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7
이렇게 열이 높아도 괜찮은 건가? 어린 시절, 고작 열병으로도 목숨을 잃는 아이들을 수없이 많이 봐 온 토파즈였다. 그는 다급히 카르옌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카르옌, 카르옌!”
카르옌은 토파즈의 손가락을 집요하게 붙들고 있으면서도 눈은 쉽게 뜨지 못했다. 몇 번 소리쳐 부른 뒤에야 몽롱하게 눈을 떴다.
“음…….”
“너 괜찮아?”
어린 카르옌은 잠이 덜 깬 얼굴로 웅얼거렸다. 이제 보니 볼도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왜 이제야 알아차렸을까. 너무 늦게 알아차린 것은 아닐지 덜컥 겁이 났다. 왜 항상 자신은 이렇게 늦어 버리는 거지?
겨우 눈을 뜬 카르옌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토파즈를 보더니 희미하게 웃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짓고 계세요…….”
자신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토파즈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기 위해 숨을 고르며 말했다.
“너 지금 온몸이 불덩이야.”
“별거 아니에요.”
“별거 아니긴. 지금 네가 네 상태를 몰라서 그래.”
“괜찮아요. 사소한 부작용이 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이게 그 부작용이라고?”
“네…….”
어린아이치고 명확하던 발음이 끝에서부터 조금씩 뭉개졌다. 카르옌이 숨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온몸의 뼈가 모두 줄어들었다가 다시 커지는 중이니, 쉽게 말해 성장통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대략 10년 치 성장통을 한 번에 겪는 거지만요. 하루면 괜찮아질 거예요.”
온몸의 뼈가 줄었다가 커진다고? 전혀 괜찮지 않게 들렸다. 토파즈가 얼굴을 사납게 굳힌 채 물었다.
“왜 어떤 부작용인지 미리 말하지 않았어?”
“걱정하실까 봐요. 토파즈님이 제 걱정을 하시는 건…… 좋지만 가끔은 싫습니다.”
“대체 어쩌라는 거야.”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온 볼멘소리에 카르옌이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이마에 얹어져 있던 토파즈의 손을 끌어올려 자신의 머리 위에 툭 얹었다.
“지금은 정말 별거 아니니까…… 걱정 대신 그냥 쓰다듬어 주세요.”
재촉하듯 고개를 비비적거리기에 무심코 손을 움직였다. 한 손 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작은 머리통은 너무 연약해 보여서 힘 조절에 애를 먹어야 했다.
“베개도 지금의 제게는 너무 높은데, 팔베개 해 주시면 안 되나요?”
“솜 베개인데 높긴 뭐가 높아.”
“어지럽고, 무릎도 쑤시고…… 온몸이 아파요. 토파즈님…….”
“조금 전에는 내가 걱정하는 거 싫다고 하지 않았어?”
“이건 걱정 끼치는 게 아니라 그냥 어리광인걸요.”
“하아…….”
토파즈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그의 옆에 몸을 눕혔다. 1인용 침대였지만 어린아이와 함께 눕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팔을 슥 내밀자 곧 동그란 머리통이 그 위로 안착했다.
“토파즈님은 너무 다정하십니다.”
“그딴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대도.”
“앞으로도 저뿐이었으면 좋겠네요.”
카르옌이 열 오른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토파즈는 무언가 뺨을 간지럽히는 느낌에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자 창밖의 노을이 방 안을 절반가량 물들이고 있었다. 커튼이 반만 쳐져 있는 탓이었다.
못 이기는 척 옆에 잠깐 눕는다는 것이 깜빡 선잠에 들고 말았다.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 했을 정도로 정신을 빼놓은 짓이었다.
토파즈는 눈을 몇 번 깜빡여 초점을 다잡았다. 눈앞에 금색 실타래 같은 것이 있었다.
분명 조그만 아이를 안고 잠들었는데, 눈을 뜨니 다 자란 남자가 옆에 누워 있었다. 침대가 무척 비좁게 느껴졌다. 토파즈는 제 팔 위에 얌전히 놓인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자는 척해.”
남자의 눈꺼풀이 움찔, 떨렸다. 곧 기다란 속눈썹이 깜빡이며 푸른 눈동자를 드러냈다. 처음 이 눈동자를 마주했을 때가 떠올랐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때도 지금도.
“들켰네요.”
카르옌이 나직이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가 이렇게 낮았던가. 낯선 것은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노을이 일렁이는 뺨은 젖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그저 매끈했고 콧대와 그 아래로 이어지는 하관이 다부졌다.
고작 몇 시간 만에 봤다고, 앳된 기운이 조금도 남지 않은 남자가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저 머리칼 때문일지도 모른다. 토파즈는 이마를 차분히 덮고 있는 눈부신 금발을 보며 생각했다.
처음 카르옌의 흑발이 염색으로 인한 것이었음을 알았을 때, 토파즈는 조금 충격을 받고 말았다. 검은색 머리칼이 더없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본래 다른 머리 색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토파즈는 손을 뻗어 머리칼을 만졌다. 결 좋은 머리칼이 손에 부드럽게 감겼다. 가만히 눈을 깜빡이며 머리를 내맡기던 카르옌이 물었다.
“설마 흑발 쪽이 더 마음에 드세요?”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까부터 제 머리칼을 보면서 곤란하다는 얼굴을 하셔서요. 흑발이 취향이셨다면 저야말로 조금 곤란하네요. 그럼 제 아버지……. 아.”
벽보를 본 이후 암묵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던 ‘아버지’의 존재가 불쑥 튀어나오자 카르옌이 입을 다물었다. 꼭 날카로운 바늘로 혀를 찔린 사람 같았다.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수배지와 공문, 사람들이 입으로 옮겨 대는 소문. 애써 눈을 감고 보이지 않는 척하고 있었지만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온통 가시밭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가능성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처음부터 부모 따위 가져 본 적 없는 토파즈는 이럴 때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 대신 대답했다.
“잘 어울려, 금발.”
“…….”
진심이었다. 아마 자신이 그의 금발을 보고 뭔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면, 안 그래도 잘난 얼굴이 이전보다 세 배쯤 더 환해진 탓이겠지.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뜯어보면 분명 그대로인데 분위기가 변했다. 이전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훨씬 더 많이 끌어당길 것 같았다. 그동안 왜 머리를 검게 물들이고 다녔는지 바로 이해가 갔다.
토파즈는 살랑거리는 머리칼을 쓰다듬다가 천천히 손을 떼어냈다.
“네 아버지, 어떤 분이셔?”
토파즈를 가만히 응시하던 카르옌이 대답했다. 낮은 목소리가 조곤조곤 귓가를 울렸다.
“생각하시는 것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어요. 제 아버지는 훌륭한 인품과 실력을 겸비한 기사입니다만, 그만큼 바쁘셨거든요. 아버지께 첫째는 언제나 어머니, 둘째는 제국, 셋째는 기사단이었으니…… 아마 저는 다섯째나 여섯째쯤 되지 않았을까요.”
“너와 닮았어?”
“얼굴은 무섭도록 닮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머리 색은 다르지만요.”
아까 그가 하려다가 멈춘 말을 생각해 보면, 아마 아버지의 머리 색이 흑발인 모양이었다.
“저와 달리 우직하고, 요령 없고, 또 무뚝뚝한 기사시죠. 닮은 부분이라고는 아마 얼굴뿐일 거예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평소보다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토파즈가 기억을 되짚으며 말했다.
“어릴 때 매번 널 찾아냈다고 했잖아. 네가 떼어다 판 단추를 보고.”
카르옌이 목을 울려 낮게 웃었다.
“그러셨죠. 저는 어릴 때부터 결코 얌전하지 않은 아이였던지라, 마법을 써서 몰래 황궁 밖으로 나돌아다니곤 했습니다. 제가 오래 돌아오지 않으면 아버지가 직접 절 찾으러 황궁 밖으로 나오시고는 했어요.”
“혼났겠네.”
“아뇨. 저도 처음에는 절 혼내려고 나오신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그냥 위험한 곳은 가지 말라고 말씀하시고는, 꾸중 한마디 없이 절 다시 궁까지 데려다주시곤 했습니다.”
“…….”
“알고 보니 제 어머니도 어린 시절에 황궁 밖으로 나돌아다니기를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그때도 어머니를 말리는 대신 같이 돌아다녀 주고는 하셨고요.”
“다정한 분이셨네.”
토파즈의 말에 카르옌은 잠시 멈칫했다. 짧은 침묵 뒤에 그가 낮게 대꾸했다.
“……그러게요. 그랬네요.”
무사할 거라고, 그러니 걱정 말라는 위로 같은 건 할 수 없었다. 무사할지 어떨지 토파즈는 알지 못했다. 진심으로 믿어 주지도 못하면서 무책임한 위로를 건네고 싶지는 않았다. 카르옌 역시 그것을 바라지 않는 듯했다.
차분히 빛나는 푸른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 올곧은 시선에 이끌리듯, 토파즈는 오늘 내내 삼키고 있던 질문을 꺼내 놓았다.
“너, 맞지.”
“…….”
카르옌은 대답 대신 눈만 깜빡였다. 뭘 묻는 거냐고 되묻지도 않았다.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는 얼굴이었다.
토파즈가 손을 뻗어 카르옌이 입은 흰 셔츠의 목깃 사이로 손가락을 비집어 넣었다. 카르옌은 숨을 멈춘 채 토파즈가 하는 행동을 지켜 보고만 있었다. 빗장뼈 아래를 더듬던 손끝에 무언가가 걸렸다.
쥐고 끌어당기자 얇은 사슬에 걸린 목걸이가 딸려 올라왔다. 얇은 금테가 투박한 푸른색 보석, 아니. 돌을 감싸고 있는 목걸이였다.
카르옌이 옷 안쪽으로 이 목걸이를 걸고 있는 것을 몇 번인가 본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넨베르그에서 그가 어깨를 다쳤을 때, 그다음은 호수에 빠졌을 때였다.
카르옌은 옷을 여러 겹 껴입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보이지 않을 때는 대부분 잊고 지냈지만 눈에 걸릴 때마다 의아하기는 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물건은 단추 한 짝까지 모조리 잘 세공된 상등품의 보석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런데 정작 매일 걸고 다니는 목걸이는 투박하기 짝이 없다니. 보는 눈 없는 자신이 세공 전의 원석을 못 알아보는 것이거나 무언가 의미 있는 물건이라도 되겠거니 싶었다.
그러나 오늘 어린 카르옌의 모습을 본 순간, 저절로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조금 전에 나눈 이야기가 그에 쐐기를 박았다.
토파즈는 손바닥 위에 얹어진 투박한 돌을 매만지다가 고개를 들었다. 돌의 형태는 그의 기억과 달랐지만, 이 시리도록 푸른 눈은 그대로였다.
“이거, 내가 준 거잖아.”
한 번도 보지 못한 바다가 꼭 이 애의 눈동자 같은 빛깔일까. 그렇다면 참 아름답겠다. 그렇게 생각했던 시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