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75)화 (75/110)

#075

이별은 그들의 첫 만남만큼이나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겨우 만났네.”

기다리던 목소리에 카르옌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가넷이 언덕 위를 성큼성큼 올라오고 있었다. 달려오기라도 했는지 붉은 머리칼이 이마 위에서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원래도 매일 같이 만나던 사이는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무려 보름 만에 겨우 얼굴을 보는 것이었다. 보름 동안 카르옌은 대신전 뒤편 언덕에서 해가 질 때까지 그를 기다리다가 홀로 언덕을 다시 내려가고는 했다.

“뭘 그렇게 급하게 와?”

새침한 말투와 달리 카르옌의 입가에는 반가운 미소가 걸렸다.

가넷이 카르옌의 앞에 섰다. 평소처럼 옆에 털썩 주저앉거나 누워 버리는 대신 양손을 허리에 대고 숨을 골랐다. 어지간해서는 숨이 찰 사람도 아닌데, 정말 다급히 달려오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가 자신을 만나기 위해 서둘렀다고 생각하니 꽤 흡족했다.

“급한 일 있어? 앉지 그래.”

카르옌은 처음 그를 만났을 때에 비하면 대단히 부드러워진 말투로 권했다. 그러나 가넷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곧이어 청천벽력 같은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 카샤프를 떠나게 됐어.”

“……뭐?”

웃자란 풀을 휘감던 바람마저 멎어 사위가 조용했다. 잘못 들었다고 여기기에는 그 말이 너무 선명하게 귓가에 박혔다. 카르옌은 가넷을 올려다본 채로 굳었다. 삐걱거리는 고개를 움직여 얼굴을 살피자 가넷이 눈썹을 조금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더는 나 만나러 여기 나오지 마. 이젠 날씨도 춥잖아.”

“어디로, 왜……. 아니, 언제 돌아오는데?”

“몰라. 내가 속한 용병단이 아예 근거지를 옮기기로 해서, 당분간은 카샤프로 돌아올 일 없을 거야.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고.”

“…….”

영원히? 어떻게 저런 말을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있지? 그럼 여기서 매일 당신을 기다리던 나는. 나와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건가?

“미리…… 얘기해 줄 수 있었잖아.”

“확정된 지 얼마 안 됐어. 그리고 너도 짐작했겠지만, 난 원래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 사람이야.”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한 어조로 말하는 가넷이 괜히 원망스러웠다. 가넷의 말대로, 그의 직업이 용병임을 알고 있었다. 이별은 예정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쉬이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내가 당신을 고용하면 안 돼? 제일 비싸게 고용할게. 힘든 일도 안 시켜. 당신이 얼마를 생각하든 그 이상으로 지불할 수 있으니까…….”

“…….”

“내가 못된 어린애라서 아직 안 돼?”

고작 한 계절. 석 달 동안 그를 만난 횟수는 열 번이 채 되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조차 묻지 않는 상대였다. 이렇게까지 매달릴 이유가 없는데도 카르옌은 자꾸만 절박해졌다.

“의뢰는 거절해야겠지만 네가 착하지 않아서도, 어린애라서도 아니야. 지난번에 한 말은 농담이었어.”

무뚝뚝한 말투였지만 가넷이 자신을 달래고 싶어 한다는 게 느껴졌다. 부드러운 눈빛을 본 카르옌이 이를 악물었다.

“그럼 왜 꼭 떠나야 하는데?”

“친구랑 약속했거든. 그 애의 목표를 이루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친구. 지난번에 봤던 그 까만 머리의 남자를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모르는 다른 사람? 누군지 짐작할 수도 없는 이에게 단숨에 밀려나고 말았다.

가넷은 조금 미안한 얼굴이었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카르옌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잠깐 시간을 내서 나왔다고 했다. 오늘 못 만났으면 인사도 못 했을 텐데, 다행이라고 말하는 얼굴이 후련해 보였다.

그 순간 카르옌은 그와 자신이 서로에게 가진 마음의 무게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마음이 무엇인지 형태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저울이 자신 쪽으로 한없이 기울어 있음은 직감했다. 카르옌의 두 발이 질척한 바닥을 딛고 있는 동안 가넷은 자신이 누군가의 저울 위에 올려져 있는 줄도 모르고 훌훌 날아가 버릴 것이다.

가넷에게 카르옌은 우연히 몇 번 구해 준, 그리고 어쩌다 보니 몇 번 만나게 된 꼬마에 불과했다. 그가 잠깐 어울려 준 꼬마가 카샤프에만 열 명쯤 있을지도 몰랐다. 카르옌에게는 그뿐인 것과 다르게.

자신은 무슨 수를 써도 그를 잡아 둘 수 없었다. 돈과 명예를 약속해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강제로 매어 놓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는 무척이나 강했으니까.

처음으로 느껴 보는 통렬한 열패감과 허무감이었다.

카르옌은 눈을 내리깐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심한 발아래에 짓이겨지고 있는 잡초가 꼭 자신 같았다.

“자, 이거.”

가넷이 옷 안쪽으로 손을 넣더니 목에 차고 있던 목걸이를 풀어냈다. 그가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춰 왔다.

사락, 후드가 뒤로 넘어갔다. 카르옌의 긴 금발이 어깨 아래로 쏟아졌다. 비슷한 눈높이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시원스럽게 뻗은 눈매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데 뜨거운 손끝이 목덜미를 스쳤다.

“무슨 사연인지 몰라도 어린 나이에 목숨이 노려질 정도면 네 인생도 순탄하지만은 않겠지.”

카르옌이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카르옌의 목에 조금 전까지 가넷이 차고 있던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목걸이에 달린 것은 세공된 보석도 아닌 푸른 돌조각이었다. 표면이 매끈해 얼핏 반짝이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아마 물가에서 마모되었거나 누군가 어설프게 깎아낸 것 같았다.

“얼마 전에 의뢰하다가 얻은 건데, 너한테 줄게. 난 원래 장신구를 안 좋아해서 오래 갖고 있을 자신도 없었거든.”

“……이게 뭔데?”

“뭔지 몰라? 이걸 지니고 있으면 악몽을 내쫓고 좋은 꿈을 꾸게 해 준대. 요즘 수도에서 유행이라고 하던데.”

황궁 밖에서 유행인지 뭔지 카르옌이 알 턱이 없었다. 무엇보다 마법이 걸려 있는 물건도 아닌데 좋은 꿈을 가져올 리가 있나. 물건을 팔아먹으려는 상술이 뻔했다.

애써 냉소적으로 생각하면서도 카르옌은 푸른 돌을 꼭 움켜쥐었다. 오랫동안 걸고 있었는지 따뜻한 체온이 남아 있었다.

“그럼…… 잘 있어. 건강하고.”

‘가지 마’, 혹은 ‘당신도.’ 그 쉬운 대답이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카르옌은 제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은 뒤 멀어져 가는 가넷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무정하고도 다정한 사람. 끝내 뒤돌아보지 않는 무정함이 미웠으나, 스치듯 만난 아이가 악몽을 꾸지 않기를 바라는 다정함이 좋았다.

카르옌은 그의 모습이 언덕 아래로 사라질 때까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응시했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가넷은 카르옌에게 두려움뿐만 아니라 다른 감정들도 가르쳐 놓았다. 열패감, 상실감, 그리고 아직은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들까지.

정신을 차려보니 양손이 텅 비어 있었다. 애초에 쥔 적도 없었던 것처럼.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서늘했다. 깨닫지 못한 사이 한 계절이 끝나고 있었다.

* * *

그해 겨울, 카르옌은 성장통을 호되게 앓았다.

자고 일어날 때마다 키가 자라 있었다. 팔다리가 길어져 매번 옷 치수를 새로 재야 했고, 몸을 이루는 선도 조금씩 굵어졌다. 어깨를 덮던 머리칼을 짧게 잘랐고, 높은 미성에 가까웠던 목소리는 제 귀로 들어도 낯설 정도로 낮아졌다.

변한 것은 외형뿐만이 아니었다. 카르옌은 더 이상 황궁 밖으로 뛰쳐나가지 않았다. 몇 번인가 나가 봤지만 지난여름의 즐거움은 찰나의 꿈이었던 것처럼 모두 무료하기만 했다.

“전하. 이러지 마시고 식사라도 제대로 챙기시지요.”

카르옌이 황자궁 서재에 파묻혀 먹고 자고를 반복한 지가 이레째였다. 이틀째에 벌써 소식이 황제궁으로 흘러 들어가 걱정이 담긴 인사와 함께 찻잎을 한 무더기 받았다. 사흘째에는 아버지가 직접 찾아왔고, 어제는 황녀궁에서도 과일을 보내 왔다.

몇 달째 심심하면 몰래 황궁 밖으로 뛰쳐나가 황자궁 시종들의 속을 썩이던 카르옌이 이제는 궁 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오락가락하던 2황자가 드디어 죽거나 미쳐 간다는 소문이 퍼졌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고작 궁 안에 좀 틀어박혔다고 곧 죽을 사람 취급을 받다니. 누구는 지금 전장에 나가 있는데 말이다.

이레 전, 가넷의 용병단이 북해로 향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가넷이 옆 동네라도 가듯이 가볍게 인사를 남기고 떠난 지 이제 석 달이었다.

이 혹한의 추위에 그가 향한 장소가 매일 사람이 마수에 찢겨 죽는 전쟁터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카르옌은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카샤프로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 이런 뜻이었나. 그것은 단순히 돌아올 예정이 없어서 한 말이 아니었다. 죽어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늘 생각하며 살지. 내가 흘리게 한 피만큼 언젠간 내 피도 흐를 거라고.’

처음 만난 날 가넷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가넷은 늘 담담하게 자신의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용병이 위험한 직업이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일했다. 그러나 가넷이 위험하리라는 생각을 진지하게 해 본 적은 없었다. 그는 아직 어렸지만 카르옌이 보아 온 누구보다도 강했으니까.

그러나 그도 결국은 인간이었다. 마수와의 싸움으로 매일 피가 흐르는 북방의 전장에서 가넷이라고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

카르옌은 목에 걸린 푸른 돌을 꾹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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