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79)화 (79/110)

#079

“신 앞에 맹세코 오해입니다.”

싸늘하게 굳은 얼굴을 본 하란이 양손을 천천히 어깨 위로 들어 올렸다. 어쩐지 그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르는 상황이었다.

“제 가문의 기사들입니다, 토파즈님.”

메르디나의 말에 한 걸음 뒤에 서서 마찬가지로 토파즈를 경계하고 있던 젊은 기사들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토파즈의 시선이 그들의 어깨 견장과 검집에 새겨진 무늬를 훑었다.

날개를 펼친 새의 등 뒤로 교차하는 두 자루의 검이 그려져 있었는데, 독특하게도 검 끝에 꽃이 피어 있었다. 화려한 문양이었다.

“미리암 가문의 문장이 뭐지?”

어느새 등 뒤에 붙어 선 카르옌이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며 토파즈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 못생긴 새가 확실합니다. 그리고 저도 얼굴을 본 적 있는 기사들이에요.”

남의 가문 문양을 아무렇지 않게 비방하는 카르옌의 말에 기사들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토파즈는 확인을 거친 뒤에야 그들을 안으로 들였다.

“어떻게 된 거야?”

“넨베르그의 정보상이 빌려준 가짜 신분으로 무사히 포탈을 통과했습니다. 예상대로 곧바로 추격자가 붙었고, 미리암 포탈 앞에서 부딪쳤으나 제 가문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란과 메르디나는 공식적으로 어떤 혐의도 없는 데다 이곳은 미리암의 땅이었다. 체포할 명분이 없는 그들과 달리 공작의 명령을 받고 온 기사단이 있으니 빠져나오기 어렵지 않았다고 했다. 카르옌도 끼어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겠지만 말이다.

“바깥 분위기는 어떻지?”

“그야 모두가 전하의 이야기를 떠들어 대는 중입니다.”

“어쩐지 귀가 간지럽더군.”

하란의 말에 카르옌이 한쪽 입꼬리를 당겼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태연해 보이는 낯짝이었다.

“날이 밝으면 상황이 또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니 서둘러야 합니다. 오늘 밤에 성내로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해 두겠습니다.”

메르디나가 말했다. 카르옌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앞으로 감내해야 할 험난한 여정을 예상한 사람처럼.

* * *

바닷가를 따라 지어진 새하얀 건물들을 지나 마차 한 대가 푸른 초원을 내달렸다. 바닷가 절벽을 끼고 새하얀 성이 굳건히 지어져 있었다.

비 내리는 새벽, 미리암 공작성으로 들어가는 도개교가 내려왔다. 마차가 조용히 그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도 한참을 들어간 마차가 드디어 멈춰 섰다. 마차에서 가장 먼저 내린 메르디나가 후드를 벗었다. 어깨에 닿을 듯 자란 잿빛 머리카락을 타고 빗물이 반짝였다.

메르디나를 알아본 본성의 문지기가 깊이 허리를 숙였다. 곧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일행이 비에 젖은 발로 매끈한 대리석 바닥을 밟았다. 문이 닫히자 순식간에 빗소리가 멀어졌다.

“메르디나님.”

메르디나의 얼굴을 알아본 젊은 기사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으나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메르디나 역시 그를 어렵지 않게 알아보고 이름을 불렀다.

“파비안. 오랜만이군.”

“미리암으로 돌아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탈해 보이셔서 기쁩니다.”

“그대 역시 무탈해 보여서 다행이야.”

메르디나는 본성의 넓은 홀과 복도를 찬찬히 둘러본 뒤 물었다.

“그런데 성 분위기가 왜 이렇지?”

아직 이른 새벽이라 그렇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더욱 이상했다.

성의 주인인 미리암 공작은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새벽 훈련을 거르지 않는 기사였다. 이른 새벽에 훈련을 마치고 정무를 시작하는 미리암 공작을 수십 년간 모신 사용인들은 공작보다 더욱 일찍 일어나 하루를 열었다.

아침 햇살이 흰 성벽을 눈부시게 달굴 즈음이면 성안의 모든 이들이 활기차게 움직였다. 미리암에서 나고 자란 메르디나에게는 더없이 익숙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성은 여전히 환히 밝혀져 있었으나 분위기는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성 안팎을 지키는 위병들을 제외하면 사용인들도 눈에 띄지 않았다.

메르디나가 돌아오리라는 연락을 미리 받았을 텐데 공작은 물론 다른 가신들도, 하물며 집사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공작 각하께서 황궁에서 전해진 비보를 들은 뒤로 모두에게 자중하라 이르셨습니다. 어젯밤에는 경비를 강화하라고 말씀하시고 가신들을 모두 물리셨습니다. 사용인들 역시 최소한으로만 움직이고 있습니다.”

미리암 공작은 현 황제의 친우이자 가장 가까운 신하였다. 황제의 실종 소식에 상심하여 내부 분위기를 단속한 것일까.

아니, 그럴 사람이 아니다. 메르디나는 제 어머니에 대해 짧게 평가했다. 호전적인 공작이라면 오히려 황제의 소식을 찾기 위해 분주해야 마땅했다.

“또한 누구도 함부로 들이지 말라는 엄명이 있으셨습니다. 하여 무례를 무릅쓰고 일행분들의 신원을 확인하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목이 떨어지더라도 명을 수행해야 하는 저의 처지를 너그러이 이해해 주십시오, 소공작님.”

기사, 파비안은 긴장한 듯 침을 삼켰다.

그는 가문의 종자 노릇을 할 때부터 메르디나와 친구처럼 어울려 온 기사였다. 그가 이토록 긴장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메르디나는 성안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내가 그대같이 충직한 기사의 목을 왜 위협하겠는가.”

차분히 대답한 메르디나는 이미 얼굴을 드러낸 채 성안을 두리번거리고 있던 하란에게 고개를 돌렸다.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지만 소문은 익히 들었을 거야. 나와 아카데미 시절을 함께 보낸 친우이자 전우인 하란 아히네스 경일세.”

“반갑습니다, 파비안 경.”

“그리고 이쪽은…….”

메르디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르옌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후드를 벗었다. 후드가 젖혀지며 찬란한 금발과 푸른 눈, 아름다운 이목구비가 차례대로 드러났다.

이제는 공작성의 마구간지기라도 알아볼 수 있을 얼굴이었다. 사방에 붙은 지명수배지를 한 번이라도 보았다면 감히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으니.

“2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버젓이 얼굴을 드러낸 지명수배범을 보고도 놀라는 대신 깍듯이 예를 갖추는 모습에서 현 사태를 대하는 미리암 공작가의 분위기가 얼추 읽혔다.

오자마자 칼 맞을 일은 없다니 다행이었다. 내심 의심을 지우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던 토파즈에게도 기사의 시선이 닿았다.

토파즈가 자신을 뭐라고 소개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는 사이 메르디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분은 우리가 여기까지 도달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은인이시다. 신원은 내 이름을 걸고 보증하지.”

기사는 경계를 완전히 지운 것 같지는 않았으나 메르디나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정중한 태도로 물러섰다.

그때 은빛 샹들리에가 걸린 홀의 계단 위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메르디나가 고개를 쳐들었다.

“어서 와라. 내 딸, 우리 소공작.”

“……어머니.”

사용인 몇을 이끌고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온 여자가 양팔을 벌렸다. 귀가 드러나도록 짧은 잿빛 머리칼과 큰 키, 차분한 분위기까지. 미리암 공작은 메르디나와 무척 닮았으나 눈매가 더 매섭고 완고한 인상이었다. 모녀는 가볍게 포옹하고 떨어졌다.

미리암 공작은 메르디나의 뒤에 서 있는 카르옌을 보고 왼쪽 가슴 위에 손을 얹으며 깊이 절했다.

“남쪽을 수호하는 미리암이 2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귀한 후계자를 맡겨 두었는데 심려를 끼쳤군, 공작.”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전하를 따르기로 맹세한 것은 저 아이의 선택입니다. 주군을 끝까지 모시는 것은 기사의 본분. 저 역시 뜻이 다르지 않습니다. 미리암으로 잘 오셨습니다.”

단정하다 못해 우직하게 느껴지는 말투였다. 메르디나가 누구를 닮았는지 알 것 같았다.

뒤따르는 시종들에게 갈아입을 옷과 식사를 준비해 두라고 이른 공작은 정중히 말을 꺼냈다.

“노독이 쌓이셨을 줄 아나, 송구하게도 먼저 모실 곳이 있습니다. 한시를 다투는 일이니 제게 안내를 맡겨 주시겠습니까.”

공작을 따라 도착한 곳은 공작성 동쪽 심부의 어느 화려한 방 앞이었다. 단순히 손님방 따위가 있을 곳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문을 열자 응접실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이미 누군가가 있었다.

갈색 머리칼에 푸른 눈을 가진 젊은 여자였다. 단련한 몸이며 옷차림이 기사 같았는데, 한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있었다. 다만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는 움직임은 그리 능숙지 않아 보였다.

토파즈보다 앞서 응접실로 들어간 카르옌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카르옌과 낯선 여자는 서로를 노려보다시피 눈을 맞추었다. 이내 카르옌이 입을 열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냉랭한 목소리로.

“누이가 왜 여기에 있지?”

……누이? 카르옌이 그렇게 칭할 만한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제국의 유일한 황녀, 베로니카.

미리암 공작이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숙였다.

“어젯밤, 황녀 전하께서 폐하를 모시고 미리암으로 오셨습니다.”

“뭐? 그 말은…….”

“폐하께서 지금 이곳에 계십니다.”

카르옌의 눈이 커졌다. 실종된 황제의 행방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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