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
소년에게 둘러댄 아드리안 1번가는 금방 나타났다. 원래 이렇게 가까웠던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아드리안 가는 카샤프 내에서 가장 부유한 평민들이 사는 동네였다. 화려한 저택이 늘어선 대로는 밤에도 환히 밝혀져 있었고 순찰도 자주 이루어졌다. 소년은 옆을 지나는 경비병들을 힐긋 보고는 멈춰 섰다.
소년은 카르옌의 머리 위를 다시 한번 툭툭 두드린 뒤에 입을 열었다.
“그럼 조심히 가.”
“…….”
소년은 카르옌의 대답도 듣지 않고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여기까지 같이 온 사이에 고작 저따위 인사 한마디 남기고 훌쩍 떠나려 하다니, 정도 없지. 카르옌은 황당한 기분이 되었다.
“또 만날 수 있어?”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소년은 곧바로 몸을 돌렸다. 소년이 뒤로 걸으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당분간 수도에 있을 거니까 인연이 있으면 보겠지.”
“……그래.”
지금은 그 정도 대답이면 충분했다. 카르옌은 저도 모르게 설핏 웃었다. 소년은 후드 아래로 드러난 카르옌의 얼굴을 잠시 물끄러미 보는 듯하더니 다시 등을 돌렸다.
훌쩍 멀어져 가는 뒷모습이 무심했다. 금방이라도 뒤쫓아가 돌려세우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아. 그래도 이름 정도는 물어볼 것을 그랬나. 카르옌은 뒤늦게 후회했으나 다음에 물으면 되리라 여기며 어깨를 으쓱였다.
* * *
소년은 나무 아래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팔을 베고 엉성하게 누운 자세인데도 퍽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였다.
대신전이 세워진 론하르트 언덕 위였다. 신도들이 드나드는 잘 닦인 길은 정반대편에 있어, 다소 험한 이쪽은 조용한 편이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풀들이 발밑에서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소리를 숨기려는 노력 없이 다가가자 소년이 눈을 떴다.
날카롭게 빛나던 검은 눈이 카르옌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조금이나마 둥글어졌다.
“또 보네.”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리라고 말한 지 고작 이틀이었다. 그가 어디에 있었는지 아는 것처럼 찾아온 카르옌을 향해 소년은 경계심을 내비치는 대신 피식 웃어 보였다.
소년이 농담처럼 물었다.
“나한테 사람이라도 붙였어?”
“붙이면 달고 다닐 생각은 있고?”
“물론 없지.”
대꾸한 소년이 다시 눈을 감았다. 나뭇가지 모양대로 흔들리는 그림자가 단정한 뺨 위를 어지럽게 덧그렸다.
사실 카르옌도 자신이 그를 찾아 여기까지 온 이유를 명확히 알지 못했다. 지난 이틀 동안 식사를 하다가도, 책을 읽다가도, 검술 훈련을 받다가도 문득 그날 밤 자신의 앞을 막아서던 너른 등이 떠오르고는 했다.
어제는 말을 타던 중에도 넋을 놓고 있다가 고삐를 놓치고 말았다. 다행히 낙마하지는 않았으나 혼비백산한 승마 선생과 시종들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아무래도 그날 밤의 경험이 꽤 인상적으로 각인되어 버린 것 같았다. 카르옌은 온 카샤프를 뒤져 소년의 위치를 찾아냈다. 소년을 다시 만나봐야 할 것 같았다. 정작 만나서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면서.
“밥은 먹었어?”
어느새 눈을 뜬 소년이 물었다. 카르옌은 대답하는 대신 하늘을 힐긋 올려다보았다. 오찬 시간이 지난 지가 언젠데 그럼 안 먹었겠느냐는 의미였다.
소년은 풀밭에 누워 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바람에 흐트러진 붉은 머리칼을 대충 쓸어 넘기더니 말했다.
“난 배고파. 가자.”
파삭. 바삭한 파이가 입 안에서 부서졌다. 텁텁한 밀가루 맛의 시트 사이로 달짝지근한 사과 맛이 났다. 카르옌은 무성의하게 입을 움직이다가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 앉은 소년은 부지런하게 스푼을 놀리고 있었다. 누가 보면 최후의 식사인 줄 알겠다. 거의 전투적일 정도의 움직임이었는데 신기하게도 경박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단정한 얼굴 탓일까.
카르옌은 그의 얼굴을 힐끔거리며 반쯤 먹던 사과파이를 접시 위에 내려 두었다. 두 접시를 싹싹 비운 소년은 남은 사과파이와 손을 닦고 얌전히 앉아 있는 카르옌을 번갈아 보았다.
“안 먹어?”
“다 먹었어.”
소년이 눈썹을 휙 들어 올렸다.
“개미만큼 먹네.”
“……개미?”
살면서 그런 비유는 처음 들어봤다. 카르옌은 불쾌감을 표출하려 했다. 그러나 카르옌이 먹던 사과파이를 아무렇지 않게 집어 두 입 만에 깔끔히 먹어 치우는 태연한 얼굴을 보고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카르옌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왜 먹던 걸 먹어?”
타인이 먹다 남긴 음식을 입에 넣다니. 카르옌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소 충격받은 얼굴로 묻자 소년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럼 버려? 음식 아깝게.”
“청결하지 못하잖아. 내 타액도 묻었을 텐데.”
소년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넌 무슨 꼬맹이가 말하는 건 노인 같네. 그리고 뭐 어때. 사람들끼리 입맞춤도 하고 그러는데 이 정도 가지고.”
“입……. 내가 당신이랑 그걸 왜 맞추는데?”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여 묻자, 소년이 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나도 너 같은 어린애랑은 할 생각 없어.”
카르옌은 목덜미가 화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린애가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또래 중에서도 몸집이 작은 편인 자신과 달리 소년은 거의 어른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억울했다. 식사 자리에서 먼저 입맞춤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꺼낸 사람이 누군데…….
그때 맑은 종소리가 카샤프 전역에 울려 퍼졌다. 어린아이의 노래처럼 맑은 이 소리는 대신전에서 정각마다 울리는 종소리였다. 소년은 종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만 가야겠다. 데려다줄게.”
“환한 대낮에 무슨. 갈 길 가.”
카르옌이 코웃음 치자 소년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낮이라고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어.”
“…….”
카르옌이 미간을 찌푸렸다. 여덟 살 이후 그의 손에 목숨을 잃은 암살자의 수가 양손을 몇 번씩 접어도 모자랄 정도였다. 비록 얼마 전 소년을 만난 날 밤에는 추태를 보일 뻔했지만, 그때가 유독 운이 좋지 않았을 뿐이다.
카르옌은 손 하나 까딱이지 않고도 지금 이 식당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었다. 모두가 카르옌을 두려워하면 두려워했지, 그를 보호하기 위해 노심초사하지는 않았다. 하물며 그에게 돈을 받고 고용된 시종이나 기사도 아닌데 소년은 왜 자신을 지켜 줄 의무가 있는 사람처럼 구는 것일까.
눈앞에 뻗어진 단단한 손을 보며, 카르옌은 왜 자신이 굳이 소년을 찾아왔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의 앞에서 카르옌은 꼭 나약하고 평범한 어린애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살면서 처음으로 느껴 보는 감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소년이 카르옌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카르옌이 황자라는 사실이나 마법사라는 사실 중 하나만 알게 되어도 그의 태도는 돌변할 것이다. 뻔히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카르옌은 제 어깨를 감싸 쥐는 커다란 손을 보며 무심코 생각했다. 가능하다면 들키고 싶지 않다고.
* * *
“전하. 어디서 또 쓰레기 같은 음식을 주워 오셨어요?”
카르옌의 시종, 아이작이 경악하며 물었다. 아이작은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 포장지와 느릿하게 움직이는 카르옌의 입을 번갈아 보더니 하늘이 무너진 표정을 지었다.
아이작은 어린 시절부터 카르옌의 곁을 보필한 시종이었다. 유순한 얼굴과 달리 야무진 성격이라 카르옌의 옆에 곧잘 붙어 있었지만, 고작 네 살 차이인 주제에 잔소리가 많아 귀찮을 때도 있었다.
“다시 말해 봐, 아이작.”
부드러운 말투에서 위협을 감지한 아이작이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눈치 하나는 쓸 만했다.
“아니, 우리 황자 전하 좋은 것만 드셔야 한다고 매일 비장하게 칼을 가는 주방장이 알면 피눈물을 흘릴까 봐 그러죠.”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지.”
“전하……. 적어도 제가 먼저 맛보게 해 주세요! 뭘 믿고 함부로 덥석덥석 집어 드세요?”
카르옌은 우는소리를 하는 아이작을 무시하며 초콜릿을 녹여 먹었다. 어차피 웬만한 독에는 다 내성이 있음을 알면서도 하는 소리였다.
카르옌은 오늘도 이름을 모르는 소년을 만나고 온 참이었다. 만났다기에는 지극히 짧은 시간이었다. 언덕을 오르던 중, 막 내려오는 소년과 마주쳐 그대로 다시 돌아왔으니까.
소년은 오늘도 카르옌을 아드리안 1번가 근처까지 데려다주는 쓸데없는 호의를 베풀었다. 그리고 헤어지기 직전, 카르옌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 주었다. 얇은 종이에 감싸인 작고 네모난 덩어리였다.
‘손 내밀어 봐.’
‘뭐야?’
‘초콜릿. 먹어 봤어? 당연히 먹어 봤을 것 같긴 한데…….’
소년이 머쓱한 듯 목덜미를 쓸며 말을 이었다.
‘난 예전에 스승님이 줘서 처음으로 먹어 봤거든. 아까 시장 지나가는데 옛날에 먹은 거랑 비슷하게 생겼길래 샀어.’
소년은 주머니에서 꺼낸 초콜릿 한 줌을 카르옌의 양 손바닥에 얹어 주었다.
‘당신이나 먹어. 좋아한다며.’
‘됐어. 그땐 어렸으니까 좋아했지.’
진심으로 미련이 없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결국 거절하지 못한 카르옌은 초콜릿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황궁으로 돌아왔다.
인위적인 단맛만 나는 싸구려 초콜릿이었지만 평소보다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였던 소년의 얼굴을 떠올리면 제법 괜찮은 맛처럼 느껴졌다. 아이작의 말마따나, 입이 짧은 카르옌에게 한 입이라도 더 먹이고 싶어 안달이 난 황실 주방장이 알면 기절할 일이었다.
“그런데 전하. 요즘 왜 사고를 안 치십니까?”
“아이작, 그렇게 말하면 꼭 내가 사고나 치고 다니는 철부지 어린애 같잖아.”
‘아니었습니까?’ 아이작은 꼭 그렇게 묻고 싶은 표정으로 입술을 움찔거렸다.
“요즘은 꽤 즐겁거든.”
지루하기 짝이 없던 일상에 흥미가 가는 대상이 생겨서인지, 카르옌은 요즘 기분이 썩 괜찮았다. 창문을 타고 암살자가 들어와도 웃으며 맞아줄 수 있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황실 도서관에서 껄끄러운 얼굴을 마주친 탓이었다.
카르옌은 황족만 출입 가능한 구역의 고서를 빌리기 위해 최소한의 시종들만을 대동한 채 직접 걸음했다. 상대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너였구나, 카르예니프.”
옅은 색의 금발을 늘어뜨린 소년이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카르옌과는 조금도 닮지 않은 반쪽짜리 형제, 1황자 레오나르드였다.
“네. 공교로운 우연이네요.”
황실 도서관은 워낙 넓은데다 구역이 복잡해 우연히 마주치기도 힘든 곳이었다. 분명 입구에서 카르옌이 먼저 방문했다는 소식도 들었을 텐데 모른 척하는 얼굴이 가증스럽기 그지없었다.
“저는 볼일을 마쳤으니 편히 머무르다 가세요, 형님.”
카르옌은 짧게 인사만 건네고 떠날 생각이었다. 뒤에서 붙잡아 오는 목소리만 아니었더라면.
“아, 카르예니프.”
“……?”
“요즘 들어 잠행 놀이에 재미가 들렸다고 하던데. 백성들 사정을 굽어살피는 것도 좋지만 네 안위도 유의해야지. 황궁 바깥에서는 험한 일이 자주 일어나지 않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