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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토파즈 (74)화 (74/110)

#074

황궁 밖까지 암살자가 따라붙는 빈도가 늘었다. 카르옌의 외출이 눈에 띄게 잦아지면서부터였다.

황궁에 잠입하거나 내부자를 회유하는 것은 까다로운 일이니 상대 입장에서도 황궁 밖에서 기회를 노리는 편이 쉬울 터였다. 암살이 아니라 불운한 사고에 휘말린 척 손을 쓸 수도 있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그 위험성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카르옌은 하루가 멀다 하고 황궁을 뛰쳐나갔다. 지루하기 짝이 없던 그의 인생도 이제야 조금 재밌어지려는 참이었다. 성가신 방해꾼들 때문에 즐거움을 포기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음, 하지만 저것들이 가넷의 존재를 알아내고 그에게 괜한 수작을 부렸다가는 곤란하겠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카르옌은 곧장 론하르트 언덕으로 향하는 대신 방향을 틀었다. 가넷이 순순히 당해 줄 위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매번 적에게 쫓기는 꼴을 보여 주고 싶지도 않았다.

9월에 접어들면서 야시장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제국의 수도인 만큼 밤에도 영업하는 여관이며 가게들의 불빛으로 거리는 환했지만, 야시장이 열릴 때만큼의 활기는 없었다.

밤공기도 차츰 서늘해지고 있었다. 카르옌은 일부러 으슥한 골목을 찾아 들어왔다. 그늘진 곳 특유의 한기가 뺨을 스쳤다. 카르옌은 후드 양쪽을 잡아 푹 눌러 쓰며 걷다가 적당한 때에 뒤를 돌았다.

카르옌은 섣불리 공격하는 대신 암살자들이 모두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다렸다. 지난번의 멍청한 실수를 두 번 반복하는 일은 없었다. 한 번에 끝내야 했다.

그때 건너편 건물의 지붕 위에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카르옌은 짧은 수인을 맺어 방어막을 펼쳤다. 쾅! 방어막에 막혀 튕겨 나간 얼음 화살이 건물 외벽에 꽂혔다.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지붕 위에서 지팡이를 꺼내든 마법사가 보였다. 한 명이 아니었다. 이번 암살자 가운데에는 마법사가 둘이나 섞여 있었다.

카르옌은 그것이 매우 멍청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기사라면 순수한 완력으로 싸웠을 때 카르옌이 밀릴 가능성이 크지만 마법사는 달랐다.

어떤 마법사도 카르옌보다 더 빠르게, 더 뛰어난 마법을 펼칠 수는 없었다. 적어도 그가 지금까지 봐 온 이들은 전부 그랬다.

카르옌이 반격을 위해 손을 뻗었다. 날카로운 얼음 화살 십수 개가 카르옌의 등 뒤로 떠올랐다. 암살자들을 향해 화살을 일제히 쏘아 보내려는 때였다.

어두운 골목 안쪽에서 예고 없이 무언가 튀어나왔다. 카르옌과 암살자들의 신경이 모두 날카롭게 그쪽을 향했다. 지붕 위의 마법사가 쏘아 보낸 얼음 화살이 방향을 틀었다.

“캬하악!”

그러나 튀어나온 것은 작고 꼬질꼬질한 고양이 한 마리였다. 얼음 화살이 고양이를 향해 그야말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멍청한 고양이가, 왜 하필 여기로 튀어나와서는.

카르옌이 다급하게 발을 떼었다. 그리고 고양이의 위를 덮듯이 감쌌다. 바닥을 짚은 손 아래에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라도 있었는지 손바닥이 찢어지며 피 냄새가 났다. 통증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품 안에서 고양이가 겁에 질린 울음소리를 냈다.

“캬악! 학!”

조용히 좀 해……. 카르옌은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고양이를 향해 핀잔하면서도 바닥에서 무릎을 떼지는 않았다. 카르옌은 그의 등 쪽으로 화살이 쏟아지리라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등 뒤는 이상할 만큼 잠잠했다.

풀썩.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에 카르옌이 눈을 떴다. 지저분한 바닥을 딛고 선 투박한 신발이 보였다. 조금씩 고개를 들어 올리자, 믿을 수 없을 만큼 익숙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또 너야?”

가넷이 암살자 한 명을 발로 차 벽에 처박으며 물었다. 과격한 움직임과 달리 낮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아…….”

카르옌의 입에서는 대답 대신 탄성만 흘러나왔다. 제 앞을 가로막고 있는 인영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마치 그날과 같았다.

가넷은 가볍게 움직여 카르옌을 향해 내리꽂히던 검을 모두 맞받아쳤다. 누군가는 검을 놓쳤고 누군가는 뒤로 밀려나다가 한 걸음 만에 심장을 찔렸다.

눈으로 따라잡기 힘든 속도였다. 최소한의 동작으로 날렵하게 검을 휘두르는 가넷의 움직임은 마치 정적인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했다.

순식간에 암살자 다섯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지붕 위의 마법사 둘은 이미 날카로운 단도에 목이 꿰뚫린 뒤였다. 사납게 울어 대던 고양이는 붙잡을 새도 없이 카르옌의 품에서 빠져나갔다.

구름 사이에서 빠져나온 달이 골목에 드리운 어둠을 몰아냈다. 어둠에 묻혀 있던 붉은 머리칼이 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였다.

사람들은 용병 가넷에 대해 이야기할 때 꼭 그의 머리칼이 피를 뒤집어쓴 것처럼 붉다고 말했다. 카르옌은 그들이 실제로 이 머리칼을 본 적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핏빛이 아니다. 그의 머리 색은 피 따위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한여름에 핀 장미 같기도, 노을에 물든 하늘 같기도 했다.

심장이 점차 빠르게 뛴다 싶더니 어느새 달음박질치고 있었다. 꼭 전속력으로 달리기를 하고 난 사람처럼 숨이 가빠왔다.

가넷은 검을 다시 검집 안에 집어넣고 나서야 뒤를 돌았다.

“넌 왜 볼 때마다 위험에 처해 있어?”

당신이야말로 왜 자꾸 나를 구해 주느냐고 묻고 싶었다. 도와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저 손에 구해진 게 벌써 세 번째였다. 카르옌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는 당신은, 볼 때마다 누굴 도와주고 다니네.”

카르옌은 후드를 쓰고 있었다. 아마 그가 이 난투에 끼어들었을 때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몰랐을 터였다. 카르옌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어도 도왔으리라는 의미였다.

“도와줄 수 있는데 안 도울 이유 없잖아.”

가넷이 짧게 대답했다. 그가 카르옌을 향해 가까이 다가오며 미간을 좁혔다.

“피 냄새.”

“…….”

“손 줘 봐.”

멍청하게 쳐다보기만 하자 가넷이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카르옌보다 눈높이가 낮아진 그가 덥석 손을 붙잡아 왔다. 찢어져 피가 흐르는 손바닥을 멋대로 뒤집어 가며 이리저리 살펴보는 와중에도 카르옌은 그의 손이 무척 뜨겁다는 생각밖에 할 수가 없었다. 머리 회전이 느렸다.

“다쳤네.”

“별거 아니야.”

카르옌이 손을 뒤로 빼며 대답했다. 그러나 손은 금세 다시 붙잡혔다.

“별거 아니긴.”

“…….”

“다행히 파편이 박히진 않은 것 같네.”

가넷은 품 안에서 깨끗한 흰 천을 꺼내 쭉 찢었다. 카르옌의 손에 감아 주는 움직임이 능숙했다. 늘 저런 천을 가지고 다닐 정도로 그와 그의 주변 사람들은 다치는 일이 잦은 거겠지. 아마 이런 상처 따위는 우습게 보일 정도로 큰 부상도 많이 당해 봤을 터였다.

그러나 토파즈는 별거 아니니 엄살떨지 말라는 말 대신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 시장에서 넘어진 다섯 살짜리 애를 봤는데, 넘어지자마자 엉엉 울더라. 그러니까 걔 아빠가 와서 얼른 일으켜 세우고 무릎을 털어 주더라고. 많이 아프냐고, 자기가 더 아픈 얼굴로 물어보면서.”

“…….”

“신기했어. 어디 한 군데 부러진 것도 아니고 무릎 좀 까졌다고 그렇게 서럽게 울다니. 달래 줄 사람이 있음을 아는 거겠지.”

카르옌의 손바닥을 꽁꽁 동여맨 가넷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달래 줄 사람 있을 땐 울어도 된다고.”

당신은 대체 뭘까?

카르옌의 몸에 작은 생채기라도 나면 난리를 피우는 이들은 이전에도 있었다. 그들은 카르옌의 몸을 금은보화나 성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카르옌이 황제의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예언을 받고 태어난 위대한 마법사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넷은 달랐다. 그에게 자신은 정체도 모르는 수상한 어린애였다. 그는 자신을 도와줄 이유도 의무도 없었다.

모르겠다. 원래 황궁 밖의 사람들은 모두 서로에게 이토록 다정한 건지. 어린아이라는 이유만으로 늘 너그럽고 친절하게 보호해 주는 건지.

그러나 모두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기분을 느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은 가넷이 아니었으니까.

카르옌은 울어 본 기억이 없었다. 황궁에서 자라는 어느 아이도 열두 살에 어리광 부리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 그러니 가넷의 말에 갑작스레 눈물이 터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슴 한구석이 참을 수 없이 일렁거렸다.

“응, 나 아파.”

목 안으로 차오른 어리광을 흘려보냈다. 제 귀로 듣기에도 낯선 말투였는데 가넷은 그저 피식 웃었다.

“그래, 엄청 아프겠다. 그래도 너 용감하더라. 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고양이를 다 살리고.”

“……내가 바보야? 다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그랬지.”

허접한 마법사가 쏘아 보낸 화살 따위야 언제든 막을 수 있었다. 괜히 불퉁하게 대답하자 가넷이 또 웃었다.

“네가 정예검사도 아니고, 그런 거 계산한 뒤에 움직였으면 이미 늦었어. 결론 내리기 전에 몸부터 움직였으니 구한 거야.”

“…….”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게 더 어려운데. 내가 너한테 배워야겠네.”

……당신도 날 몇 번이나 살렸잖아. 그렇게 대답하려던 말은 머리 위로 툭 올라온 손 탓에 목구멍 안에서만 맴돌았다. 헐렁한 후드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손이 부드럽게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잘했어.”

카르옌을 내려다보는 새카만 눈동자는 꼭 밤하늘 같았다. 그 눈동자 안에는 별 하나 없었는데도 자꾸만 반짝였다. 아마 그의 강인함과 다정함 때문이겠지.

이 눈빛을 더 자주, 더 오래 보고 싶다. 미처 깨닫지 못한 욕심이 카르옌의 마음을 부풀렸다.

가지고 싶다고 모두 손에 넣을 수 없다는 걸 모르던 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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