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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토파즈 (64)화 (64/110)

#064

일행은 카르옌이 깨어날 때까지 호숫가에 머물렀다. 수면 아래가 모두 비쳐 보일 듯 투명하게 빛나는 호수는 그들이 조금 전까지 찾아 헤매던 곳과는 전혀 다른 장소처럼 보였다.

카르옌은 두 시간쯤 뒤에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음……. 토파즈님?”

“깼어?”

토파즈와 시선이 마주치자 카르옌은 비몽사몽한 채로도 눈을 휘었다.

“죄송해요……. 제가 또 잠들었네요.”

“잠든 게 아니라 기절이고, 깼으면 일어나지?”

“……뭐야. 너였어?”

카르옌은 자신이 베고 누워 있던 것이 하란의 무릎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인상을 찌푸렸다. 어쩐지 딱딱하다 싶었다며 툴툴거리는 목소리가 평소와 다름없이 들렸다.

“몸 상태는 어때?”

토파즈가 물었다. 호수 정화는 약속한 내용도 아니었는데, 괜히 무리한 것이 뻔했다. 상체를 일으킨 카르옌은 심장 부근을 천천히 어루만지더니 말했다.

“괜찮습니다. 인어, 아니. 천년어의 말은 사실이었어요. 조금이지만 변화가 느껴져요.”

“그럼 정말 나머지 조각을 찾아서 파괴하면 봉인을 풀 수 있는 거야?”

하란이 물었다. 얼떨떨하면서도 벅찬 기색을 겨우 억누르는 얼굴이었다. 카르옌이 고개를 끄덕였다.

“쉽진 않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 단서를 찾은 건 처음이잖아.”

“그래. 드디어 방법을 찾았네. 방법이 있긴 한 건지 늘 의심하고 또 의심했는데…….”

대꾸하는 카르옌의 얼굴도 조금이나마 후련해 보였다. 선선한 바람이 머리칼을 흩트리며 지나갔다.

토파즈는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아까부터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아까 천년어가 말한 봉인석이 숨겨진 장소 말이야.”

“네.”

“듣자마자 떠오르는 곳이 있던데. 아니, 사실은 그 이야기를 듣기 전부터 묘하게 기시감이 든다 싶었지.”

“…….”

토파즈가 입술을 달싹여 익숙한 이름을 내뱉었다.

“죽음의 숲, 그렌로샤.”

그들의 여정이 시작된 장소의 이름이었다. 토파즈가 오두막을 지어 4년간 은둔했고, 그동안 눈앞의 세 사람을 제외하면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던 숲.

“이곳과 지나치게 닮지 않았어?”

마수의 출몰이 잦으며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찾지 않는 곳. 언제부터 그랬는지도 모를 정도로 아주 오래전부터 접근이 금기시된 땅이었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설계한 장치처럼 절묘하다고 늘 생각했었다. 이 호수와 마찬가지로.

메르디나가 입을 열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천년어는 ‘대륙의 끝과 끝’에 힘을 봉인한 보석이 숨겨져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에델티움 제국은 대륙 동부에 광활한 영토를 가지고 있는 나라였다. 그럼에도 제국의 영토 중 대륙의 끝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곳은 동부와 북부 지역뿐이었다. 서쪽으로는 브란트 왕국, 남쪽으로는 티잔 왕국과 국경선 일부를 맞대고 있기 때문이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메르디나가 덧붙였다.

“물론 남부의 미리암 공작령도 남해를 일부 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대륙 남부 지형이 계단 형태라서 그럴 뿐, 누구도 그곳을 대륙의 남쪽 끝이라고 칭하지는 않습니다. 대륙 남부의 대부분은 티잔 왕국이 차지하고 있으니까요. 또한 천년어의 설명대로라면 마수의 출몰이 잦고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특징이 있을 텐데, 미리암에는 짚이는 장소가 없습니다. 적어도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네가 모르면 없는 거겠지, 메르디나.”

카르옌이 대답했다. 토파즈는 그 확신 어린 말이 다소 의아했지만 다른 이들은 누구도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하란이 어딘가 허탈한 어조로 말했다.

“결국 단서는 저희의 시작점에 있었던 거네요.”

“사실이라면 정말 공교로운 일이지. 하지만 이해는 가. 무언가를 숨기고 싶다면 나라도 그곳을 택했을 테니…….”

카르옌이 읊조렸다. 하란이 토파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렌로샤 숲에서 몇 년은 사셨잖아요. 뭔가 짚이는 점 없으십니까? 수상한 장소라든가요.”

“그 숲에서 안 수상한 걸 찾는 쪽이 더 빠르지 않을까.”

“……그건 그렇네요.”

하란이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동조했다. 토파즈로서도 기묘한 기분이었다. 거의 4년을 지낸 숲에 카르옌의 저주와 관련된 실마리가 있을지도 모른다니.

“결국 직접 가 보는 수밖에는 없어. 하지만 서둘러야 해. 그들이 말하는 ‘기록’에 적힌 장소가 그렌로샤 숲이 맞다고 해도 그들이 우리보다 먼저 움직인다면 또 일이 꼬일 거야.”

카르옌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은 걷고 또 걸어 아리아 호수와 가장 가까운 마을로 돌아왔다. 카르옌이 자주 마법을 써 주었는데도 시도 때도 없이 빗물과 이슬을 머금은 탓에 옷이 축축 처졌다. 그들은 마을에서 짧은 휴식을 취한 뒤, 그렌로샤까지 가장 빠르게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향후의 계획을 정리할 생각이었다.

바쁘게 걸음을 옮기던 토파즈가 문득 멈춰 섰다. 며칠 전 아리아 호수를 찾기 위해 잠시 들렀을 뿐이지만, 그의 기억에 따르면 분명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의 마을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여관이며 상점이 몰려 있는 시가지에 사람들이 어수선하게 몰려 있었다. 그들은 벽에 다닥다닥 붙어 수군거리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기류에 다른 세 사람도 경계를 끌어올리는 것이 느껴졌다.

“……자가……. 설마…….”

무심코 귀를 기울인 토파즈는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믿을 수 없는 단어 몇 가지를 건져냈다. 토파즈는 뭉쳐 서 있는 사람들 사이를 뚫고 들어갔다. 사람들의 불만과 탄식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토파즈는 사람들을 밀치고 가장 앞에 섰다.

돌로 된 벽에 벽보가 여러 장 붙어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인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방금 막 새로 붙인 듯 빳빳한 종이가 보였다. 토파즈가 숨을 멈췄다.

“토파즈님, 왜 그러십…….”

곧바로 뒤쫓아온 카르옌과 두 기사가 토파즈와 마찬가지로 얼어붙었다.

“…….”

그들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지명수배지가 붙어 있었다. 수배지에 그려진 초상화는 흑백이었지만 색채가 없음에도 섬세한 이목구비는 가려지지 않았다.

익숙한 얼굴, 그리고 그 아래에 낯선 이름과 죄명이 쓰여 있었다.

[2황자 카르예니프 델 카샤프. 1급 반역죄로 수배함.]

* * *

카르예니프 델 카샤프.

낯선 이름이었지만 수배지 속 얼굴은 도저히 잘못 볼 수가 없었다. 익숙한 얼굴 옆에 수배범의 위험도를 나타내는 검은 별이 세 개나 붙어 있었다.

지명수배지와 나란히 붙은 벽보에는 더욱 상세하고 충격적인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제국의 2황자인 카르예니프 델 카샤프가 황제를 시해하려다 실패하고 도주 중이며, 그 과정에서 흑마법으로 국서를 시해했다는 내용이었다. 범죄의 엄중함을 고려해 전 제국에 수배령을 내리며 영지 간의 이동을 통제한다는 말도 적혀 있었다.

제보자에게 포상금을 내린다는 부분을 읽어내리던 토파즈는 옆에 선 카르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미동도 없이 수배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후드를 푹 눌러 쓰고 있어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흐트러진 숨소리가 들렸다. 조금 더 귀를 기울이면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까지 들릴 것 같았다.

1급 반역죄. 토파즈의 머릿속에 그 입에 담기도 무거운 단어가 자꾸만 떠올랐지만, 지금은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토파즈가 카르옌의 손목을 쥐었다. 수배지를 향해 못 박혀 있던 고개가 토파즈를 향해 느릿하게 돌아왔다.

“아…….”

토파즈의 얼굴을 마주한 그는 새로운 문제를 깨달은 사람처럼 낮게 탄식했다. 손끝이 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일단 들어가.”

토파즈는 저 멀리에서 돌아다니는 경비병들을 확인하고 곧바로 카르옌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마찬가지로 얼빠져 있는 두 기사의 등도 떠밀었다.

온 거리의 사람들이 ‘황제 시해 미수’, ‘납치 도주’, ‘국서 시해’ 따위의 이야기를 떠들어 댔다. 따라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쫓기는 사람처럼 자꾸만 걸음이 빨라졌다. 금방이라도 누군가 뒤에서 목덜미를 잡아챌 것 같았다.

다행히도 가까운 여관으로 가 객실을 잡을 때까지 아무도 일행을 붙잡지 않았다. 아직 벽보가 붙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혼란스러운 분위기였다.

객실 문이 굳게 닫히자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토파즈는 숨을 한 번 고르고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는 담담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벽보, 봤지.”

“……토파즈님. 다 설명하겠습니다.”

카르옌이 토파즈의 손을 당겼다. 토파즈는 그제야 자신이 아직도 카르옌의 손목을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곧바로 떼어내는 대신 떨리는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되물었다.

“지금 나한테 설명하는 게 중요해?”

“……전혀…… 놀라지 않으시네요.”

“설마 정말 아무것도 몰랐으리라고 생각해?”

토파즈가 얽힌 손을 떼어냈다. 카르옌은 그 손을 붙잡고 싶은 것처럼 손끝을 움찔거렸지만 정말로 잡아 오지는 못했다. 힘없이 떨어진 손을 잠시 바라보던 토파즈가 재차 손을 뻗었다.

토파즈의 손이 후드 끄트머리를 파고들었다. 사락, 손끝에 결 좋은 머리칼이 스치고 후드가 벗겨지며 카르옌의 얼굴이 드러났다. 토파즈는 흑백의 초상화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얼굴을 눈에 담으며 물었다.

“숨길 노력은 했고? 카르예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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