인사 따위는 생략한 베로니카가 곧바로 이야기를 꺼냈다. 한가롭게 안부를 주고받을 상황도, 그럴 만한 사이도 아니었다.

“난 곧장 어머니를 피신시키려고 했지만 황궁에 있던 포탈이 파괴되어서 실패했어. 수많은 기사와 마법사들이 들이닥쳤고, 황제궁을 지키던 위병과 기사들, 시종들이 죽어 나갔어.”

황궁 안에는 사사로이 이동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결계가 쳐져 있었다. 예외가 바로 황족들의 대피를 위해 만들어진 비상 탈출용 포탈이었다.

“우리는 비밀통로로 황궁을 빠져나가기로 했어. 우리, 그러니까…… 폐하와 로디언 전하, 황제 직속 친위대 기사들 말이야.”

그들은 황궁 밖으로 빠져나가자마자 이동 마법을 사용할 계획이었다. 목적지는 처음부터 미리암이었다.

“폐하께서 지금 믿을 수 있는 이는 미리암 공작뿐이라고 말씀하셨거든. 로디언 전하께서도 동의하셨고.”

로디언의 이름을 재차 입에 담으며 베로니카는 카르옌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나 카르옌은 표정 변화 없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얼마 가지도 못해 비밀통로가 발각되어 금세 추격이 붙었어. 인간 같지 않은 이상한 기사와 마법사들이었어. 믿을 수 없게도 친위대가 밀리기 시작했어.”

“인간 같지 않았다고?”

“그래.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인간이 아닌 다른 종 같았어, 그들은. 살이 떨어져 나가도 멈추지 않고 마치 누군가에게 조종이라도 당하는 것 같았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토록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베로니카는 생각했다. 그의 눈과 귀에는 여전히 그날의 참상이 선명했다.

‘가십시오, 폐하.’

‘안 돼, 로디언! 황명이다. 돌아와!’

베로니카는 어머니가 그렇게 소리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황제는 마른 몸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우악스러운 힘으로 베로니카와 친위대 기사들을 뚫고 로디언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러나 로디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두려움도 슬픔도 없는 얼굴로 담담히 말했다.

‘폐하, 엘제니아. 저는 당신의 반려이자 가장 충성스러운 종입니다. 당신을 지키다 죽을 수 있다면 백 번이라도 검을 들 것입니다.’

그는 꼭 황제를 위해 바칠 수 있는 목숨이 단 하나뿐이라 아쉬운 사람 같았다. 듣던 베로니카조차 숨이 턱 막혔다. 검 한 자루로 황제의 친위대장 자리까지 올라온 그 남자를 존경하지 않는 기사는 없을 것이다. 애증 관계라 할 수 있는 베로니카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황녀 전하. 전하의 어머니를 부탁합니다.’

베로니카는 눈앞이 뿌예진 채로 황제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황제는 일평생 기사로 자란 딸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지금 황제는 잠들어 있었지만, 아직도 귓가에 그의 비통한 울음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그때 로디언 전하께서 우리를 지켜 주지 않으셨다면, 우린 그 비밀통로를 빠져나오기도 전에 모두 죽었을 거야.”

“……아버지는.”

카르옌이 낮게 물었다. 베로니카가 말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확인받은 카르옌은 오열하거나 눈물짓는 대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언제나처럼 생각을 짐작하기 힘든 얼굴이었다.

도무지 인간 세상을 사는 것 같지 않은 놈. 베로니카는 늘 카르예니프가 인간들 틈에 잘못 떨어진 신적 존재 같다고 생각했다. 시종일관 고고한 저 낯짝을 흔들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다. 부모의 죽음이라 해도 다르지 않았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베로니카마저 로디언을 등지고 돌아서는 순간에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는데……. 평소였다면 이래서 좋아할 수가 없다며 입매를 비틀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폐하께서는 탈출 직전 독화살에 맞았어. 그 사실을 미리암에 도착할 때까지 함구하셨지.”

끝까지 살아남은 친위대 기사는 고작 셋. 그들과 베로니카 모두 큰 부상을 입었다. 황제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탈출을 포기할까 봐 그랬던 것이리라.

베로니카는 손에 쥔 지팡이를 내려다보았다. 상처는 치료했으나 후유증이 남아 평생 다리를 절지도 모른다고 했다. 기사로서의 생명은 끝이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살아남았다. 베로니카가 고개를 떨구었다.

“면목이 없어.”

베로니카는 황녀이기 이전에 긍지 높은 기사였다. 결국 아무도 지키지 못하고 혼자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더욱 괴로웠다.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 하얗게 질렸다.

카르옌은 베로니카의 자책과 사과 따위는 관심 없는 사람처럼 눈썹을 휘더니 물었다.

“왜 레오나르드를 돕지 않았지?”

“그 새낀 진짜 미친 새끼니까.”

베로니카가 즉답했다.

어린 시절, 베로니카는 그의 아버지가 자신을 황제로 만들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

세이드 대공은 늘 베로니카를 향해 제국에서 가장 귀한 신분이 될 거라고 속삭였다. 황제의 책무를 가르쳤으며 어머니가 그에게 큰 기대를 품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베로니카는 순진하게 그 말을 믿고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레오나르드에게도 똑같이 대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그가 두 자식을 시험했음을 알았다. 어느 순간 대공의 저울질에서 베로니카가 밀려났다는 것도.

처음에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다. 반드시 황제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지만, 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평생을 자신의 자리라고 생각했던 것을 눈 뜨고 빼앗기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노력하여 능력을 증명하면 될 일이라 여겼다. 레오나르드보다 자신이 더 용맹하고 뛰어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이혼으로 더 이상 국서가 아니게 된 이후로는 레오나르드를 향한 신뢰가 더욱 두터워진 것처럼 보였다.

자신과 레오나르드가 뭐가 그렇게 달랐을까. 오랜 시간 생각해 왔던 답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레오나르드는 아버지의 죄업을 잇고 있었어. 피 묻은 제단을 이어받기에 나보다 그 새끼가 더 적합했었나 봐. 지금 내가 이렇게 도망친 걸 보면 아버지의 눈이 맞았다고 볼 수 있겠네.”

“‘제단’?”

단순히 비유가 아님을 기민하게 눈치챈 카르옌이 되물었다.

“카르예니프, 네 병 말이야.”

“…….”

“네 병이 아버지 때문이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어. 아버지는 늘 너를 제거하고 싶어 했으니까.”

베로니카가 덧붙였다.

“뭐, 나도 달랐다고는 말 못 하겠네.”

카르옌이 가진 ‘병’에 대해 아는 사람은 황실에서도 몇 되지 않았다. 베로니카조차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했다.

다만 그 병으로 인해 카르옌이 어린 시절 죽을 뻔했고, 현재도 마법을 쓰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정도는 알았다. 열아홉 살의 카르옌이 성년식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며칠간 눈을 뜨지 못했을 때는 상태가 생각보다 더 심각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배후에 세이드 대공이 있으리라는 사실도 짐작했다. 알면서도 방관했고 별다른 죄의식을 느끼지는 못했다. 본래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암투와 계략이 판치는 곳이 황궁이었으니까. 큰 뜻을 이루려면 손에 피 묻히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늘 듣고 배웠다. 그의 아버지로부터.

“그런데 그 병, 아니. 마법을 유지하기 위해 무슨 짓까지 하고 있는지는 몰랐어. 카스테로페의 이름 앞에 맹세해.”

“그 무슨 짓이 제단이라는 것과 관련이 있나 보네.”

“그래. 1황자궁 지하에 그들이 제단이라고 부르는 공간이 있어. 수십 년 전 아버지와 손잡았고 이제는 레오나르드의 휘하가 된 흑마법사들, 그들은 네게 건 마법을 유지하기 위해 제물을 바치고 있어.”

“황궁 내에서 사람이라도 죽였다는 뜻인가?”

사람 한 명, 말 한 마리 들고 나는 데에도 까다로운 절차가 필요한 곳이 황궁이었다. 카르옌의 말에 베로니카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말했다.

“황궁 안으로 들여온 것은 사람도, 시체도 아니야. 피뿐이었어. 마법사의 피.”

“……마법사?”

카르옌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베로니카는 카르옌이 독을 마시고 황궁에서 사라졌을 때에야 제단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아버지에게서 아들의 손으로 옮겨온 그 피의 존재를. 1황자궁을 빈번히 드나들었고 몰래 심어 둔 첩자까지 있었는데도 그랬다.

베로니카가 침음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한 해에 백 명. 그 마법을 유지하기 위해 희생된 숫자야.”

그 순간 카르옌의 머릿속에서 베론의 납치 사건과 양탄자 공장에서 만난 흑마법사들, 아리아 호수에서 옮겨진 봉인석, 그 모든 조각이 퍼즐처럼 맞아 들어갔다.

완성된 그림의 시작점에 카르옌이 있었다. 카르옌의 의도와는 조금도 상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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