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76)화 (76/110)

#076

카르옌이 서재에 처박힌 것은 그런 의문이 든 직후였다.

호두나무로 된 넓은 책상에 책이 탑처럼 아슬아슬하게 쌓여 있었다. 읽는 건지 그저 훑는 건지 모를 속도로 성의 없이 책장을 넘기던 손이 우뚝 멈췄다.

[금지된 마법에 관하여]

혹시 그가 찾는 종류의 마법도 있을까. 붉은 글씨로 강조된 ‘금지’라는 단어 따위는 못 본 것처럼 흘려 넘겼다. 카르옌은 관심 있게 다음 문장을 눈에 담았다.

[……현재는 죽은 생명을 되살리는 마법, 시간에 간섭하는 마법만이 전해지고 있다. 금지된 마법은 세상의 질서를 흐트러뜨릴 뿐 아니라 마법사의 생명력도 앗아간다. 초대 황제 에페르테조차…….]

금지된 마법이라고 해 놓고 사용 방법까지 친절하게 설명해 둔 책이었다. 외부 반출 불가 도서로 지정된 이유를 잘 알겠다.

그러나 금지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현시대에는 이런 마법을 쓸 수 있을 만한 마법사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남들이 대마법사니 뭐니 떠들어 대는 카르옌도 목숨은 하나뿐이니, 평생 한 번 정도나 쓸 수 있을까. 가뜩이나 부족한 생명력을 깎아 가며 쓸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관심이 사라진 카르옌이 책을 옆으로 휙 내던졌다. 황실 도서관에서 대여한 책 아니냐며 기함한 아이작이 책과 책상 사이로 팔을 쏙 집어넣는 기예를 선보였다. 어흐흑, 우는 소리가 났지만 카르옌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카르옌이 원하는 것은 다른 종류의 마법이었다. 황궁 안에서도 제국 전역을 손바닥처럼 들여다볼 수 있는 마법.

그러나 황실 도서관을 죄다 뒤져도 쓸 만한 방법은 찾아내지 못했다. 모두 제약이 크거나 쓸모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북부에서 가넷의 목이 떨어져도 남들처럼 뒤늦은 부고로나 접하게 생겼다. 카르옌은 상상만으로 불쾌해지는 기분을 억눌렀다.

마법 대신 사람을 붙여 보기도 했지만 길게 가지는 못했다. 가넷이 언젠가 했던 말마따나, 그는 꼬리를 붙인다고 얌전히 달고 다닐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카르옌의 명으로 그의 뒤를 밟다가 죽다 살아난 이들이 한 손을 넘어섰다.

여전히 펄펄 날아다니나 보네. 그때마다 카르옌은 안심하면서도 복잡한 기분에 시달렸다.

고작 몇 번 만난 상대를 향한 관심이 지나치다는 것쯤은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었다.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한 치 앞밖에 보지 못하는 제 꼴이 우스웠다.

첫사랑? 무심코 떠올린 비유에 헛웃음이 나왔다.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한 사람이 멋대로 손아귀에서 빠져나간 적은 처음이라 자꾸만 떠오르는 것이다. 그가 안겨 준 배신감과 허탈감이 강렬해 계속 아른거릴 뿐이다. 목숨을 구해 준 은인에 대한 동경도 조금쯤은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카르옌은 종종 가넷이 나오는 꿈을 꾸고는 했다. 예전처럼 언덕에서 만나 초콜릿이나 나눠 먹는 한가로운 꿈일 때도 있었고, 북부에서 날아든 가넷의 부고를 읽는 꿈일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카르옌은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나 습관처럼 목걸이를 쥐었다.

“……악몽을 꾸지 않게 해 준다더니, 오히려 악몽을 안겨 주잖아.”

원망스럽게 중얼거리면서도 목걸이를 몸에서 떼어내지는 못했다.

이듬해 봄, 카르옌은 황립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북방에서 가넷이 이끄는 용병대가 또 한 번의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흘러들어온 무렵이었다.

그해에는 마수로 인한 희생자가 눈에 띄게 줄었다. 사람들은 그게 모두 영웅 가넷과 그의 용병단인 녹스 덕분이라고 떠들어 댔다. 이제 제국에는 그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어졌다.

카르옌은 뻔히 아는 내용만 떠들어 대는 수업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학생용 연구실 하나를 얻어 종일 처박혀 있고는 했다. 지식의 보고로 이름 높은 아카데미 도서관과 최고의 마법사라 칭송받는 교수들조차 그에게는 하나의 자원에 불과했다.

카르옌이 ‘다 때려치우고 나도 그냥 용병이 되는 편이 빠르겠다’는 극단적인 결론을 내릴 때 즈음 연구에 진척이 나타났다.

연구실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온 참새 한 마리를 보며 떠올린 발상이었다. 직접 갈 수 없다면, 대신 보내면 된다.

“전하. 밖에서 하란이 전하를 뵙고자 청하고 있습니다.”

연구실로 들어온 메르디나가 말했다. 한 해 만에 키가 한 뼘이나 자란 카르옌은 소파에 몸을 뉘고 있었다. 대답이 없는 그는 꼭 잠든 것처럼 보였지만 메르디나는 조용히 기다렸다.

“그게 누군데.”

한참 만에 카르옌이 대꾸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흐릿하던 눈동자가 선명하게 푸른 빛으로 차올랐다.

“지난번 전하께서 목숨을 구해 주신 아히네스 백작가의 막내아들, 하란 아히네스입니다. 저와 같은 검술부 학생입니다.”

“아, 걔. 왜 자꾸 찾아오는 거야? 돌려보내.”

“이미 열 번 정도 설득해 보았습니다만 듣지 않습니다.”

“그럼 그냥 내버려 둬.”

카르옌은 소파에 누운 채 손바닥으로 입가를 쓸었다. 나른하면서도 기분이 좋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메르디나는 그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어렵잖게 짐작했다.

“또 ‘그’를 지켜보고 계셨습니까?”

“응.”

카르옌이 쓰고 있던 것은 동물의 눈을 빌리는 마법이었다. 그의 손에 닿았던 동물의 눈을 통하면 직접 움직이지 않고도 제국 곳곳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런 마법을 만들어 놓고도 정적의 계략을 파헤치거나 권력을 공고히 하는 대신 고작 용병 하나를 지켜보는 데 쓰고 있었으니 남들이 알면 혀를 찰 일이었다. 물론 카르옌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그 마법을 사용하는 동안에는 카르옌의 몸이 무방비 상태가 된다는 점뿐이었다. 눈을 뗀 사이 그 동물이 죽어 버리는 경우도 잦았기 때문에 매번 새로운 동물을 찾아 보내는 것도 꽤 번거로웠다. 그러나 그 위험과 번거로움을 모두 감수할 만한 효용성이 있었다.

특히 오늘은 운이 좋았다. 카르옌이 눈을 빌린 고양이를 가넷이 두 번이나 쓰다듬어 주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안 그런 척하면서 작고 어린 것들에 약한 사람이었다. 촉감까지 전해지는 마법은 아니라지만 부드럽게 내리깐 눈을 볼 수 있었던 것만으로 만족스러웠다.

마음 같아서는 매일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위험성 탓만은 아니었다. 그가 신뢰하는 친척이자 충신, 메르디나가 건넨 조언 때문이었다.

‘그건 집착입니다, 전하.’

‘그러면 안 돼?’

‘그가 알게 된다면 싫어할 겁니다. 그는 기민하고 눈치가 빠른 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

그가 싫어한다고? 그가 날 싫어하게 되면 곤란한데. 카르옌은 한참 고민하다가 물었다.

‘그럼 그가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하지?’

‘…….’

‘난 카샤프를 함부로 떠날 수도 없는데. 그가 너무 보고 싶으면…….’

카르옌은 말을 잇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때 그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자신의 마음은 동경 따위가 아니었다.

카르옌은 가넷을 닮고 싶거나 따르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를 더 자주, 더 오랫동안 보고 싶었다. 손을 잡고 싶었고 그가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으면 했다.

차마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에 짓눌린 유년 시절이 지루할 만큼 길었다.

* * *

카르옌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가넷을 내려다보았다. 언뜻 얌전히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가 입고 있는 새카만 옷은 전부 피로 젖어 있었다.

테이블 아래로 쏟아지던 술, 가슴에서 새어 나오던 피, 타오르던 불길이 모두 멎었다. 멈춘 시간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카르옌 한 사람뿐이었다.

“……가넷.”

카르옌은 가넷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바닥을 짚는 손가락이 잘게 떨렸다.

6년 만이었다. 한참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커다랬던 가넷이 이제는 작게 느껴졌다. 열여덟이 된 카르옌이 몰라보게 자랐기 때문이지만, 어쩐지 가넷이 작아진 것처럼 느껴졌다. 점점 작아지다가 눈앞에서 사라질 것만 같았다.

“당신이 대체 왜 이런 꼴로 있어.”

가넷과의 재회가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지 수천 번 상상했으나 그중에 오늘 같은 그림은 없었다. 이런 꼴로 재회하기 위해 멀리서 지켜보고만 있던 것이 아니다.

몇 번이고 직접 보러 오고 싶었다. 그러지 못했던 이유는 황자로서의 책무 때문도, 널을 뛰는 병세 때문도 아니었다.

카르옌은 오랜 시간 그의 일상을 지켜보았다. 가넷은 여전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영웅이었다. 그의 손에 지켜진 이들은 셀 수도 없었고 그의 곁에는 늘 생사를 함께 하는 동료들이 있었다.

나도 조금만 더 자라면, 더 건강해지면, 더 괜찮은 사람이 되면……. 몸과 마음이 자라날수록 재회를 미루게 되었다.

나날이 커져 가는 자신의 마음과 달리 가넷은 수년 전에 마주친 꼬마 따위는 이미 잊었을 것 같았다. 그에게 자신이 별것 아니라는 사실을 또 한 번 확인받기가 두려웠다.

아카데미를 졸업한 이후로는 가넷의 근황을 살피던 버릇도 줄여 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오늘은 유독 그가 보고 싶은 마음을 이기지 못해 눈을 빌린 것이었다. 어찌 보면 천운이었고 어찌 보면 불운이었다.

카르옌은 가넷이 들어간 건물에서 불길이 치솟는 광경을 보자마자 달려왔다. 뒷일을 생각할 정신도 없었다.

그러나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것처럼 보였다. 가넷의 발끝에는 불이 붙어 있었고 심장 박동은 희미했다. 다음 숨에 그의 생명력이 모두 빠져나갈 것 같았다.

카르옌은 어린 시절 낡은 고서에서 본 금지된 마법을 떠올렸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떠올라서, 내심 이런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고 스스로 예감하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어쩌면 일생에 단 한 번 정도는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한 그 마법. 이미 그릇이 멀쩡하지 않은 마법사에게는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카르옌은 망설이지 않았다. 망설일 새도 없었다.

마법이 허락한 시간은 아주 찰나였다.

카르옌은 멈춘 시간 속에서 가넷을 향해 손을 뻗었다. 숨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시간이 멈췄기 때문인지 아니면 숨이 멎었기 때문인지, 지금은 알 수 없었다.

목에서 핏물이 올라왔다. 마르지 않는 샘처럼 몸 안을 채우던 마나가 떨어지고 그릇이 고장 난 것처럼 덜컥거렸다.

카르옌의 몸 상태는 나이가 들수록 점차 호전되는 것처럼 보였다. 마법을 다루는 요령이 늘어서 그런 것도 있었고, 자라난 몸이 저주를 이겨내고 있어서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심장에 새겨진 저주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몸을 옭아맸다. 뾰족한 가시가 온몸을 찌르는 것 같았다.

“쿨럭.”

카르옌은 어린 날 종종 그랬던 것처럼 입으로 검붉은 피를 토해 냈다. 하지만 바닥이 이미 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기 때문에 조금도 티가 나지 않았다. 이 많은 피가 모두 가넷의 것이었다.

카르옌은 심장이 꿰뚫린 가넷의 몸 위에 손을 얹었다. 이 마지막 숨이 흩어지기 전에 살려내야만 했다.

가넷이 이대로 영원히 눈을 뜨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가슴 안의 무언가가 소리도 없이 무너졌다. 이만큼 쌓아 올린 줄도 몰랐던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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