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73)화 (73/110)

#073

가넷이라는 이름 두 글자만 알려진 그 용병이 몰고 다닌 소문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원래 북해의 전장에서도 유명한 군인 출신이라느니, 마차 사고로 죽은 소년의 원한을 갚아 주기 위해 귀족의 손가락을 잘랐다느니, 부정하게 부를 축적한 거상의 저택에서 돈을 털어와 빈민가에 가져다주었다느니…….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그는 때로 너그러운 영웅이었고 때로는 냉혹한 복수자였으며 의적이거나 혁명가이기도 했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그가 목숨을 걸고 수도를 지켜낸 공적만은 사실이었으며, 가넷이라는 이름은 올해 수도에서 가장 뜨겁게 오르내리는 이름이었다.

그 가넷이 저렇게 새파랗게 어린애였다니. 누구도 쉬이 믿지 못할 터였다. 그럼에도 동명이인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붉은 머리칼에 저토록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용병이 또 있으리라는 가정이 더욱더 비현실적이었다.

카르옌은 발길을 돌리는 대신 신전 뒤편의 언덕으로 향했다. 따로 약속한 적은 없었지만 두 사람이 암묵적으로 만나곤 하는 장소였다. 가넷이 자주 찾는 장소를 카르옌이 찾아간다는 쪽이 더욱 정확하겠지만.

가넷은 해가 질 무렵 나타났다. 그는 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카르옌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설마 했는데. 왜 아직도 여기에 있어?”

“아까는 왜 모른 척했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되묻자, 가넷이 어깨를 으쓱였다.

“옆에 일행이 있어서. 내 동료인데, 쓸데없는 호기심이 많은데다 빈말로도 성격이 고운 놈은 아니라. 너한테 아는 척하면 귀찮아질 것 같았어.”

“…….”

고작 그런 이유였다고? 옆에 들러붙던 칙칙한 남자를 자연스럽게 ‘내 동료’라고 칭하는 것도 어쩐지 거슬렸다. 그놈은 ‘동료’고, 카르옌은 그냥 ‘너’?

진짜 이름을 가르쳐줄 수 있는 처지도 아니면서, 그가 여태껏 자신의 이름 한 번 묻지 않았다는 사실이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가까이 다가온 가넷이 옆에 털썩 앉았다. 팔을 뒤로 뻗어 몸을 지탱한 그가 카르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모른 척해서 서운했어?”

“…….”

서운? 겨우 그런 일로 서운할 일이 있겠느냐며 비웃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입술이 딱 붙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가넷이 손을 뻗어 카르옌의 머리칼을 슥슥 쓰다듬었다.

“그런데 너야말로 아까 뭐 하려고 했어?”

“뭐가.”

불퉁하게 대꾸하자 가넷이 고개를 슬며시 기울였다.

“그 남자한테 마법 쓰려고 하는 것 같던데. 아니야?”

……뭐?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당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야 마땅한데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가넷의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무리 수도라지만 길거리 한복판에서 마법 쓰면 눈에 띄어. 사람을 해하면 수도 마법사단에서 조사를 나올지도 모르고.”

카르옌은 굳은 입술을 겨우 달싹이며 물었다.

“내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지?”

그는 가넷에게 자신이 마법사라는 사실을 말한 적도, 그의 앞에서 마법을 쓴 적도 없었다. 단 한 번도. 그런데 대체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암살자, 첩자, 배신……. 오만가지 가정이 카르옌의 머릿속을 덮쳤다.

가넷이 천천히 손가락을 뻗어 카르옌의 심장 부근을 쿡, 찔렀다. 카르옌은 그 행동을 뻔히 보면서도 막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만약 그의 손에 검이 들려 있었다면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막을 수 있었을까?

“난 원래 마법사를 잘 알아봐. 여기에서 독특한 느낌이 나거든.”

“……그걸 지금 믿으라고 하는 소리야? 마법사도 아닌 당신이 ‘그릇’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고? 어떻게?”

“정확히는 그릇이 아니라 그릇에 고인 마나의 흐름을 느끼는 건데. 여기에서 뭔가 소용돌이치는 듯한 느낌이 난다 싶으면 거의 마법사더라. 마법사라고 다 알아보는 건 아니지만, 넌 마력이 꽤 강한 것 같던데. 아니야?”

이게 그렇게 드문 일이냐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얼굴을 보자, 끓는 물을 부은 것처럼 뜨겁던 머리가 순식간에 식었다.

그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을까?

그는 가넷이었다. 가넷이 카르옌을 죽이고자 했다면 목표를 이룰 수 있었던 순간은 무수히 많았다. 카르옌은 그의 앞에서 지나치게 안일하게 굴었으니까.

지금만 해도 그랬다. 카르옌을 죽이고 싶었다면 장난치듯 손끝을 대는 것이 아니라 날카로운 검으로 심장을 찔러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그날 밤에 살려 주지 않았으면 그만이었다.

“그럼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야? 알고 있으면서 왜 날 도와주고, 데려다주고 그랬는데?”

카르옌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었다. 가넷은 카르옌의 얼굴을 살피더니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게 무슨 상관인데. 마법사는 애 아니야?”

“…….”

카르옌은 가넷에게 황자라는 신분은 물론, 마법사라는 사실도 절대 들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자신을 평범한 아이처럼 대해 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니…….

카르옌은 지금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감정을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허탈함, 만족감, 어쩌면 안도감까지 뒤섞인 것 같았다.

“그리고 너 예전에도 말했지만 혼자 돌아다닐 때는 되도록 얼굴을 가려. 너 같이 생긴 애들은 눈에 띄어서 표적이 되기 너무 쉬워.”

“그러는 당신은?”

가넷은 남의 외모가 눈에 띈다는 이야기를 운운할 처지가 아니었다. 유약함과는 거리가 먼 인상이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용병들처럼 우락부락한 체구도 아니었다.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해질 정도로 늘씬한 체구에 근사한 얼굴까지 달고 있으니 그 역시 살면서 피곤한 일을 꽤나 겪었으리라.

“난 내 한 몸 지킬 힘은 있어.”

그런 말을 하는데도 전혀 으스대는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 근거 있는 자신감이, 흔들리지 않는 강인함이 부러웠다.

“아니면 호위라도 데리고 다녀. 집에 그런 거 없어? 호위를 열 명쯤은 데리고 다니는 집안사람인 줄 알았는데.”

열 명이 아니라 백 명도 달고 다니는 집안이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당신이 날 지켜 주면 안 돼?”

“…….”

가넷이 한쪽 눈썹을 휙 치켜올렸다. 갑자기 무슨 헛소리냐는 얼굴이었다. 카르옌은 저도 모르게 잇새로 웃음을 흘렸다. 흘러나오는 대로 저항 없이 웃자 가넷의 표정이 점점 이상해졌다.

“난 돈을 받아야만 일해. 게다가 몸값이 꽤 비싸지.”

소년이 용병 가넷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당연한 소리였다. 그는 지금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용병이었으니까. 하지만 카르옌에게는 지불할 돈이 얼마든지 있었다.

“얼만데? 나 돈 많아.”

“함부로 그런 말을 하고 다녔다간 주머니에 있는 먼지 한 톨까지 탈탈 털리고 말걸.”

“아직 당신한테밖에 말 안 했어.”

“그래, 기특하다. 나의 뭘 믿고 그런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은 내 목숨을 구해 줬잖아.”

“…….”

초저녁의 여름 바람이 뺨을 스쳤다. 뺨이 달아올라 있었는지 제법 시원하게 느껴졌다. 가넷은 바람에 흩날리는 붉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대꾸했다.

“난 13세 미만이랑은 거래 안 해. 게다가 네가 나한테 줄 수 있는 건 네 돈이 아니라 네 부모 돈이겠지. 안 그래?”

“그럼 나중에 내가 직접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되면? 그때는 내 용병이 되어 줄 건가?”

진지한 물음을 농담이라고 생각했을까. 가넷이 피식 웃더니 대꾸했다.

“착하게 잘 자라면 생각해 볼게.”

* * *

“아이작, 착하다는 건 뭐지?”

“예?”

“나 정도면 제법 착하지 않아?”

“예에?”

대놓고 기겁하는 시종의 반응에 카르옌이 입꼬리를 당겼다.

“왜 그리 놀라. 듣는 사람 기분 나쁘게.”

“아, 아닙니다. 전하.”

“들어 봐. 난 세상에 짜증 나는 게 정말 많거든. 그런데 다 참잖아. 지금도 날 불쾌하게 만든 네 언사를 너그럽게 용서해 주고 있는데…… 이보다 더 착하게 굴 수가 있나?”

“아, 예…….”

아이작은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얼굴로 뺨을 실룩였으나 상대가 황자임을 자각했는지 용케도 입을 다물었다.

“물론 전하께서도 밑의 것들을 일부러 괴롭히거나 못살게 굴지는 않으시니, 나름대로 너그러우신 상전이십니다. 하, 하지만 세간의 기준에 비하면 조금…… 모자라지 않을까 싶은데요. 적어도 메르디나님 정도는 되어야 성품이 어질다고 칭송도 받고 그러는 법입니다.”

뜻밖의 이름에 카르옌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메르디나?”

“네! 2황자궁 궁인들 사이에서도 메르디나님에 대한 소문이 자자합니다.”

아이작의 입에서는 메르디나가 시종의 실수를 상냥하게 다독여 주었다거나, 정원에서 발견한 다친 새의 다리를 고쳐 주었다는 등 미담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정작 불려온 당사자는 딱딱한 얼굴로 말했다.

“전하께서는 굳이 착해지실 필요가 없습니다. 성품과 관계없이 황자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이 전하께서 하실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성격이 개차반이더라도 꾹 참고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뜻이니, 어찌 들으면 착해지라는 말보다 더 까다로웠다. 게다가 가넷은 자신이 황자임을 모른다. 황자로서 의무를 다하든 선의를 베풀든 전혀 알지 못할 터였다.

그럼 어떻게 해야 착해 보이지? 잘 웃고, 말투를 살갑게 하면 되나? 하지만 메르디나는 잘 웃지도 않고 말투도 딱딱한데 다들 선하다고 칭찬하지 않는가.

“어렵네.”

카르옌은 고민에 빠져 턱을 괴었다. 아이작과 메르디나가 그를 무척 수상하게 바라본다는 사실도 모른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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