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66)화 (66/110)

#066

이 방법을 생각해 낸 사람은 물론 카르옌 본인이었다.

‘포탈에 설치된 태초의 관문에 걸리는 마법은 변장 마법뿐입니다. 머리 색이나 이목구비를 거짓으로 위장하는 종류요. 그러니 다른 방법을 쓰면 그만입니다.’

‘……?’

‘제가 아카데미에 다닐 때 개발한 마법이 있는데, 미약한 부작용이 있긴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꽤 쓸 만합니다.’

도대체 아카데미 시절에 무슨 짓을 하면서 보낸 거지? 이쯤 되니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대체 무슨 마법인데?’

‘음…….’

말끝을 흐린 카르옌이 제 허리춤 높이에 손을 펼치며 말했다.

‘작아지는 마법이에요.’

‘뭐?’

‘정확히는 딱 한나절 동안만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마법입니다.’

하란과 메르디나는 지명수배를 당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였다. 두 사람은 카르옌의 최측근으로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얼굴을 드러내는 순간 추격이 붙을 거라고 했다.

‘머리가 있는 놈이라면 우리가 사라지자마자 미리암과 아히네스 영지부터 뒤졌을 거야. 지금도 분명 추격자들이 미리 가 있겠지. 그래도 성내로 무사히 들어가기만 하면 도움을 기대해볼 수 있으니, 어떻게든 미리암에서 만나도록 하자. 살아서.’

이 계획에는 아직 존재가 알려지지 않은 아군, 토파즈의 존재가 필수적이었다.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카르옌과 함께 무사히 포탈을 통과할 어른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보호자 역할이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어린 카르옌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토파즈는 그 물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안에는 다 큰 어른이 들어 있으니 당연하겠지만, 올려다보는 얼굴이 대여섯 살짜리 아이치고는 차분했다. 다만 볼록 튀어나온 살굿빛 뺨 탓에 다소 귀엽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겨우 여섯 시간 남짓 유지되는 마법을 쓴 지 한 시간째. 토파즈는 여전히 어린 카르옌의 얼굴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금실로 자아낸 듯 반짝이는 머리칼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아니, 그냥. 앞에 조심하라고.”

토파즈는 답지 않게 말끝을 흐리며 앞을 턱짓했다.

그들의 앞에는 새하얀 돌기둥으로 지어진 문이 있었다. 사람 두어 명 정도 겨우 통과할 만한 폭을 가진 문은 포탈의 모든 입구에 세워져 있었다.

에델티움은 본래 영지 간의 이동이 자유로운 나라였다. 도시마다 침입을 막는 목책과 해자, 성벽 따위가 축조되어 있었지만 그들이 경계하는 대상은 대부분 인간이 아닌 마수였다.

천 년도 더 이전, 제국이 세워지기 전부터 대륙은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보다 생존을 위한 마수와의 싸움이 더 빈번히 일어나는 땅이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베론처럼 영지 내에서 흉흉한 범죄가 벌어지거나 2황자의 반역이라는 전국이 뒤집히는 사건으로 검문이 강화되지만 않는다면, 영지를 이동하면서 신분을 증명해야 하는 경우 자체가 드물었다.

그러나 포탈만큼은 달랐다. 공공 포탈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었지만, 흉악 범죄자가 포탈을 통해 멀리 도주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반드시 몇 가지 검문을 거쳤다.

첫 번째가 바로 변장 마법을 걸러내는 ‘태초의 관문’이었다.

토파즈는 카르옌의 자그마한 손을 붙들고 애써 태연하게 앞으로 걸어갔다. 관문을 통과하는 순간에는 조금 긴장했으나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카르옌의 장담대로였다.

카르옌의 말에 따르면 육체가 일시적으로 어린 나이로 돌아갔을 뿐, 겉모습을 가짜로 위장한 것은 아니므로 태초의 관문에서 걸리지 않을 거라고 했다. 일종의 편법이었다.

고작 한나절 지속된다곤 하지만 이런 사기 같은 마법이 있다니. 아니, 직접 만들었다니…….

마법의 역사는 천 년으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다. 새로운 마법에 대한 연구는 활발했고 실제로 마탑에서는 매년 새로운 마법을 개발하거나 기존의 마법을 변형하고 발전시키는 데에 공을 들였다.

그러나 그것은 천재라고 불리는 마법사들 수십, 수백 명이 머리를 맞대서 일구어내는 결과가 아니었던가. 토파즈는 눈앞에 있는 이가 현세기 최고의 마법사로 불리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실감했다.

물론 그 현세기 최고의 마법사는 지금 짧고 통통한 몸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사람들에게 여기저기 치이고 있었지만. 토파즈가 미간을 좁혔다.

“거기 서 봐.”

토파즈가 어린 카르옌의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끼웠다. 작고 가벼운 몸이 저항도 없이 쑥 들어 올려졌다. 밭에서 무나 당근을 뽑아도 이보다는 힘이 들 것 같았다.

번쩍 안아 들어 한쪽 팔뚝 위에 앉히자 어린 카르옌이 짧은 팔로 목을 꼭 감싸 안았다.

“내려 주셔도 되는데요.”

“사람 많잖아. 너처럼 작은 애는 여기저기 치이기 딱 좋아.”

“제가 본래는 토파즈님보다 더 큽니다.”

불퉁한 뺨으로 볼멘소리를 내뱉는 것이 황당했지만 무시했다. 이런 사소한 문제에 열을 낼 기운이 있다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토파즈는 카르옌을 안은 팔에 힘을 주며 걸음을 옮겼다.

두 번째 절차는 신분 확인이었다. 보안관들이 얼굴과 신분패를 함께 확인했는데, 사실상 신분패보다는 얼굴을 보고 지명수배범 등 범죄자를 거르는 절차라고 보아야 했다.

신분패라고 해 봤자 초상도 없이 이름 정도만 적혀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남의 신분패를 훔치거나 사서 통과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밤 마샤에게 가서 가넷이 보내서 왔다고 해. 뒤탈 없는 신분패 두 개쯤은 마련해 줄 거야.’

넨베르그에 도착하자마자 찢어진 하란과 메르디나도 약속한 시간이 되면 그렇게 뒤따라올 예정이었다. 토파즈는 밤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시모네의 용병들에게서 탈취했던 용병패를 사용하기로 했다.

아마 그들이야 진작 길드에 분실 신고를 마치고 재발급을 신청했겠지만, 아무리 포탈이라도 일개 용병의 신분패 분실 소식까지 갱신해 가며 깐깐히 검사하지는…….

“잠깐만. 저거 며칠 전에 녹스에서 도난 신고 들어왔던 용병패 아니야?”

“이름 대조해 봐. 적색 명단에 있어.”

보안관끼리 은밀히 속삭이는 소리에 토파즈가 눈썹을 까딱였다.

……분명 그렇게까지 깐깐하지는 않았을 텐데.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보안관들은 토파즈에게 조심스레 안내하며 손으로는 바쁘게 명단을 뒤적였다.

고민할 시간은 짧았다. 토파즈는 카르옌을 안은 팔에 힘을 주어 추슬러 안고, 다른 손으로는 이미 내민 용병패를 덮었다. 의아한 시선이 날아왔다.

“제가 실수했네요. 그건 제가 습득한 동료의 분실물입니다. 이쪽이 제 신분패입니다.”

토파즈가 품 안에서 나무 조각을 꺼내 내밀었다. 약간 의심스럽게 토파즈를 바라보던 보안관의 눈이 용병패를 확인하고는 휘둥그레 뜨였다.

날고 기는 용병들이 모두 모인 녹스에서도 단 열 명에게만 주어졌다고 알려진 붉은색 패였다. 그보다 한 단계 아래인 검은색 패를 지닌 용병만 해도 일류로 손꼽힐 정도로 소수인데, 녹스의 붉은 패 용병을 실제로 보는 것은 넨베르그 포탈의 보안관도 처음이었다.

제국에 딱 열 사람뿐이니 숫자로만 따지면 우연히 공작이나 후작을 만날 확률만큼 드문 것 아닌가? 보안관은 속으로 흥미로워했다.

물론 남자에게 안겨 있는 금발의 꼬마가 제국에 단 두 명뿐인 황자이자, 그가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는 지명수배범이라는 사실을 모르기에 할 수 있는 태평한 생각이었다.

“이만 통과해도 될까요. 좀 바빠서.”

“아, 네. 그런데 그 아이는…….”

13세 미만의 아동에게는 신분패가 발급되지 않기 때문에 보호자와 동반하면 별다른 확인 절차는 필요 없었다. 토파즈는 카르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태연히 말했다.

“제 딸입니다.”

* * *

미리암의 포탈 안팎에는 예상대로 무장한 기사나 마법사들이 잔뜩 있었다. 후드를 뒤집어쓰거나 모자 따위로 얼굴을 가린 이용객들은 출구를 나서기도 전에 멈춰 세워졌다. 그 외에도 금발이거나, 금발이 아니더라도 키가 큰 성인 남자는 빈번하게 검문을 당하는 대상이었다.

토파즈 또한 출구를 나서다가 한 번 붙잡혔지만 조금도 닮지 않은 얼굴을 확인한 기사가 머쓱한 얼굴로 통과시켜 주었다. 토파즈와 함께 있는 대여섯 살짜리 어린아이에게 의심 어린 시선을 던지는 사람은 없었다.

설마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변하는 마법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짐작조차 하지 못한 탓이 컸지만, 설령 그 마법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어린 카르옌을 수배지의 2황자와 같은 사람이라고 의심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목구비가 섬세하고 아름답기는 해도 우뚝한 콧대나 단단한 턱, 떡 벌어진 어깨를 가져 누가 봐도 건장한 남자인 카르예니프와 달리, 어린 카르옌은 선이 고운 예쁘장한 얼굴에 키도 또래보다 작고 가냘픈 체구였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으면 열 명 중 일곱 명쯤은 여자아이라고 대답할 정도였다. 아까 보안관 역시 토파즈의 딸이라는 설명에 의문조차 갖지 않았다. 제국의 복식에는 성별 구분이 없다 보니 더욱 그랬다.

황자와는 전혀 닮지 않은 적발의 용병과 금발의 예쁜 소녀에게 의심을 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두 사람은 유유히 포탈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제국의 최남단, 미리암은 공기부터 달랐다. 이곳은 여전히 한여름이었다. 사람들은 주로 팔다리를 모두 덮는 흰옷을 입고 다녔다. 발목까지 오는 얇은 옷을 입고 어깨나 허리춤에 모조 보석 따위가 달린 장신구를 늘어뜨리는 것이 이곳의 관습인 모양이었다.

토파즈는 한 겹 걸치고 있던 겉옷을 벗고 어린 카르옌이 입고 있던 겉옷도 벗겨 반대쪽 팔에 걸었다. 더웠는지 카르옌이 으음, 앓는 소리를 내며 품에 뺨을 파묻었다.

제국에서 가장 풍요로운 영지라는 소문은 거짓이 아닌지, 수도 못지않게 번영한 곳이었다. 새하얀 돌로 지어진 번듯한 건물들은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눈부시게 빛났고 잘 닦인 돌길 위를 마차가 쉴 새 없이 오갔다.

그러나 수도가 정신 없을 정도로 활기찬 분위기라면 미리암은 조금 달랐다. 사람들은 걸음이 느렸고 다들 여유로워 보였다. 말투도 손짓도 무엇 하나 급한 것이 없었다.

1급 반역죄를 일으킨 반역자의 지명수배지가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상황은 미리암도 마찬가지였으나, 사람들에게서 혼란과 불안은 그다지 엿보이지 않았다. 간혹 얼굴을 굳히고 돌아다니는 경비병들만이 긴박한 상황을 일깨웠다.

토파즈는 메르디나가 알려 준 여관에 방을 잡고 들어와 겨우 한숨을 돌렸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조용히 안겨 있던 카르옌은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숨을 색색거리는 아이를 침대에 눕혀 주고 일어나려는데, 작은 손이 토파즈의 새끼손가락을 붙들어 왔다.

설핏 잠에서 깬 카르옌이 무어라 웅얼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진짜 어린애 같아서 피식 웃음이 났다. 새끼손가락을 꼭 쥐어 오는 손도 평소와 달리 뜨끈했다.

어린아이들은 몸에 열이 많다더니, 카르옌도 어릴 때는 늘 이렇게 체온이 높았던 걸까.

그러나 토파즈는 곧 카르옌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발견하고 미간을 좁혔다. 갑자기 기후가 달라져서 더웠던 걸까? 하지만 뛰어온 것도 아닌데 땀이 왜 이렇게 많이…….

“카르옌?”

토파즈는 젖은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이마를 짚었다가 놀라서 손을 떼어냈다. 이마가 펄펄 끓는 것처럼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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