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72)화 (72/110)

#072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붉은색 머리카락, 그리고 언제나처럼 무뚝뚝한 표정이었다. 소년이 카르옌에게 시비를 걸어 대던 남자의 어깨를 한 손으로 짚었다.

“하다 하다 이젠 어린애 돈까지 뜯어?”

남자는 소년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히익, 헛숨을 들이켰다. 이미 안면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다음에 또 애먼 사람 협박질하다가 걸리면 내가 어떻게 한다고 했지? 기억 안 나면 나게 해 줘?”

“협박이라니, 난 그런 적 없소. 사람을 잘못 본 것 같은데…….”

남자는 땀을 뻘뻘 흘리다가 바닥에 나뒹구는 바구니만 주워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부러졌다고 난리를 치던 오른팔은 몹시도 멀쩡해 보였다. 소년이 그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조심해. 요즘은 저렇게 다친 척하면서 사람 돈 뜯는 양아치들이 기승이니까.”

카르옌은 그가 자신을 향해 왜 여기에 있냐든가, 오랜만이라든가 뭐라도 말을 붙여 오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소년은 바닥에 나뒹구는 사과 하나를 주워 옷깃으로 닦아낼 뿐이었다. 카르옌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이제 보니 소년의 옆에 누군가가 있었다. 곱슬곱슬한 검은색 머리카락에 치켜 올라간 눈매를 가진 날티나게 생긴 남자였다. 소년보다 더 크고 다부진 체격에 허리에는 검을 차고 있는 것을 보니 동료인 듯했다. 까만 머리의 남자가 두 사람 사이로 불쑥 끼어들었다.

“아는 애야?”

“알긴.”

소년은 그럴 리가 있겠냐는 듯 무심히 대꾸하며 고개를 돌렸다. 쿵, 카르옌은 심장에서 난 기묘한 소음의 정체를 알 수 없어 얼굴을 굳혔다.

소년이 쥐고 있던 새빨간 사과를 허공으로 던지자 검은 머리의 남자가 약속한 것처럼 휙 받아냈다. 두 사람은 카르옌의 존재를 아예 잊어버린 것처럼 속닥거렸다.

“친절하길래. 하긴, 넌 원래 애들한테는 친절했었지?”

“내가?”

“설마 몰랐어?”

“난 원래 모두에게 친절해. 이잔, 너 빼고.”

“오……. 이런 대답은 예상 못 했는데?”

이잔이라고 불린 남자가 소년의 어깨를 치며 키득거렸다. 무척 친근해 보였다. 남자는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는 카르옌을 발견하고 허리를 굽혔다.

“얘 놀랐나 본데? 아가야, 부모님은?”

“내가 대답해야 하나?”

카르옌이 날카롭게 대꾸했다. 아니, 사실 특별히 날 선 대꾸도 아니었다. 애초에 카르옌은 원래 타인을 이런 식으로 대했으니까. 누군가의 눈치를 살핀 적도 없고, 마음에 들고자 노력한 적도 없다.

“오, 얼굴값 하네. 다행이야. 어디 가서 당하고 살진 않겠어.”

싸늘한 대꾸에도 남자는 빙글거리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 여유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만 가자. 늦었어.”

소년이 이잔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말했다. 그리고 카르옌을 힐긋 내려다보더니 들릴 듯 말 듯 하게 속삭였다.

“너도 조심히 가고.”

그는 꼭 카르옌을 처음 보는 아이처럼 대하고 있었다.

왜 모르는 척하지? 다음에 만나면 이름도 알려 준다고 해 놓고. 우리가 며칠 만에 마주쳤는지는 알아?

이유도 모른 채 심기가 뒤틀렸다. 일그러진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소년을 응시했다. 그러나 소년은 카르옌에게는 관심도 없다는 듯 이쪽을 향해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무심히 걸음을 옮기는 소년의 어깨 위에 동료라는 남자가 손을 얹었다. 스스럼없는 손길이었다. 카르옌은 그 손을 보며 눈가를 좁히다가 이어진 속삭임에 숨을 죽였다.

“늦으면 네 탓이지. 네가 갑자기 이쪽으로 달려가서 그런 거잖아, 가넷.”

……가넷? 두 글자의 이름이 귀에 박혔다.

가넷이라니. 설마 ‘그’ 가넷?

드디어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는 기쁨보다도 충격이 먼저 찾아왔다. 자신은 그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니, 지금 카샤프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붉은 머리칼의 용병, 가넷. 그 이름이 수도를 달군 것은 얼마 전이었다.

제국에서는 용병을 고용해 군대의 일부로 편성하는 일이 흔했다. 각 영지의 영주들은 물론 카샤프의 방벽을 지키는 수도 수비군도 다르지 않았다. 특히 축일이라는 큰 국가 행사를 앞둔 시기에는 용병을 대거 고용해 인력을 충원하고는 했다.

카샤프의 시민들은 아직 ‘축일의 악몽’이라고 불리는 30여 년 전의 비극을 잊지 못했다. 부서졌던 대교와 건물은 모두 재건되었으나 그날 잃은 가족과 이웃들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카샤프의 안전을 담당하는 모든 세력은 축일의 악몽이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 덕분에 수도는 수십 년 동안 무사히 지켜졌고 비극의 그림자는 점차 흐릿해졌다.

그러나 올해 유월, 축일을 사흘 앞둔 날 첫 번째 방벽이 또 한 번 흔들렸다.

마수는 땅속에서 예고 없이 나타났다. 에델티움 내륙 지역에서는 처음 발견된 두더지형 마수였다. 한 무리의 두더지형 마수는 땅굴을 파서 첫 번째 방벽 바로 앞까지 밀고 들어왔다. 방벽 안으로 들어가는 여덟 개의 문 중 최남단, 제5관문 근처였다.

첫 번째 방벽의 가장 남쪽을 지키는 제1사단 2연대는 갑작스럽게 낯선 마수들의 습격을 받아야 했다. 2연대에는 정예검사나 마법사가 드물었고 대부분 일반 보병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래도 수도를 지키는 군인들답게 기개와 실력은 뛰어났다.

그들은 절반의 인원만으로 마수를 모두 무찔렀다. 전투는 성벽 안쪽에 지원을 요청할 필요도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안심하기도 전이었다. 다른 곳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마수가 출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북쪽의 제1관문, 서쪽의 제3관문, 그리고 카샤프와 옆 도시 바이델을 잇는 대로까지.

긴급한 지원 요청에 지휘관은 2연대의 군사 일부를 바이델로 향하는 길목으로 보내기로 했다. 제5관문의 전투는 소강상태였으며 2연대가 남쪽과 가장 가깝기 때문이었다. 지원 인원은 조금 전 전투에 나서지 않은 군사의 절반, 즉 전체의 4분의 1이 되지 않는 인원이었다.

‘안 됩니다.’

그때 반대 의견을 피력한 이가 바로 가넷이었다. 가넷은 용병들로만 이루어진 한 소대의 대장 역할을 맡고 있었고, 전술에 대한 발언권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가넷은 만류를 뿌리치고 입을 열었다.

‘저는 두더지형 마수를 여러 번 상대해 본 적이 있습니다. 본래 그들은 떼로 몰려다니는 경우가 없고 늘 혼자 다닙니다. 지금의 돌발상황은 정상이 아니며 또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릅니다. 게다가 방금 전투를 치른 군사들은 지쳐 있습니다. 3대대를 남쪽으로 보내면, 지금 제 기량을 보일 수 있는 인원은 평시의 4분의 1뿐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적어도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는 방벽을 사수하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지휘관은 계급 차이도 까마득한 데다 정식 군인도 아닌 평민 용병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미 훌륭한 승리를 거둔 제5관문에는 더는 전투가 없을 것이라는 안일한 판단, 그리고 옆 도시 바이델이 황제의 행궁과 귀족들의 호화스러운 별장이 있는 도시라는 점도 그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지휘관은 가넷이 이끄는 소대까지 남쪽으로 보내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긴급한 파발이 둘 전해져 왔다. 방벽 안쪽에 화재가 다수 발생하여 지원군 도착이 늦어지고 있다는 소식과, 남쪽 바이델에 출몰했던 비행형 마수가 방향을 바꿔 북상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고개를 들자 날개 달린 마수는 이미 그들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모두가 땅을 경계하고 있을 때 하늘로 나타난, 공성전에 가장 치명적인 마수였다.

군사 한 명 한 명이 아쉬운 상황에 내몰린 지휘관은 그제야 자신이 임무를 망각했음을 깨달았다. 그의 임무는 방벽을 사수하는 것이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성벽 위아래의 군사들이 화살과 마법을 퍼부었다. 각자의 싸움을 하고 있을 다른 관문에도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방벽을 지켜냈다. 치열한 전투였다.

날개를 잃은 마수들이 하나둘 땅으로 떨어졌다. 다행히도 승기는 2연대의 편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수들이 30년 전 그날처럼, 독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극독은 아니었으나 움직임을 마비시키는 종류의 독이었다. 군사들이 하나둘 무력해졌다.

제5관문에는 카샤프로 들어가려다 눈앞에서 성문이 닫혀 어쩔 줄 몰라 하던 민간인들도 다수 있었다. 그들은 좁은 비상문과 성벽 위의 마법사들에 의해 조금씩 구조되고 있었다. 그러나 축일을 앞두고 있던 만큼 행렬이 길어 끝이 보이지 않았다. 연이은 전투를 치른 마법사들까지 하나둘 실신하면서 발만 동동 굴러야 했다.

그때 남쪽에서 희뿌연 먼지와 함께 무장한 이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두 발로 달려오고 있었으나 말을 탄 것처럼 재빨랐다.

명령에 불복하고 돌아온 가넷과 그의 소대원들이었다. 수는 고작 스무 명 남짓. 그러나 그들 중에는 정예검사도 있었다. 정예검사 한 명 한 명의 무력은 평범한 검사 수십에 달했다.

가장 선두에서 달려온 가넷은 성문을 바라보며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앞을 막아섰다. 성벽을 향해 달려드는 마수의 날갯죽지를 찢고, 독을 퍼뜨리기도 전 단번에 숨통을 끊었다.

두 발로 성벽을 타고 올라갈 듯 내달려 공중의 마수를 떨어뜨렸다. 중독되어 쓰러진 군인을 발톱으로 찢어발기려던 마수의 뒤통수에는 검을 내던졌다.

그 움직임이 날개 달린 새처럼 가볍고 현란했다. 때로는 무모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새카만 검 끝이 매섭게 빛날 때마다 전황이 변했다. 한 사람의 무위라고는 믿기 힘든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스무 명 남짓이었던 용병들마저 차츰 열 명으로, 다섯 명으로 줄었다. 동료들이 죽거나 쓰러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가넷은 꿋꿋이 검을 휘둘렀다.

그의 손에 구해진 노인이 회상하기를, 붉은 머리칼 위에 피를 뒤집어쓴 가넷은 마치 그 자체로 날렵한 검 한 자루 같았다고 했다.

화재로 길이 막혔던 지원군이 다급하게 도착했을 때, 가넷은 홀로 멀쩡히 서서 제5관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마수는 한 마리도 방벽을 넘지 못했고 민간인 사망자 역시 한 명도 없었다.

지원군에 의해 상황이 정리된 직후, 처음에는 지휘관의 명령을 어긴 용병을 군법에 따라 처벌해야 한다는 의견이 강력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금세 사라졌다. 믿었던 수도 수비군의 무능함과 잘못된 대응을 질타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더욱 컸기 때문이었다.

30년 만에 수도가 흔들릴 뻔한 초유의 사태였다. 나라의 혼란을 수습하고 주의를 환기하기 위해서는 영웅이라는 존재가 필요했다. 관심을 돌리는 데는 그만한 방법이 없었다.

이미 붉은 머리칼의 용병, 핏빛 검 등의 칭호로 불리며 방벽 안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던 용병은 무능한 지휘관을 거스르고 회군을 감행한 용맹한 영웅 취급까지 받고 있었다.

윗선에서는 누구든 영웅으로 만들어 세워놓기 위해 안달이 나 있을 테니 이름을 알리고 싶었다면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을 터였다.

운이 좋네. 소문을 들은 카르옌은 누군지 모를 그 용병을 향해 생각했다. 황제의 이름으로 공을 치하하고 기사 작위까지 하사하기로 한 제안을 그 용병이 시큰둥하게 거절했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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