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
“드디어 기억해 내셨네요.”
담담한 목소리와 달리 목걸이를 쥔 손을 덮어 오는 카르옌의 손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토파즈는 잘 떠오르지 않는 아이의 얼굴을 카르옌의 얼굴 위로 겹쳐 보려고 노력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이미 확인받은 사실을 재차 되물을 뿐이었다.
“네가 정말 그때 그 애라고?”
“네.”
말도 안 돼……. 토파즈가 중얼거렸다.
카샤프에서 지내던 열여덟은 토파즈의 인생에서 가장 평화로운 시기였다. 단순히 평화로웠다고 축약하기에는 과한 관심을 받기도 했고 떠들썩한 나날을 보내기도 했지만, 나쁜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토파즈의 인생에서는 드문 일이었다.
카샤프를 떠난 뒤에도 종종 그곳에서 있었던 일이나 만났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그리워하기도 했다. 그 안에는 낮잠을 자다 보면 살금살금 찾아오던 귀여운 꼬마의 존재도 있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최근 몇 년간은 그런 아이를 만났다는 사실 자체를 잊고 지냈다. 무려 십 년 전 일이니 아이의 자세한 생김새가 기억날 리도 없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천사처럼 예뻤다는 강렬한 인상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여자애인 줄 알았는데.”
저도 모르게 툭 튀어 나간 말에 카르옌이 뺨을 실룩였다.
“설마, 그래서 잘해 주셨던 건가요? 제가 여자애인 줄 알아서?”
“……? 아니.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아이의 성별 따위야 토파즈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다만 체구가 작은 데다 얼굴도 목소리도 고왔으니 여자아이라고 마음대로 생각해 버린 것이었다.
“너 그때 몇 살이었어? 아니, 설마 너 아직 성년식 전이야?”
토파즈는 무심코 손등으로 입술을 닦아냈다. 지난번 호수에서 성년식도 안 지난 어린애와 입술을 비빈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득해졌다. 물론 그건 인공호흡이었지만…….
“그럴 리가요. 그때 전 열두 살이었습니다.”
열두 살? 토파즈가 눈가를 좁혔다. 그래 봐야 여덟 살쯤 된다고 생각했다. 귀한 곳에서 잘 먹고 잘 자랐을 놈이 왜 그렇게 작고 말랐었단 말인가. 오늘 어려진 카르옌의 모습을 보지 못했더라면 같은 사람이라고 연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카르옌은 토파즈가 어렴풋이 기억하는 그 아이와는 나이대도 맞지 않았고 성별도 달랐다. 어제까지 흑발인 줄 알고 있었으니 머리 색도 같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애는 말투도 훨씬 싸가지 없었는데.”
웃고 있던 카르옌의 얼굴이 굳었다.
“……그럴 리가요. 토파즈님께서 뭔가 잘못 기억하고 계신 거겠죠.”
“아니, 확실해. 엄청 싸가지 없고 새침했어.”
“…….”
카르옌이 입을 꾹 다물었다. 아랫입술이 살짝 튀어나온 것이 마치 불만을 삼키는 어린애 같았다.
토파즈는 다시금 눈앞의 헌칠한 남자를 살폈다. 성인에게 10년은 큰 차이 없을지 몰라도 아이에게는 아니었다. 성장기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자랐다.
그러니 10년이면 어린애가 남자가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머리로는 알면서도 막상 얼굴을 마주하니 믿기지 않았다.
얘가 그때 그 조그만 솜털 같은 애라니…….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나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 왜?”
“토파즈님께서 저를 구해 주셨잖아요, 몇 번이나. 저는 은혜를 잊는 몰염치한 자가 아닙니다.”
카르옌이 낮게 웃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게 무슨 은혜씩이나 된다고.”
“제게는 토파즈님 같은 분이 처음이었습니다. 평범한 아이처럼 대해 주신 것도, 제가 마법사임을 알면서도 지켜 주려 애쓰신 것도, 다정한 말을 건네주신 것도.”
조곤조곤 말을 잇던 카르옌은 눈을 내리깔며 쓸쓸한 어조로 덧붙였다.
“정들게 해 놓고 하루아침에 떠나신 것까지요.”
“…….”
토파즈도 알고 있었다. 그의 스승인 유리가 갑자기 수도를 떠난다고 했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토파즈와 카르옌이 그 정도 나이 차이였던 것도 아니고 유리만큼 뭘 해 준 적도 없지만, 그래도 의지하던 어른이 일방적으로 떠난다고 했을 때 느꼈을 서운함과 무력감을 모르지 않았다. 자신이 어린아이임을 원망했겠지. 그건 잘못이 아닌데도.
그러니까 얘한테는 내가 유리 같은 존재인 걸까……. 나름대로 납득한 토파즈가 조금 미안한 마음을 품을 때였다.
“그때는 몰랐지만, 첫눈에 반했던 거겠죠.”
“뭐?”
카르옌의 입에서 말도 안 되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잘못 들은 것이 분명해 되물었으나 막상 불덩이를 내던진 카르옌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첫사랑을 힘없이 떠나보낸 제가 얼마나 스스로의 처지를 비관하고 당신을 그리워했는지 모르실 거예요.”
당신이 제국의 황자를 용병으로 만들 뻔하셨다며 농담처럼 덧붙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토파즈는 덤덤하려고 애쓰며 입을 열었다.
“어릴 때 누구나 하는 착각이지.”
“저는 더 이상 어리지 않은걸요.”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는데.”
“다 알아들으셨으면서, 모른 척하실 생각이신가요?”
입꼬리를 당긴 카르옌이 토파즈의 손바닥을 끌어다 제 심장 위에 올려두었다. 두 사람이 여전히 마주 보고 누워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새도 없었다.
손바닥 아래로 두근, 두근, 선명한 울림이 퍼져 나갔다. 흐트러짐 없이 매끈한 얼굴을 하고 있는 주제에 카르옌의 심장은 전력 질주를 한 사람처럼 빠르게 뛰고 있었다.
토파즈는 청각이 무척 좋았다. 굳이 심장 위에 손을 얹지 않아도 가까이에 있으면 다 들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카르옌의 심장 소리가 자신의 곁에서 유독 빨라진다는 사실쯤은 진작 알고 있었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합당한 이유를 댈 수 없었을 뿐이다.
토파즈는 두근거리며 박동하는 가슴 위에서 손을 거칠게 떼어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황자님.”
일부러 입에 담기도 낯선 호칭을 부르며 단호히 선을 그었다. 일시적인 흥미로 인한 것이었든, 어린 시절의 동경을 착각한 것이든 변하는 건 없다.
“설마 제 신분을 알게 되자마자 버리시는 건가요?”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카르옌이 일렁거리는 푸른 눈으로 토파즈를 올려다보았다. 통속 소설 속 비련의 주인공처럼 가련한 표정이었다.
“저는 그 어린 나이부터 토파즈님을 다시 만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려 왔는데……. 토파즈님은 제가 황자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절 밀어내려 하시는 거죠.”
“…….”
누가 보면 자신이 황자고 그가 평민인 줄 알겠다. 그 반대의 상황인데 왜 가엾어 보이는 건 저쪽이고, 자신은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거지?
그보다 다시 만날 날만을 기다려 왔다니……. 토파즈가 미간을 좁혔다.
“설마 그때부터 쭉 좋아했다느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할 생각은 아니겠지.”
“그때부터 쭉, 인지는 모르겠고요.”
그럼 그렇지. 목숨 좀 구해 준 게 대수인가.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가 알아본 것만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토파즈가 저도 모르게 안도하는데, 카르옌이 눈을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
“살면서 마음에 품어 본 사람이 토파즈님 뿐이기는 합니다.”
“…….”
한참 침묵하던 토파즈는 천천히 손을 뻗어 카르옌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카르옌은 갑작스러운 움직임에도 얌전히 눈을 감으며 얼굴을 내맡길 뿐이었다.
깨어나기 전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손에 닿는 이마가 여전히 따듯했다. 어쩐지 미친 소리를 하더라니.
“너 아직 열 덜 내렸어.”
토파즈가 혀를 차며 그의 상태를 정의했다.
피식, 아래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카르옌이 한쪽 입꼬리만 비죽 올려 웃고 있었다. 어쩐지 성격 나빠 보이는 웃음이었다.
아, 왠지 어릴 때 얼굴이 떠오를 것 같기도 했다.
기묘한 기분에 손을 떼어내기도 전에 손목이 붙잡혔다. 평소보다 높은 체온이 미지근하게 손목을 감싸왔다.
“열 때문에 하는 헛소리라고 생각하고 싶으시면, 그렇게 하세요.”
“…….”
제멋대로 손을 끌어내린 카르옌이 손바닥 안에 뺨을 파묻어왔다. 말랑한 뺨이 부드럽게 살갗을 스쳤다.
“그렇게 생각하셔도 제 마음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요.”
카르옌이 붉은 입술을 당기며 웃었다.
……진짜 미친놈 아니야?
“그리고…….”
카르옌이 말을 이으려는 때였다. 휙, 토파즈가 문가를 향해 잽싸게 고개를 돌렸다. 손바닥으로는 어느새 카르옌의 입가를 덮고 있었다. 카르옌은 얼굴이 절반쯤 가려진 채로 눈만 깜빡거렸다. 쉿, 낮게 속삭이자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 고개를 끄덕여 왔다.
토파즈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조용히 문가로 다가갔다. 누군가 그들이 묵는 방 쪽으로 가까이 오고 있었다.
카르옌의 헛소리를 듣느라 무뎌졌던 긴장감이 확 치솟았다. 지금은 한가로이 재회에 대한 소감이나 나눌 때가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놈은 그때 그 어린아이고 황자일 뿐만 아니라 지명수배범이었다.
똑, 똑, 똑. 방문을 천천히 세 번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토파즈님. 저희입니다.”
하란의 목소리였다. 목소리를 알아들었는지 카르옌이 침대 위에서 부스럭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토파즈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소리를 내지 말라는 뜻이었다.
토파즈는 창밖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분명 약속한 시각, 익숙한 목소리였지만 이상한 점이 있었다. 발걸음 수가 너무 많았다.
“음, 문을 열지 않으시는 이유를 충분히 짐작합니다만 믿으셔도 됩니다. 옆에 있는 놈더러 한번 확인해 보라고 하세요.”
그 말에 침대 쪽을 쳐다보니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앉은 카르옌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셔도 됩니다.”
카르옌의 말에 토파즈가 문을 열어젖혔다.
문 앞에는 하란과 메르디나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뒤에 다섯 명쯤 되는 무장한 기사들이 서 있었다.
토파즈가 검집 위에 손을 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