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69)화 (69/110)

#069

정확하게 급소만을 노리는 손길에는 망설임도 자비도 없었다. 깔끔하다 못해 무서운 실력이었다. 암살자들은 차례차례 쓰러졌다.

어느새 마지막 한 명만 남은 암살자가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동료를 모두 잃은 암살자는 새카만 복면을 쓰고 있었지만 서슬푸른 살기를 풍겼다.

반면 남자는 내내 무덤덤했다. 발소리 한 번, 숨소리 한 줌 허투루 흘리지 않고 고요하게 검을 휘둘렀다. 달빛도 자를 것처럼 섬세하고 날카로운 검술이었다. 움직임이 가볍다 못해 우아하게 보일 정도로 군더더기가 없었다.

카르옌은 홀린 듯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압도되어 손끝조차 움직일 수 없었다.

그때 암살자가 틈을 노려 무언가를 내던졌다. 짧지만 날카로운 비수가 카르옌을 향해 날아왔다. 카르옌이 무언가 하기도 전에, 남자가 검을 뻗어 그 비수를 쳐냈다. 그리고 카르옌의 앞을 막아섰다. 너른 등이 자신의 앞을 감싸 주고 있었다.

챙! 곧 날카로운 두 검날이 부딪쳤다. 검이 희미하게 진동하며 우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검을 맞댄 시간은 아주 짧았다. 남자가 검을 밀치듯 떼어내자 암살자는 힘에 밀려 반 발자국 밀려났다.

암살자가 다시 검을 내지르려는 순간, 그의 심장에는 이미 검날이 박혀 있었다.

“……!”

암살자는 눈을 부릅뜬 채 그대로 쓰러졌다. 마지막 남은 암살자까지 총 일곱 명의 검사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일곱 명을 상대하면서도 숨소리 한번 흐트러지지 않은 남자가 습관처럼 검을 휙, 한 바퀴 돌려 피를 털어냈다. 바닥에 검붉은 핏자국이 후두둑 떨어졌다.

카르옌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그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등을 돌린 남자가 소리 없이 다가왔다. 바로 앞에 있는데도 눈을 감으면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할 것 같았다. 팔에 소름이 돋았다.

이 사람이랑 싸우면 죽을 수도 있겠다.

어린 시절부터 셀 수도 없이 많은 암살자들에게 노려져 왔으나 지금 이 순간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두려움. 남자는 카르옌에게 처음 그 감정을 알려 준 사람이었다.

“괜찮아?”

“…….”

카르옌은 뜻밖의 질문에 미간을 찡그리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카르옌이 겁을 먹었다고 착각했는지, 남자는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춰 왔다. 피 묻은 검이 꼭 지팡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무렇게나 바닥을 짚은 채였다.

가까워지자 어둠에 가려져 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카르옌이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남자라기보다는 소년이라고 부르는 게 더 어울릴 듯한 나이였다. 키는 훤칠했지만 뺨에는 앳된 기색이 남아 있었다.

붉은 머리칼과 날카로운 눈매, 단정한 코끝은 뒷모습만 보고 상상했던 얼굴과는 너무도 달랐다. 피 한 방울 튀지 않은 얼굴이 달빛을 닮아 있었다.

“어린애한테 떼로 달려들다니 미친놈들이네.”

소년이 말했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방금 전에 일곱 명을 도륙내 놓고도 흥분하거나 흐트러진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역설적으로 그것이 소년이 얼마나 피에 익숙한 사람인지 알려 주었다.

대체 정체가 뭘까?

카르옌은 본능적으로 곤두섰던 신경을 내리누르며 물었다.

“다 죽인 거야?”

죽지 않았다면 완전히 숨통을 끊어야 했다. 그러나 카르옌의 질문을 책망이나 두려움이라고 생각했을까? 소년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쩔 수 없어. 널 죽이려고 했잖아.”

“…….”

“누군가에게 칼을 들이대려면 자기도 죽을 수 있을 거라고 각오하면서 살아야 해.”

소년이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카르옌은 순수한 궁금증이 일었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

“늘 생각하며 살지. 내가 흘리게 한 피만큼 언젠간 내 피도 흐를 거라고.”

소년은 씩 웃으며 말했지만 농담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무릎을 펴고 일어선 소년이 들고 있던 암살자의 검을 구석에 내던졌다.

“애 앞에서 할 얘기는 아니네.”

“당신도 어리잖아.”

카르옌이 그의 앳된 뺨과 캄캄한 골목 구석에 쓰러져 있는 일곱 구의 시체를 번갈아 눈에 담았다. 그러자 소년이 곤란한 기색으로 눈썹 위를 긁적였다.

“그래. 난 너보다 어릴 때 이미 사람을 죽였지만…….”

말없이 물끄러미 올려다보자 소년이 손을 뻗었다. 손날이 이마에 슬쩍 닿아 왔다. 꼭 골목 안쪽을 보지 말라고 가려 주는 것 같았다. 쓸데없는 배려였다.

“그래서 더 잘 알아. 애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편이 좋다는 걸.”

이마 위에 조심스럽게 닿아 오던 손이 머리 위에 얹어졌다. 후드를 뒤집어쓴 머리를 툭툭 두드리는 손길은 무뚝뚝한 목소리와 달리 꽤 다정했다.

누군가가 몸에 함부로 손을 대는 것은 질색이었다. 카르옌은 평소였다면 정색하며 고개를 털어냈을 것이다.

그러나 정체불명의 소년에 대한 흥미로움 때문이었을까, 혹은 강한 이를 목격한 뒤의 경외심 탓이었을까. 카르옌은 그가 저를 어린애 취급하며 머리를 쓰다듬어대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저 사람들은 누구냐, 왜 너를 노린 거냐고 물어볼 법도 한데 소년은 다행히 귀찮게 굴지 않았다. 그 대신 카르옌에게 손을 내밀었다. 카르옌보다 훨씬 커다란 손이었다.

“집이 어디야? 근처까지 데려다줄게.”

“됐으니까 그냥 가. 가까워.”

불필요한 호의였다. 방금 그에게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집에도 못 찾아갈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그럼 큰길까지만 같이 갈까. 아무리 카샤프 치안이 좋은 편이라지만 밤늦게 혼자 돌아다니면 위험해.”

“…….”

그런 평범한 걱정은 난생처음이었다. 제가 누군지도 모르고 지켜 주려고 애쓰는 꼴이 가소롭게 느껴질 만도 한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재밌네. 그런 생각에 카르옌은 충동적으로 소년이 내민 손을 붙잡았다. 소년의 손바닥은 검을 잡는 사람 특유의 굳은살과 흉터 탓에 거칠했다. 그러나 손가락은 생각보다 곧고 가늘었으며 따뜻했다. 체온이 높은 편인 듯했다.

골목을 빠져나오며 카르옌은 골목 안쪽을 흘깃 쳐다보았다. 시체 일곱 구가 발견되면 내일 수도 경비대가 뒤집히겠군. 아까 애쓴 보람이 사라졌다.

그렇다고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 앞에서 마법을 써 가며 사태를 수습해 줄 여력은 없었다. 대신 황궁으로 돌아가서 사람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또 한 번 눈앞으로 커다란 손이 다가왔다.

“그만 가자.”

무뚝뚝한 말투와 달리 눈가를 덮은 손은 조심스러웠다. 이내 맞잡은 손을 잡아끄는 움직임도 마찬가지였다. 카르옌은 순순히 끌려가며 입꼬리를 당겼다. 흥미로웠다.

“어느 쪽으로 가면 돼?”

황궁이라고 대답하면 어떤 반응을 할까. 호수처럼 차분한 저 얼굴에 다른 표정이 깃들까? 꽤 보고 싶기는 했지만 작은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없었다.

“아드리안 1번가 방향.”

대충 두 번째 방벽과 가장 가까운 거리 이름을 대자 소년이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골목을 나서자 차츰 밝은 빛들이 가까워졌다. 야시장은 여전히 활기가 넘쳤다. 아까의 으슥한 골목과 같은 도시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카르옌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시장을 바라볼 때였다.

“꼬맹아, 잠깐만.”

누구보고 꼬맹이래……. 어이가 없어서 인상을 찡그리는데 뒤에서 옷자락이 잡혔다. 덕분에 푹 눌러 쓰고 있던 후드가 벗겨졌다.

왜 남의 뒷덜미를 잡아채고 난리지. 조금 짜증스럽게 고개를 쳐드는데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소년의 새카만 눈이 커다랗게 뜨여 있었다. 입술도 살짝 벌어진 채였다.

표정 변화를 보고 싶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빨리 볼 줄은 몰랐다. 무뚝뚝하던 표정이 걷히자 앳된 느낌이 더욱 살아났다. 성인과 다름없어 보이는 체격과 달리 실제로는 성년식도 치르지 못한 나이일 것 같았다.

카르옌이 그 반듯한 얼굴을 눈으로 훑어내리는데 뼈대가 도드라진 손이 다가와 다시 후드를 푹 뒤집어씌웠다.

“뭐 하는 거야?”

“아니……. 넌 그거 계속 쓰고 다니는 편이 좋겠다.”

카르옌이 미간을 좁혔다. 그도 자신의 얼굴이 적잖이 눈에 띈다는 편은 알고 있었으나 그렇게 따지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거리를 지나오는 동안 소년을 힐끔거리던 시선이 한 무더기는 되었다. 소년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처럼 무심하게 흘려 넘겼지만 그건 의식하지 못했다기보다는 이미 익숙해 무뎌진 쪽에 가까웠다.

얼굴을 구기고 있는 카르옌에게 소년이 한 손으로 들고 있던 막대를 내밀었다.

“이거 먹어.”

“…….”

여러 가지 과일을 꼬치에 꿰어 그 위에 설탕물을 입힌 과일 사탕이었다. 야시장을 쏘다니는 아이들의 손에 하나씩 들려 있던 것이기도 했다.

고작 저것 때문에 사람 뒷덜미를 잡아당긴 것 같았다. 누굴 진짜 어린애로 아는 건가? 아니면 설마 여기에 독이라도 탄 걸까?

사실 소년은 고도로 훈련받은 암살자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경계심을 무너뜨린 다음, 방심한 사이에 뒤통수를 치려는…….

“안 먹어?”

소년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다른 과일 사탕을 아작아작 씹어먹으며 물었다. 코끝에 달콤한 향기가 풍겼다. 카르옌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사탕 싫어해? 애들은 다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애 아니거든.”

“그래. 사실 어른들도 다 좋아하는 것 같더라.”

소년이 턱짓한 곳에는 어른이며 아이며 할 것 없이 과일 사탕을 사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이 보였다.

카르옌은 코웃음을 치면서도 설탕물을 입힌 포도 한 알을 입 안에 머금어 보았다. 혀끝이 아릿할 정도로 달았다. 그 맛이 이상할 정도로 입 안에 오래 남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