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71)화 (71/110)

#071

퍽 걱정스럽다는 어조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우스워서였다. 카르옌은 짙은 미소를 지으며 레오나르드를 바라보았다.

“어디, 제게 위험한 장소가 황궁 바깥뿐이겠습니까.”

험한 일이라면 황궁 안에서도 자주 벌어지고 있었다. 잊을 만하면 암살자를 보내 주는 누군가의 아버지 덕분이었다. 그렇게 제 자식을 황제로 만들고 싶을까.

카르옌은 마주치기만 하면 서로 으르렁대기 바쁜 황녀 베로니카보다도 1황자 레오나르드가 더욱 싫었다. 베로니카는 성질은 나빠도 솔직하기라도 하지, 겉으로만 우애 좋은 형인 척 구는 레오나르드의 태도는 더욱 역겨웠다.

레오나르드가 제 아버지인 세이드 대공의 만행을 낱낱이 아는지는 모른다. 워낙 치밀한 자라 증거를 남기지 않으니 심증뿐이기도 했다. 누구나 짐작하는 심증이라는 점이 문제였지만, 레오나르드도 아직은 성년식도 치르지 못한 소년이었으니 미처 모른다 해도 이해할 수 있었다. 타고나기를 멍청한 것을 어찌하겠는가.

그러나 레오나르드가 카르옌을 싫어한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는 늘 제 몫을 앗아간 약탈자를 보듯 카르옌을 보았다.

도서관을 빠져나온 카르옌은 목을 옥죈 크라바트를 풀기 위해 손을 올렸다가 멈칫했다. 보는 눈이 많았다. 황궁은 바닥에도, 벽에도 눈과 귀가 있었다. 카르옌은 아무 일 없었던 듯 고개를 쳐들고 걸음을 옮겼다.

익숙한 답답함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 * *

한여름이 흘러갔다. 붉은 머리칼의 소년을 만날 기회는 자주 찾아오지 않았다. 소년은 용병이라더니 하루가 멀다 하고 이리저리 쏘다녔고, 카르옌 역시 아무 때나 황궁 밖으로 나올 수는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서로의 이름조차 몰랐다.

“꼬치 두 개요.”

“2코퍼입니다.”

소년이 값을 치르는 모습을 보던 카르옌이 중얼거렸다.

“값이 굉장히 저렴한데. 물가가 이렇게 요동쳐도 괜찮은 건가?”

“무슨 소리야?”

“당신을 처음 만난 날에도 그걸 사 먹었는데, 그땐 가격이 1실버 정도였거든.”

“꼬치 하나를 1실버나 주고 사 먹었다고?”

소년이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물었다. 꼬치 두 개를 내밀던 상인마저 혀를 끌끌 찼다.

“1실버면 이 꼬치를 다섯 개는 사 먹을 돈이야. 넌 사기 당한 거고. 애한테 사기를 치다니 그런 양심 없는 새끼가 있나…….”

“그래?”

사기를 당했다는 말에도 카르옌은 별 감흥이 없었다. 1실버나 1코퍼나 그에게는 별반 차이가 없는 푼돈이기도 했다. 소년은 어떤 놈인지 얼굴이 기억나면 자신에게 말하라고 당부하더니 손에 쥐고 있던 꼬치 중 하나를 내밀었다.

“일단 먹어.”

기분 탓인지 지난번에 먹은 꼬치보다는 맛이 훨씬 나았다. 소스 맛은 여전히 지나치게 달고 짜서 미각을 괴롭혔지만 적어도 식감이 질기지는 않았다.

이번엔 진짜 닭인가 보네. 카르옌은 꼬치를 우물거리다가 물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자꾸 날 보면 뭘 먹이려고 들어?”

소년이 시원스럽게 꼬치를 뜯다가 멈칫했다. 입 안에 든 것을 씹어 삼키는 움직임이 평소에 비해 느릿했다.

“내가 그랬나.”

그랬다. 헤어질 때는 늘 매정하다시피 돌아서면서도 다시 만나면 자꾸 주머니에서 뭘 꺼내 내밀었다. 아니면 지금처럼 음식을 파는 곳으로 데려가거나.

소년이 낮게 목을 한번 울리고는 말했다.

“동생 같아서 그랬나 봐.”

“동생?”

카르옌은 상상도 못 한 단어에 얼이 빠졌다가 곧 코웃음을 쳤다.

“동생 같은데 왜 잘해 줘?”

소년이 무슨 의미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카르옌이 한쪽 입꼬리만 삐죽 올려 비웃으며 말했다.

“동생은 당신 몫을 빼앗아 가는 존재잖아. 당신은 속도 없나 보네.”

소년은 카르옌의 얼굴을 차근히 눈에 담았다. 그리고 물었다.

“너, 동생 없지?”

“…….”

대답하지 않자 긍정의 뜻을 읽어낸 소년이 되물었다.

“다른 형제는 있고?”

카르옌이 고개를 끄덕였다. 피가 반만 섞이기는 했어도 어쨌든 형제는 맞았다. 서로 좋든 싫든 간에 평생 그렇게 묶일 사이였다.

뚝, 소년이 빈 막대기를 손쉽게 반으로 부러뜨렸다. 부러진 막대기가 길가의 쓰레기통 안으로 처박혔다.

“못돼 처먹었구나, 네 형제들.”

“뭐?”

차분한 목소리로 흘러나온 말에 카르옌이 귀를 의심했다. 그는 방금 내뱉은 말이 황족 모독이라는 사실을 짐작이나 할까? 카르옌이 얼빠져 있는 사이 소년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동생을 가져 본 적도 없는 네가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

“나한테 빵 한 쪽이 있어. 동생이 있다면 반씩 나눠 먹어야 할 거고, 없다면 나 혼자 하나 다 먹을 수 있겠지. 그래도 나라면 기꺼이 반을 나눌 거야. 아니, 내 몫까지도 다 줄 수 있어. 난 형이고 그 애는 내 동생이니까.”

카르옌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에게도 동생이 있구나.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더 이상 그의 곁에는 없는 것 같았다. 애틋함이 담긴 목소리와 달리 새카맣게 가라앉은 시선이 그 사실을 짐작하게 했다.

“애초에 누구 몫인지 누가 정하는데? 태어날 때부터 그런 게 정해져 있는 사람도 있나? 뭐, 있을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세상은 뺏고 빼앗아 가며 만들어지지 않았던가.”

권력, 영토, 목숨까지도 그렇다며 소년이 말을 이었다.

“집안의 돈이라도 두고 형제들이 널 견제하나 본데…… 따지고 보면 그건 너희 부모님 거지. 안 그래? 너희 부모님도 누구에게서 뺏었을지 모르고.”

소년과 함께 있으면 자꾸만 말문이 막혔다. 사실 카르옌은 형제들이 자신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점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고 여겼다. 갑자기 나타난 카르옌의 존재가 1황자와 황녀로 양분되어 있던 지지 세력을 뒤흔들고 그들의 앞길을 막아 버린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나 사실 처음부터 그들의 몫으로 정해져 있던 것은 없었다. 그들이 자신의 몫이라고 믿고 싶어 했을 뿐.

“그들이 널 형제로 여기지 않는다면, 너도 그들을 형제로 여기지 마. 그들이 네 몫을 빼앗으려 들면 너도 빼앗아. 적어도 난 그렇게 살아왔고 후회는 없어.”

복잡한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건네는 말임이 분명한데도, 꼭 그가 제 편이라도 들어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너 자신만 생각하라는 말처럼 들렸다. 속이 시원해졌다가 다시 뜨겁게 달아오르기를 반복했다. 밤바람에 뺨이 식었을 때, 카르옌이 물었다.

“당신, 이름이 뭐야?”

처음부터 궁금했다. 자신의 이름을 조금도 궁금해하지 않는 소년에게 지는 기분이 들어 애써 삼켜 온 질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얄팍한 자존심이 별로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카르옌의 물음에 소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조금 난감한 것 같기도, 머쓱한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그는 곧 머리칼을 느릿하게 헤집으며 대답했다.

“다음에 다시 만나면 알려 줄게.”

* * *

“아이고, 아파라! 팔이 부러진 것 같은데, 이를 어째!”

카르옌은 오늘도 황궁을 몰래 빠져나왔다. 평소보다 충동적으로 나온 탓에 후드를 쓰기는커녕 옷도 갈아입지 못한 상태였다. 시가지를 지나는데 평소보다 뺨에 꽂혀 오는 시선이 많다 싶더니, 귀찮은 시비에 휘말리고 말았다.

멀쩡히 걸어가고 있는 카르옌에게 다가와 어깨를 부딪친 남자는 들고 있던 과일 바구니를 내던지고 바닥을 뒹굴기 시작했다.

“요즘 애들은 앞도 안 보고 천방지축 뛰어다닌다니까!”

건장한 성인 남자가 어린애와 부딪쳐 놓고 아프다며 데굴데굴 구르는 꼴이라니, 황당했다. 남자는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 들으라는 듯 목청을 높였다.

“먹여 살려야 할 입이 넷이나 있는데, 오늘 내다 팔아야 할 과일은 저 모양이고 팔까지 부러졌으니 어쩌면 좋아. 다 나을 때까지 꼼짝없이 굶게 생겼구나!”

어쩌라는 거지? 마치 카르옌과 부딪쳐 인생이라도 꼬였다는 투였다. 원래도 잔뜩 꼬여 있었을 것 같다만. 카르옌은 무시하고 지나가려 했으나 이내 팔을 우악스럽게 붙잡아 오는 손길에 휘청였다.

“감히.”

카르옌이 낮게 으르렁거리며 손을 떨쳐냈다. 새파란 눈이 매섭게 빛나자 남자는 순간 당황한 듯했으나 이내 입가를 실룩였다. 카르옌의 당당한 태도와 흰 피부, 질 좋은 옷감, 옷에 달린 보석까지 차례대로 확인한 그는 단단히 한몫 잡을 수 있다고 결론 내린 듯했다.

하인이나 기사를 대동하지 않았으니 귀족은 아닐 테고, 부유한 상인이나 관료 집안의 자식쯤 된다고 판단했겠지.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자주 받는 오해였다.

“꼬마야, 너 이거 혼자 책임질 수 있겠어? 엉? 네 부모님을 모셔 오든지, 하인을 불러오든지, 당장 어른을 불러와. 내 피해를 어떻게 보상받을지는 그 뒤에 이야기할 테니까!”

어른을 불러오라고 윽박지르면 겁을 먹을 줄 알았던 것일까? 남자는 기세등등하게 외치더니 힐끔, 카르옌의 몸을 훑어내렸다.

“부모님한테 말 못 하겠으면 그 팔찌 하나로 봐줄 수도 있고. 쓰던 거라 몇 푼 되지도 않겠지만 나도 자식 달린 처지에 어린애한테 너무 매몰차게 굴기는 싫다. 아휴, 난 마음이 약해서 탈이야.”

혀를 끌끌 차는 남자를 보며 카르옌이 피식 웃었다. 그가 팔에 차고 있는 팔찌는 대륙 최고의 보석 세공사로 불리는 장인 바티스트가 세공한 장신구였다. 카르옌의 어머니, 황제가 열 살 생일 선물로 준 것이었다.

안목은 인정하지만 욕심이 지나쳤다. 카르옌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쪽이 혼자 넘어진 걸 내가 책임져야 하나?”

주변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힐끔거리면서도 선뜻 나서 카르옌을 도와주지는 않았다. 안쓰럽다는 얼굴을 한 이들 중 몇 명쯤은 지나가며 경비대에 신고해 줄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카르옌으로서도 반갑지 않은 일이었다.

카르옌은 머릿속으로 이 성가신 상황을 빠르게 벗어날 몇 가지 해결 방법을 떠올렸다.

첫째, 그냥 무시하고 갈 길 간다. 이 방법은 시도하더라도 아까처럼 쫓아와서 귀찮게 굴 가능성이 컸다.

둘째, 바라는 대로 적당히 돈을 던져 준다.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지만 끌리지는 않았다. 순순히 당해 줬다가는 이 사기꾼이 정도를 모르고 같은 짓거리를 하고 다닐 수도 있다. 즉, 다른 시민들에게도 민폐다.

셋째, 진짜로 팔을 부러뜨려 준 뒤에 소원대로 책임져 준다. 역시 세 번째가 양쪽 모두에게 좋은 결말이 아닐까 싶었다. 남자는 원하던 돈을 얻고 카르옌은 마음의 평화를 얻을 테니까.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이 양아치 새끼 또 이러고 있네.”

나직한 목소리에 카르옌이 고개를 휙 쳐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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