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68)화 (68/110)

#068

카르예니프 델 카샤프의 어린 시절은 경탄과 질시로 얼룩져 있었다.

시작은 교황의 입에서 전해진 하나의 예언이었다.

‘초대 황제의 힘을 이어받은 위대한 마법사가 태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그 예언을 반신반의했지만, 머지않아 카르예니프가 진실로 위대한 마력을 품고 태어났음을 믿게 되었다.

아직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2황자는 손대지 않고 창문을 열고, 손가락이 다친 시종의 피를 멎게 하고, 한겨울 정원에 봄꽃을 피웠다. 한두 사람의 입을 막아 수습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자 소문은 날개 돋친 듯 퍼져나갔다.

말보다 마법을 더 빨리 배운 황자. 사람들은 제국 역사 천 년 동안 이런 일은 없었다며 카르예니프를 경외시했다.

제국력 천 년. 신앙은 잊히고 마법은 저물어가는 시대였다. 종말론이 허무하게 스러졌으나 다프닌교 신전에 기도를 올리러 오는 신자들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마법이 쇠퇴할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카르예니프는 그 시대의 흐름에 반기를 들듯 태어났다. 그의 존재를 누군가는 신의 축복으로 여겼고 누군가는 새 시대의 걸림돌로 여겼다.

전자는 카르예니프가 황제가 되어야 한다며 떠받들었고, 후자는 낡은 전통과 함께 그의 존재가 사라지기를 염원했다.

아니. 단순히 염원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했다. 카르예니프를 향한 원망과 견제는 뚜렷한 힘을 가지고 움직였다.

태어난 지 막 한 살이 된 갓난쟁이에게 목숨을 앗아가는 저주를 걸고, 매일 밤 암살자를 보낼 만큼.

“헉, 헉.”

열두 살의 카르옌은 그날도 암살자를 피해 도망치고 있었다.

카르옌은 황궁이 지루했고 때로는 숨이 막혔다. 그를 우러러보거나, 두려워하거나 혹은 원망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참을 수 없을 때면 몰래 황궁을 빠져나오고는 했다.

카르옌은 심부름 나온 하인처럼 수수한 옷을 입고 후드를 뒤집어쓴 채 두 번째 방벽 바깥까지 나왔다. 주로 평민들이 거주하는 구역으로, 수도에서 가장 활기찬 곳이기도 했다. 카르옌은 자신이 누구인지 짐작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 틈에서 정처 없이 떠돌았다.

처음 수상한 기척을 느낀 것은 야시장에서 산 꼬치를 먹고 있을 때였다.

수도에는 여름이면 야시장이 열렸다. 여기저기에 걸어 놓은 주홍빛 등불과 떠들썩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카르옌은 종종 야시장을 구경하고는 했다.

카르옌은 조금 전 1실버라는 값을 치르고 산 꼬치를 한 손으로 들고 베어 먹었다. 소스는 짰고 식감은 질겼다. 상인은 닭고기라고 했지만 사실 마수의 살점을 썰어 만든 꼬치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카르옌은 무심한 얼굴로 입 안의 고기를 질겅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지나쳐 온 쓰레기통을 찾아 몸을 돌리는데, 몇 걸음 뒤에서 부자연스러운 기척이 느껴졌다. 카르옌은 그쪽을 향해 시선을 주는 대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사람처럼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뒤를 따라오던 기척이 하나에서 둘, 둘에서 넷으로 늘어났다.

암살자의 습격은 이제는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이었지만 외성 구역까지 쫓아 나온 적은 없었다. 그의 머릿속을 채운 감정은 두려움이나 긴장감이 아니라 성가심이었다.

왜 나를 잠시도 가만히 내버려 두질 않는 걸까. 황제 따위는 되고 싶은 생각도 없는데.

카르옌은 일부러 사람들의 인적이 드문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골목 안쪽은 시장 한복판과 달리 캄캄하고 조용했다.

어둠이 짙어지자 암살자들이 기다렸다는 듯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카만 복장에 두건까지 쓰고 있었다. 그들은 어린아이를 상대로 한꺼번에 검을 뽑아 들고 달려들었다.

카르옌은 조용히 팔을 들어 올렸다. 목격자가 없는 어둠을 기다린 것은 카르옌도 마찬가지였다.

카르옌이 처음 사람을 죽이게 된 것은 여덟 살 때였다.

침실로 숨어들어 온 암살자들의 손에 늘 그의 곁을 지켜 주던 호위기사 다섯을 잃었다. 먼 친척이자 손님으로서 황자궁에 머무르고 있던 메르디나도 부상을 입었다.

‘도망치세요, 전하.’

카르옌보다 고작 한 살 많아 아홉 살이었던 메르디나가 작은 체구로 카르옌의 앞을 막아섰다. 그는 네 살 때부터 검을 쥐었지만 아직은 어린아이였다. 혼자 내버려 둔다면 목숨을 잃을 것이 뻔했다.

그날, 카르옌은 암살자들을 모두 죽였다. 여덟 살 난 아이에게 누구도 가르쳐 준 적 없는 마법이었으나 카르옌은 목적을 가진 순간 행할 수 있었다. 팔을 움직이는 방법을 따로 배울 필요가 없듯이 쉬웠다.

피범벅이 된 침실에 홀로 무표정하게 서 있는 카르옌을 보며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어머니와 그날 밤 조용히 침대 곁을 지켜 준 아버지의 얼굴도 떠올랐다.

카르옌에게 살인은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실수로라도 사람을 죽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쪽이 더 어려웠다. 그는 발밑에 개미가 가득한 거리를 걷는 사람처럼 늘 조심하고 또 조심하며 스스로의 힘을 통제해야 했다. 그들을, 그리고 자신을 죽이지 않기 위해서.

카르옌은 어둠에 시체 넷을 묻었다. 그대로 내버려 두고 갈까 하다가 흔적까지 지웠다. 이곳은 두 번째 방벽 바깥이었다. 변사체라도 발견되었다가는 괜한 혼란을 야기할지도 모른다.

쿨럭. 연달아 마법을 쓰자 기침이 튀어나왔다. 익숙한 통증이 심장을 옥죄었다.

카르옌은 손등으로 거칠게 입가를 닦아내다가 멈칫했다. 머리 위에서 숨죽인 기척이 느껴졌다. 암살자가 넷이 전부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하나, 둘, 셋……. 늘어나는 기척에 카르옌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암살자는 다섯이나 여섯, 혹은 그 이상이었다. 어린애 하나를 죽이기 위해 열 명에 가까운 암살자를 보낸 것이었다.

차라리 모두 한꺼번에 나타났다면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카르옌은 이미 힘을 쓴 뒤였다.

그릇이 훼손된 몸뚱이는 마법을 쓰는 일 자체보다 그 뒤에 오는 반동 탓에 더욱 괴로웠다. 누군가 손으로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은 십 년째 앓아도 익숙해지기 힘든 고통이었다.

카르옌은 자신의 연약한 몸뚱이가 조금 더 버텨 주기를 바라며 걸음을 돌려 골목 안쪽으로 깊이 뛰어 들어갔다.

카르옌은 열두 살이었지만 체구가 워낙 작아 고작 여덟아홉 살 정도로 보였다. 작은 발로는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쉽게 달아날 수가 없었다. 상대가 훈련받은 암살자라면 더욱 그랬다.

카르옌은 때로 다 자란 자신의 영혼이 맞지 않는 어린아이의 육신에 갇힌 듯한 느낌을 받고는 했다. 어차피 누구도 자신을 평범한 아이로 대하지 않는데 몸은 왜 따라주지 않는지 성가시기만 했다.

암살자들은 카르옌을 뒤쫓아오되 곧바로 공격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자신을 어딘가로 몰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시간을 벌어야 하는 것은 카르옌도 마찬가지였기에 순순히 당해 주는 수밖에 없었다.

“헉, 헉.”

숨을 헐떡이며 달리는데 눈앞에 막다른 골목이 나타났다. 쥐를 구석에 몰아넣은 고양이처럼 암살자들이 천천히 포위망을 좁혀 왔다.

카르옌이 몸을 돌렸다. 골목을 메운 그림자는 총 일곱. 예상보다 많은 숫자였다.

평생을 학습받은 몸가짐은 암울한 상황에서도 어깨를 펴고 고개를 꼿꼿이 쳐들게 했다. 카르옌은 캄캄한 골목 안에서 번쩍이는 일곱 개의 검날을 바라보며 눈을 치켜떴다.

“쿨럭.”

마력을 끌어올리자 피가 섞인 기침이 튀어나왔다. 악의로 할퀴어 찢어진 육신은 때로 카르옌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하필이면 그게 지금이었다. 아무리 채워도 깨진 그릇 아래로 힘이 속절없이 빠져나갔다.

카르옌이 이를 악물었다. 이런 곳에서 비명횡사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허무하게 죽어서 남 좋은 일 시켜 줄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깨진 그릇을 채우기 위해 카르옌은 남들보다 수 배, 수십 배로 많은 양의 물을 끌어와야 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아프고 목 안에서는 피 맛이 들끓었다.

암살자의 검날이 번뜩이며 카르옌의 눈앞으로 날아왔다. 카르옌은 그 검을 피하지 않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죽는다. 어쩌면, 지금 죽는다. 그러나 죽더라도 혼자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감히 자신에게 칼을 겨눈 이들을 용서한 적이 없었다.

그때였다.

탁. 가벼운 소리가 나며 누군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정확히는 지붕에서 떨어진 것 같았다.

숨어 있던 한 패인가?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카르옌이 낭패 어린 얼굴로 혀를 짓씹었다. 있는 힘껏 마나를 끌어모은 카르옌이 뒤늦게 마법의 시전 방향을 바꾸려는 순간이었다.

“……!”

카르옌의 뒤로 가볍게 착지한 사람이 발을 박차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키가 훤칠한 남자였다. 붉은색 머리칼이 턱 언저리에서 휘날렸다.

남자는 검을 뽑지도 않고 맨손으로 카르옌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가장 앞에서 달려드는 암살자의 손목을 내리쳐 순식간에 검을 빼앗았다.

암살자는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몸을 물렸지만 남자의 움직임이 더욱 빨랐다. 휙, 제 것도 아닌 검을 길게 휘둘러 암살자의 목을 꿰뚫었다.

남자는 뒤이어 달려드는 나머지 여섯 명의 암살자들을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검 끝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빨랐다. 달빛을 머금은 검날만이 때때로 반짝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