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77)화 (77/110)

#077

카르옌은 가넷의 발을 삼키고 있던 불길을 꺼뜨리고, 꿰뚫린 심장과 복부에 치유 마법을 쏟아부었다.

쿨럭, 카르옌의 입에서 또 한 번 피가 튀었다. 입가를 닦아낼 겨를도 없이 눈앞의 상처를 회복하는 데만 집중했다.

한계까지 힘을 끌어올리고 있어서일까. 머리와 손끝이 불붙은 것처럼 뜨거웠다. 화기로 가득한 공간보다도 자신의 이마가 더 뜨겁게 느껴질 정도로 열이 올랐다.

그래도 이 악물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눈에 보이는 변화 덕분이었다. 휑할 정도로 구멍이 뚫려 있던 가넷의 왼쪽 가슴이 천천히 수복되었다. 피가 멎고 살이 차오르는 광경이 보였다.

가넷에게 드리워져 있던 죽음의 그림자를 대신 끌어온 것처럼 머리가 무거워지고 손발이 차가워졌다. 늘 죽음과 가까운 곳에서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모두 착각이었다.

죽음조차 멈춘 짧은 찰나, 겨우 목숨줄을 이어붙이는 데 성공한 카르옌은 흐려지는 시야를 간신히 붙들었다.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멈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직전, 카르옌은 남은 힘을 그러모아 온기가 식어 가는 몸을 끌어안았다. 건물 안을 빠져나가는 카르옌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멈췄던 시간이 흐르고 건물이 불타올랐다. 한 줌의 재만 남을 때까지 꺼지지 않을 불꽃이었다.

좁은 여관방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다. 평소라면 질색했을 카르옌이지만 지금은 벽의 곰팡이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마법으로 피를 씻어낸 가넷은 언뜻 멀쩡해 보였지만 여전히 심장 박동이 희미했다. 카르옌은 침대 옆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가넷의 심장에 귀를 가까이 댔다. 그의 심장이 멎는 순간을 놓칠까 봐,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카르옌은 창백하게 질린 가넷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몇 년 전과 비교하면 앳된 기색을 찾아보기 힘든 얼굴이었다. 그는 이제는 소년이라고 부르기에는 어색한, 완연한 남자가 되어 있었다.

그의 근황을 자주 살펴봤기에 언제 다시 마주친다고 해도 낯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눈앞에서 마주하니 마치 처음 만난 사람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실제로 가넷을 다시 만난다면 실망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본 적도 있었다. 크고 대단해 보였다고 해도 그것은 어린 시절의 시선이었다. 옛 기억에 갇혀 기대를 품었다가는 막상 재회했을 때 실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언젠가 그를 만나러 가리라는 혼자만의 약속은 카르옌의 삶을 나아가게 한 원동력이었다. 고작 한 계절의 만남을 잊지 못해 유년 시절을 버텼다.

메르디나의 말마따나 기이한 집착이었으나 카르옌은 가넷을 떠올리는 일이 꽤 즐거웠다. 언제부턴가 그의 근황을 확인하고 그리워하는 일이 습관이 되어 버릴 정도로.

실망을 각오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카르옌은 여전히 가넷에게서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잠시라도 눈을 뗀 순간 그가 영영 사라져 버릴까 봐 겁이 났다. 두려움 따위는 모르고 살았던 인간인데도 그랬다.

카르옌은 가넷의 손등에 이마를 대고 주문인지 기도인지, 그저 애원인지 모를 말들을 내내 읊조렸다.

“……살아. 날 지켜 주기로 약속했잖아, 가넷.”

카르옌은 힘이 채워질 때마다 바닥까지 아득바득 긁어모아 치유 마법을 때려 부었다. 몸에 저주가 새겨진 이래 원하는 대로 마법을 쓸 수 있었던 적은 없었으나 지금처럼 답답했던 적은 없었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당신을 살리고 싶을까. 어린 시절 당신이 내 목숨을 구해 주어서? 형제들이 아닌 내 편을 들어주고, 날 평범한 아이처럼 다정히 대해 주어서?

그것들은 당신을 살리고 싶은 이유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이토록 간절해지는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저주가 악화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마법을 멈추지 못하고, 대신 죽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떠올리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이해하지 못할 감정 때문이다.

아무리 합리적으로 생각하려 해 봐도 금세 눈앞의 남자가 절대 죽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그릇에 마나가 채워지는 속도보다 퍼내는 속도가 더욱 빠르니 몸이 점차 삐걱거렸다. 눈앞이 흐려졌다가 다시 돌아오는 빈도가 늘어났다. 이토록 무모하게 힘을 써 본 적은 처음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몇 번이나 죽을 위기를 넘기면서도 이렇게 간절해 본 적은 없었다.

카르옌은 가넷의 옆에 누워 잠시 기절했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다행히도 가넷의 숨소리가 점차 안정되고 있었다. 시체처럼 차가워졌다가 끓는 듯 뜨거워지기를 반복하던 체온도 얼추 정상으로 돌아갔다.

당장이라도 신관이나 의사에게 상태를 보이고 싶었지만 적어도 이 근방에서는 불가능할 듯했다. 가넷에게 금세 추격자가 붙었기 때문이었다.

카르옌은 가넷을 두고 잠시 나왔다가 식료품점 앞에서 용병 무리를 발견했다. 그들은 모두 용병 길드 녹스의 패를 목에 걸고 있었다.

“이미 죽었다고 공표된 사람을 뭐하러 찾으라는 거야?”

“시신이 발견 안 됐다잖아. 혹시 살아 계실까 봐 그러는 거겠지.”

세간에는 이미 가넷이 죽었다는 소식이 파다했다. 마수와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다고, 그의 소속 길드 녹스가 직접 발표했다. 녹스에서는 용병으로서 임무를 다하다가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한 가넷을 기리기 위해 사후에도 그를 적패의 용병으로 남겨둘 것이라고 떠들어 댔다.

“진짜 살아 있으면 당연히 길드로 돌아올 텐데. 죽었다는 사실을 믿기 싫은 건가?”

“그럴지도. 나도 그분이 죽었다는 게 솔직히 안 믿겨.”

“하여튼 길드장님부터 말단까지 다들 유별나게 군다니까.”

“근데 단순히 희망을 못 놓아서 그렇다기엔 수색이 꽤 본격적이던데……. 어제 마주친 젬마님이 이끄는 금패 용병들도 그랬잖아. 뭔가 수상쩍지 않아?”

“너희, 쓸데없는 얘기 그만 떠들고 움직여. 흔적을 발견하면 곧바로 보고하도록.”

카르옌은 그날 가넷을 데리고 건물을 빠져나오기 전, 바닥에 쓰러져 있던 시체 중 남자 검사의 시체를 가넷의 자리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불타는 건물 안에 불씨를 보탰다. 모든 흔적을 불태우고 뼛가루 한 줌만이 남도록.

그럼에도 시신을 확실하게 확인하지 못해서일까. 가넷을 죽이려던 이들은 그의 죽음에 의심을 품고 있었다. 기어이 추격대까지 보내 흔적을 뒤쫓았다.

가넷은 몸담았던 길드의 가까운 이들에게 배신당한 것이 틀림없었다. 카르옌은 그간 가넷의 곁에서 자주 보았던 이들의 면면을 하나하나 떠올리다가 생각을 멈췄다.

당장은 그를 살려내는 데만 집중해야 했다.

가넷의 동료였던 자들이니 호락호락할 리가 없었다. 지금의 카르옌은 그들로부터 가넷을 지켜낼 힘이 없었다. 곧 꺼져 버릴 것 같은 가넷의 숨을 붙여 놓는 일만으로 벅찼다.

카르옌은 추격자들을 일일이 죽이는 대신 조용히 도망치기를 택했다.

카르옌은 추격을 따돌리고 흔적을 지우기 위해 낡은 여관방을 전전했다. 비 오는 밤에 가넷을 끌어안고 마구간에서 밤을 보낸 적도 있었다.

천장에서 빗물이 새 누워 있는 가넷의 발이 자꾸만 젖었다. 결계는커녕 온열 마법을 펼칠 여유도 없어 얼어붙은 발을 체온으로 녹여야 했다.

“읍, 쿨럭!”

기침이 나와 반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카르옌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새하얀 손바닥이 피로 젖어 있었다. 각혈은 더는 낯선 일이 아니었으나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법을 쓸 수가 없었다. 아무리 마나를 끌어올리려고 애써도 말을 듣지 않았다. 몸속이 완전히 텅 비어 버린 것 같았다.

여기까지구나. 카르옌은 직감했다. 아직 가넷이 멀쩡히 눈을 뜨는 모습을 보지도 못했건만, 더는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토록 무력했던 적이 없었다. 카르옌은 더 이상 작지 않았다. 이제는 키도, 손발도 모두 가넷만큼이나 커졌다. 그런데도 가넷의 앞에만 서면 자꾸 작고 초라해졌다.

카르옌을 현세기 최고의 마법사라고 찬탄하던 이들이 지금 그의 꼴을 보면 비웃을 것이다. 사람 하나 살릴 수도 없는데 뭐가 위대한 마법사고, 세기의 천재란 말인가.

가넷은 몇 번이나 손쉽게 자신을 살려 주었는데…….

나약한 몸뚱이가 저주스러웠다. 만약 몸을 얽매는 저주가 없었더라면, 자신도 단번에 그를 살려낼 수 있었을까. 그가 이렇게 고통스럽지 않아도 되었을까. 카르옌은 식은땀에 젖은 가넷의 얼굴을 보며 참담한 심정을 삼켰다.

평생을 품고 살아 이제는 익숙해진 저주가 증오스러웠다.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 * *

발밑에 눈이 밟혔다. 숨을 쉬자 새하얀 입김이 퍼져나갔다. 카르옌의 품에는 두꺼운 망토로 뒤덮인 여러 겹의 천 뭉치가 안겨 있었다. 카르옌은 안으로 바람이 들지 않도록 망토 끄트머리를 꼼꼼히 여몄다.

카르옌은 제국의 북쪽 끝에 있었다. 모든 것이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풍경이 낯설었다.

맨몸으로 정신없이 황궁을 뛰쳐나온 카르옌이 북부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축일의 악몽’ 이후에 생긴 관행 덕분이었다.

황족들이 한날한시에 죽은 그날 이후 황위 계승권자들은 반드시 공간 이동 마도구를 몸에 지니고 다녀야 했다. 하필 카르옌의 귀에 달려 있던 것이 가넷이 북부의 전장을 떠돌던 무렵, 언제든 만나러 가고 싶어서 구해 둔 마도구라는 점이 기묘했다.

한겨울에 향하기에는 척박한 땅이었지만 도리어 나쁘지 않았다. 중상을 입은 환자가 향했다고는 쉽게 떠올리지 못할 만한 곳이었으니까.

눈밭으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밑이 푹푹 꺼졌다. 눈길을 걷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카르옌은 새하얀 설원 한복판에서 쓰러지듯 멈춰 섰다.

그 와중에도 양팔로는 천 뭉치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 꽁꽁 싸맨 옷가지를 조심스레 헤치자 가넷의 얼굴이 드러났다. 여전히 낯빛이 창백하기는 했으나 겉으로만 봐서는 바로 며칠 전에 생사를 오간 사람 같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카르옌은 가넷을 감싼 망토 안쪽으로 한기가 스며들지 않도록 다시 옷자락을 여미려고 했다.

그때였다. 가넷의 눈가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카르옌은 숨을 멈추고 그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아…….”

열흘이 넘는 시간 동안 굳게 닫혀 있던 눈꺼풀이 올라가고 새카만 눈동자가 드러났다. 잠결처럼 몽롱한 눈이었으나 착각은 아니었다.

이미 외상은 흉터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치료했지만, 정말로 깨어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은 하지 못했다. 사람의 몸은 인형과 달라서 솜을 채워 넣고 겉을 그럴싸하게 꿰맨다고 해서 이전과 똑같아지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가넷이 기어이 의식을 차렸다. 카르옌은 멍청히 탄성만 흘렸다. 가슴 한쪽이 욱신거릴 정도로 벅차올랐다.

어쩌면 자신은 지금 이 순간을 위해 마법사로 태어난 걸지도 모른다. 카르옌은 감히 생각했다.

가넷은 주변을 인지하지 못한 듯 다시 스르르 눈을 감았지만 숨소리는 고르게 퍼졌다. 머지않아 깨어날 것 같았다.

“하…….”

카르옌은 가넷의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가넷은 곧 눈을 뜰 테다. 그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이른 새벽, 마을 외곽에 있는 신전은 곧 있을 성년식 준비로 바빠 보였다. 꽃장식 따위를 들고 번잡스럽게 오가는 외부인들도 있었다. 카르옌은 고민하다가 마을 안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곧 카샤프의 대신전에서도 성년식 행사가 열릴 것이었다. 올해 열릴 성년식 행사는 여느 때보다 크고 화려하게 준비되고 있었다. 카르옌이 정확히 그날 성년이 되기 때문이었다. 아마 지금쯤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카르옌의 부재로 황궁이 발칵 뒤집히고도 남았으리라.

황제는 이번 성년식에서 카르옌을 황태자로 삼겠다는 의중을 밝히고 싶다고 했었다. 정식 책봉식은 나중으로 미뤄 두더라도, 실질적으로는 그가 성년이 되자마자 황태자로 삼겠다는 뜻이었다.

그 제안을 대차게 거절하고 얼마 되지 않아 황궁을 뛰쳐나왔으니 어쩌면 가출쯤으로 오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돌아가야겠지.”

카르옌은 다짐하듯 일부러 소리 내어 말했다.

한때는 모든 굴레를 벗어던지고 용병이 되는 꿈을 꾸었다. 가넷의 곁에 있으면 ‘2황자’를 향한 기대와 선망, 악의 따위를 전부 잊고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열두 살의 짧았던 여름에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막상 가넷의 곁을 지키던 동안에는 생각이 달라졌다. 카르옌은 이대로 멈춰 설 수도, 도망칠 수도 없었다. 지금의 그는 가넷에게 힘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짐만 될 뿐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만나러 올게.”

당신이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내가 당신에게 조금도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해도, 이제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마을 초입에서 카르옌은 뒤를 돌았다. 아까부터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여우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새하얀 털에 까만 눈동자가 꼭 잉크를 흘린 것처럼 도드라졌다.

작고, 귀엽고, 약해 보인다. 적절한 선택이었다. 카르옌이 손을 뻗었다. 여우가 경계심 없이 다가와 코끝을 들이밀었다.

이내 발자국 위로 다시 눈이 쌓였다. 세상이 백지처럼 하얗게 물들었다. 무언가를 새로 쓰기에 괜찮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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