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5
황자의 이름까지야 일일이 모르는 평민이 많다고 하나, 철저히 숨기려 했다기엔 성의 없는 가장이었다. 들켜도 상관없다는 듯 군 쪽은 카르옌이었다.
처음에는 설마 했고 나중에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호수에서 천년어의 이야기로 확신했다.
“천 년 전에 살았던 제국 최고의 마법사가 누구인지 모르는 제국민도 있던가? 그의 후손 중 가장 뛰어난 마법사가 누구인지도.”
2황자가 초대 황제 이후 가장 뛰어난 마법사로 불린다는 사실은 지나가던 일곱 살짜리도 아는 이야기였다. 차마 부정할 수 없었는지 카르옌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완벽히 숨기지 않았으니 눈치채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티를 내지 않으실 수가 있습니까.”
“뭐, 그럼 갑자기 존댓말이라도 써 드릴까요? 황자 전하.”
“그러지 마세요…….”
카르옌이 아랫입술을 짓씹는 모습이 보였다. 원래도 창백하던 뺨이 오늘따라 더 희게 질려 있었다. 토파즈는 곁에 선 세 사람에게 말했다.
“너희도 내가 ‘가넷’이라는 걸 알면서 모르는 척했으니 한 번씩 주고받은 셈 쳐.”
토파즈가 직접 그들 앞에서 자신이 가넷이라고 시인한 적은 처음이었다. 하란과 메르디나의 눈이 커졌다.
“지금이 그런 사소한 문제를 따질 상황은 아니니까.”
덧붙인 말에는 다시 침통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네 사람의 머릿속에 모두 같은 문장이 떠올랐을 것이다.
황제 시해 미수 및 납치 도주, 그리고 국서 시해.
그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면 카르옌의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는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죄를 카르옌이 모두 뒤집어썼다. 셋 중 하나만 일어나도 충격적이었을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가히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토파즈는 침통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메르디나와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는 하란, 그리고 아무런 표정도 행동도 취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카르옌을 바라보았다. 토파즈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벽보의 내용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도 있어. 만약 사실이더라도, 미안하지만 지금은 충격에 빠져 있을 시간 없으니 정신 차려.”
토파즈는 죽은 동료를 향한 애도의 시간조차 사치인 상황을 숱하게 겪었다. 수없이 겪었음에도 익숙해지지 못했고 무뎌지지도 못했다. 그래서 자신의 입으로 이런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무척 싫었지만…….
“움직여야 해.”
이대로 멈춰 서 있으면 이 셋도 죽는다. 칼끝은 이미 턱 밑에 닿아 있었다. 언제 그들의 목을 꿰뚫을지 모른다.
“공문에는 영지 간의 이동을 통제한다고 적혀 있었어. 도시마다 검문소가 세워지고, 드나드는 모든 이들의 얼굴을 꼼꼼히 확인할 거야. 지금은 벽보가 붙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들 우왕좌왕하고 있지만 당장 오늘 밤부터는 상황이 달라질걸. 이 도시를 빠져나가기조차 어려워질지도 몰라.”
진짜 범죄자 신세가 된 것이었다. 카르옌은 손바닥을 들어 천천히 턱을 쓸어내렸다. 차라리 당혹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거나, 화를 내거나 울기라도 했다면 나았을까. 표정을 잃고 고요해진 카르옌은 꼭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도 모르는 어린아이 같았다.
카르옌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그가 낮게 말했다.
“북쪽 숲으로 가는 건 포기할 수 없어요. 이 싸움에서 이기려면 결국 저는 제 힘을 온전히 되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토파즈님 말씀대로 지금 당장 북부로 거슬러 올라가기는 어렵겠죠. 일단은 몸을 피해야 합니다.”
카르옌은 천천히 손을 움직여 제 몸을 더듬었다.
“지금이라면 공간 이동 마법을 한 번 정도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먼 거리는 힘들어요. 포탈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포탈이 있고 여기서 멀지 않으면서, 제가 이미 가 본 곳이어야 하니…… 답은 넨베르그뿐이겠네요.”
“넨베르그의 포탈은 제국에서 가장 작아. 이동할 수 있는 도시는 셋뿐이야. 카샤프, 서부의 세레스, 그리고 남부의 미리암.”
“일단 수도는 제외하죠. 이대로 수도로 가 봤자 제 목이 성벽에 걸리기밖에 더 하겠습니까.”
“…….”
“마침 그 셋 중에 적당한 후보지가 있는 것 같은데…….”
카르옌의 시선이 메르디나를 향했다.
“메르디나. 내가 미리암으로 간다면, 미리암은 감히 반역자를 감싸 줄 수 있겠어?”
메르디나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제 어머니가 폐하께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듯, 저 역시 전하께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습니까. 미리암은 영원히 전하의 검입니다.”
세 사람 사이에 일종의 위계 관계가 있으리라는 점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토파즈의 귀로는 처음 듣는 정중한 호칭과 존댓말이었다. 묘한 기분에 잠겨 있는데 카르옌은 자연스럽게 대꾸했다.
“더 가감 없이 말해 봐.”
메르디나는 잠시 침묵했지만 이내 낮게 말했다.
“……전하가 반역자라면 저는 반역자의 오른팔이 됩니다. 미리암이 멸문을 피하고 싶다면 모든 명운을 걸고 전하를 황위로 이끌어야 합니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최후에 월계관을 쓴 이가 황제가 되고, 패배한 이가 반역자가 될 테니까요.”
“그래. 하나 남은 자식과 가문을 모두 잃고 싶지 않다면 공작도 협조하겠지.”
미리암 공작가는 건국 공신인 초대 미리암 공작으로부터 이어진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남부의 풍요로운 영지를 가지고 있어 제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대부호이기도 했다. 토파즈는 자연스럽게 메르디나의 정체를 알게 되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라서인지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이미 눈앞에 황자가 있는데 더 놀라기도 어려웠다.
“죄송하지만 저희 가문 쪽은 기대하지 마세요. 제 아버지는 지금쯤 가문의 계보에서 제 이름을 모두 지우고 계실 겁니다. 신학교에서 퇴학당했을 때 이미 반쯤 지우셨는데, 곧 완성하시겠네요.”
애써 가벼운 어조로 말하는 하란의 목소리도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카르옌이 고개를 기울였다.
“아히네스, 그 셈 빠른 자가? 네 탓에 가문이 통째로 2황자파 취급을 받았지만 한 번도 부정한 적 없잖아.”
“그거야 전하께서 차기 황제가 되실 거라고 굳건히 믿었으니 잇속을 챙긴 것뿐입니다.”
“그럼 지금도 그렇게 믿게 만들면 되겠네.”
“…….”
“난 이대로 꼴사납게 쫓겨날 생각 없어. 하란, 메르디나. 너희 목숨이 내게 달려 있음도 모르지 않아. 이제 와서 다 함께 죽을 수는 없지.”
카르옌이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긴 속눈썹이 뺨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고요히 무언가를 인내하는 얼굴이 피로하고, 또 외로워 보였다.
토파즈는 그 얼굴에 손을 뻗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지금도 시간은 흐르고 있었고 상황은 변하고 있었다.
“일단 넨베르그로 간다고 치자. 포탈은 어떻게 통과할 생각이야? 가짜 신분패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아. 문제는 변장 마법을 걸러내는 ‘태초의 관문’이야.”
마법으로 머리 색이나 얼굴을 바꾼다고 해도 소용없었다. 태초의 관문에서는 모든 변장 관련 마법이 무용지물이 되니, 카르옌은 거기서 반드시 걸릴 수밖에 없다.
토파즈의 머릿속에 태초의 관문에 걸린 마법을 파훼하거나 마법사들을 인질로 잡아 포탈을 탈취하는 등 극단적인 해결 방법이 몇 가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렇게 소란을 일으켰다가는 도망친 보람도 없이 다시 쫓겨야 할 것이다. 무엇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었다.
무심코 주먹을 움켜쥐는데, 카르옌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제게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 * *
넨베르그의 포탈 광장은 이전보다 더욱 붐볐다. 이용자야 늘 많았지만 평소보다 검문이 더 까다롭게 이루어지는 탓에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건물의 외벽이며 게시판에는 카르옌의 얼굴이 그려진 지명수배지가 곳곳에 붙어 있었다. [수배지를 함부로 떼어가지 마시오]라는 새로운 경고문도 나란히 붙어 있고는 했다.
“정말 2황자가 흑마법사일까? 천사보다 성스럽게 생기신 분이 흑마법을 쓴다니 믿을 수 없어.”
“나도 처음 봤을 땐 수배지가 아니라 성화(聖畫)를 걸어놓은 줄 알았지 뭐야.”
“설마 진짜 이렇게 생겼겠어?”
“맞아. 아무리 황족이라지만 수배지를 평소 얼굴이랑 똑같이 그려 놔야지, 이렇게 미화해서 그려 놓으면 어떻게 알아보고 신고하라는 거야?”
“…….”
시민들의 은근한 속삭임을 듣던 토파즈는 부디 그들이 계속 그렇게 착각해 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손을 맞잡고 있는 이를 내려다보았다. 평소와 달리 고개를 한참이나 내려야 했다.
토파즈의 허리춤에 겨우 오는 키, 땅을 딛는 앙증맞은 두 발, 근처 의상 가게에서 산 아동용 녹색 외투가 차례차례 시야에 담기자 손에 괜히 땀이 차는 것 같았다.
슬쩍 손끝을 그러쥐자 동그랗고 커다란 눈망울이 토파즈를 올려다보았다. 새파란 눈동자와 긴 속눈썹은 여전했으나 그 외의 것은 모두 낯설기 그지없었다.
대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작은 체구와 사탕이라도 물고 있는 것처럼 통통한 뺨, 단풍잎처럼 작은 손, 그리고 이마를 덮고 있는 화사한 금발까지.
토파즈의 손을 잡고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는 아이의 정체는 바로 카르옌이었다. 정확히는, 어린 카르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