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3
“좋아. 약속하지.”
“카르옌.”
카르옌이 별다른 고민도 없이 승낙하자 하란이 발끈하여 끼어들었다. 카르옌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하란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자, 아는 대로 이야기해 봐. 천 년이나 산 노인이라니 뭘 얼마나 알고 있을지 꽤 기대되거든.”
카르옌이 호숫가로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인어가 푸르스름하다 못해 보랏빛으로 물든 입술을 달싹여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 마법사가 있었지. 그는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존재라 수명이 길었지만, 그의 반려는 아니었어. 반려가 먼저 생을 다하자 마법사는 그와 함께 묻히고 싶어 했다.”
“……죽고 싶어 했다는 뜻인가?”
카르옌이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물었다.
“그래. 그는 죽기 위해 자신의 힘을 봉인하는 마법을 만들어냈지.”
인어가 물갈퀴가 달린 손가락을 뻗어 카르옌의 가슴 쪽을 가리켰다.
“지금 네 심장을 옭아매고 있는 그 마법 말이야.”
“…….”
“마나가 고인 곳에는 자연적으로 마수가 태어나지. 그 마법사의 힘은 너무도 강력했기 때문에 어디에 숨기든 그 땅은 마수를 불러 모을 수밖에 없었어. 마법사는 죽고 싶었지만, 다른 인간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는 않았어. 그래서 봉인한 힘을 대륙의 끝과 끝에 숨기고 사람들이 발걸음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야기를 듣던 카르옌의 시선이 진지해졌다. 그 설명이 왠지 낯설지 않았다. 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 아리아 호수였어. 그는 호수 바닥에 힘을 봉인한 보석을 묻어 두었지. 그는 그것을 봉인석이라고 불렀어. 그리고 천 년 뒤 봉인이 자연히 사그라들 때까지, 이곳을 인간에게 잊힌 땅으로 만들었다.”
인어의 등 뒤로 펼쳐진 깊은 호수가 보였다. 전설처럼 아름다웠을 것만 같은 호수는 썩고 오염되어 탁한 빛만을 띠고 있었다.
“호수의 생물들은 그 봉인석을 좋아했어. 호수 아래에서도 반짝거리며 빛이 났거든. 우리는 그것을 아끼고 지켰다. 마수는 우리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고, 우리로서는 이곳에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으니 오히려 기꺼웠다.”
인어의 눈이 허공을 더듬었다. 이미 잃어버린 무언가를 그리워하듯 천천히.
“수백 년이 흐르는 동안, 봉인석 안에 담겨 있던 마법사의 힘은 흩어져 거의 남아 있지 않았어. 얼마 뒤면 그 보석도 그저 평범한 돌이 될 예정이었지. 그런데…… 어느 날 그들이 찾아왔다.”
‘그들’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 인어의 목소리가 격양되었다. 푸르스름한 입술 사이로 언뜻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카르옌이 물었다.
“마법사들 말인가?”
“그래. 스물세 해 전, 그들은 호수 바닥을 모두 말리고 헤집었어. 우리를 죽이고 봉인석을 꺼내 갔다. 호수는 오염되었고, 수명이 길어 천년어라고 불리던 내 동족들은 그날 대부분 죽었지.”
23년 전이라면, 제국력으로 999년이었다. 제국의 혼란이 정점으로 치닫던 시기. 그리고 카르예니프가 초대 황제의 힘을 이은 마법사로 태어나리라는 예언이 전해진 때이기도 했다. 분명 그 예언을 듣고 몸이 단 이들이 이곳으로 찾아왔을 것이다.
“봉인석에는 마법사가 직접 새겨 넣은 마법식이 남아 있었다. 천 년 가까이 흐르는 동안에도 마모되지 않은 강력한 마법식. 그들은 그걸 이용하겠다고 했어.”
그리고 그 이용의 결과가 지금 인어의 눈앞에 있었다. 바로 카르예니프, 자신이었다.
카르옌은 습관처럼 주먹을 쥐었다 펴며 몸을 타고 흐르는 마나를 느껴 보았다. 마나가 충만하게 고여야 할 그릇은 늘 밑 빠진 독처럼 구멍이 나 있었다. 아무리 채우고 채워도 텅 빈 것 같은 감각은 영원히 해소되지 못하는 갈증처럼 카르예니프를 괴롭혔다.
고작 반려와 함께 죽고 싶어서 이딴 미친 짓을 스스로의 몸에 했다고. ……예전이라면 결코 이해하지 못했을 멍청한 짓이었다.
“봉인을 푸는 방법은?”
“간단해. 봉인은 마법사의 힘 대신 온전히 그 봉인석에만 의지하고 있어. 그러니 봉인석을 모두 찾아서 파괴하면 될 거다.”
대화를 듣던 하란이 미간을 좁히며 끼어들었다.
“그런데, 23년 전에 마법사들이 보석을 꺼내 갔다면 결국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소리 아닌가?”
“다시 돌려놓으러 왔었어. 봉인이 실패한 것 같다고……. 그래, 분명 기록에 쓰인 그대로 따르자고 떠들어 댔던 것 같군. 마법사의 힘이 같지 않으니 봉인이 불완전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는데, 인간은 어찌나 그리 오만한지. 그 후 보석은 다시 이십 년 동안 이 호수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어. ……그것도 얼마 전까지의 일이지만.”
“뭐?”
“마법사들이 다시 들이닥쳐 보석을 가져간 게 고작 며칠 전이야.”
그래서 인어가 그들을 보자마자 왜 돌아왔냐고 물은 것이었나.
베르제 외에 양탄자 공장의 다른 마법사들도 봉인과 연관이 있다면 그날 공장을 정리한 뒤 곧바로 이곳에 와서 봉인석을 챙겨간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추격자가 카르옌의 동선을 완전히 파악해 선수 쳤거나. 베르제를 죽이는 순간 어느 정도 각오한 일이지만 막상 덜미가 잡혔다고 생각하니 유쾌하지는 않았다.
“어디로 옮겼는지는 몰라. 내가 아는 건 여기까지다. 다 말했으니 이제 내 소원을 들어줘.”
“네 소원이 뭔데?”
인어가 천천히 헤엄쳐 조금 더 일행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흐느적거리는 머리칼이 물결치며 가려져 있던 한쪽 뺨을 드러냈다. 바싹 마른 뺨이 드러났다. 인어는 새카만 눈으로 카르옌을 올려다보며 청했다.
“나를 죽여다오.”
“…….”
카르옌이 눈썹을 까딱였다. 인어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나는 반인반수가 되었으나 다리가 없기에 뭍으로 나가지 못해. 살기 위해서는 한때 내 동족이었던 것들을 잡아먹어야만 하지. 몇 번이나 스스로 죽고자 했으나 불가능했다.”
인어의 표정 없는 얼굴은 말라붙은 비늘보다 더 생기가 없어 보였다. 잔뜩 지친, 죽지 못해 살아 있는 사람 특유의 얼굴이었다. 카르옌은 인어를 빤히 보다가 말했다.
“……힘의 일부가 네게 있군.”
“그래, 맞아. 마법사들이 무자비하게 호수를 헤집을 때 봉인석에 손상이 갔지. 아주 작은 파편이 떨어져 나와 내 심장에 박혔어. 그래서 내가 물고기도 인간도 아닌 돌연변이가 되어 죽지 못하고 있었던 거야. 나를 죽이면 너는 저절로 원하던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인어는 서로에게 좋은 일이 아니냐며 뺨을 어색하게 움직였다. 굳은 근육으로 미소를 흉내 내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카르옌은 드넓은 호수에 홀로 떠 있는 인어를 바라보았다.
인어의 심장에 박힌 파편을 제거한다면, 카르옌의 평생을 옭아매고 있던 저주 일부가 풀릴 것이다. 카르옌은 저 인어가 살고 싶다고 애원하더라도 심장을 갈라야 하는 입장이었다.
때마침 본인도 죽고 싶다니 잘된 일인데, 왜 이렇게 기분이 가라앉는 것일까. 그의 불행이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죄책감 탓일까. 아니면 내내 죽음을 기다려 온 듯한 저 초연한 얼굴 탓일까.
카르옌이 입을 열었다.
“파편을 파괴하고, 널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해 줄 수 있다면?”
“……뭐?”
인어는 제 귀를 의심하듯 되물었다. 그러나 곧 힘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파편은 심장에 있어. 파편을 파괴한다면 난 죽을 거야.”
“그러니 죽기 전에 살려 주겠다고. 물론 확신하지는 못해. 하지만 내가 힘을 되찾은 후에도 네 숨이 붙어 있다면, 그때 너를 원래 모습으로 되돌려 주겠다고 약속하지.”
“……봉인이 네게 있다면 넌 마법을 쓸수록 괴로워지는 상태일 텐데. 왜 내게 그렇게까지 해 주지?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건가?”
“대단히 자비로운 마음으로 그러는 건 아니니 착각하지 마. 아까 네가 물에 끌고 들어간 내 일행이 잘못됐으면 난 널 이 호수랑 같이 바짝 말려 버렸을 거야.”
“……죽일 생각은 없었어.”
“그랬어야지.”
카르옌이 나직이 대꾸했다. 아까 전의 일을 다시 떠올리기만 해도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시도는 해 볼 테니 그 이후로는 죽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심장이 꿰뚫린 뒤에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도 보장 못해. 난 신이 아니니까.”
“죽어도 상관없다. 괴물이 아닌 내 원래의 모습으로 이 호수에 묻힐 수 있다면…… 난 그것만으로 기쁠 거야.”
인어가 처음으로 미소 비슷한 것을 지어 보였다. 어설픈 미소였지만 기쁜 심정은 절절히 전해졌다. 죽어도 상관없으니 어딘가에 묻히고 싶다는, 그 무의미한 바람을 이해하지 못했더라면 차라리 좋을 뻔했다.
“그래서. 그 파편을 파괴하려면 네 심장을 찌르면 되는 건가?”
“내가 할게.”
묵묵히 대화를 듣고 있던 토파즈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토파즈님.”
카르옌이 염려 어린 시선을 보내 왔다. 토파즈는 무심히 검을 뽑으며 말했다.
“죽이고 싶은 거라면 네가 해도 상관없겠지. 근데 안 죽일 거라며. 넌 네 할 일 해.”
카르옌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럼 맡기겠습니다.”
인어는 토파즈가 물 위로 드러난 자신의 상체에 천천히 검을 겨누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툭, 검 끝이 정확히 가슴 위에 닿았다. 토파즈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그 눈을 좀 감아 볼 수 없어?”
“그건 불가능해. 네가 너한테 없는 지느러미를 움직이지 못하는 것처럼.”
인어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젖은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동그랗고 까만 눈은 여전히 토파즈의 검 끝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럼 손으로 가리기라도 하든가.”
인어는 굳이 왜 그래야 하냐는 눈으로 토파즈를 올려다보았지만, 곧 순순히 말을 들어주었다. 인어가 물갈퀴가 달린 손을 펼쳐 눈가를 가렸다.
“이 악물어.”
푹. 토파즈는 위치를 확인한 뒤 예고 없이 칼을 찔러 넣었다. 어설픈 망설임은 괜한 고통을 낳을 뿐이었다. 수백, 어쩌면 수천 번을 반복한 행위인데도 검 끝이 심장을 가르는 감촉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컥, 크흑.”
심장을 꿰뚫은 검 끝에 무언가 단단한 물체가 닿았다. ‘심장에 박혀 있다’는 말이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토파즈는 검 끝을 비틀어 그 작은 파편을 심장에서 분리해 냈다.
피가 검날을 흥건하게 적셨다. 토파즈는 쓸데없이 살갗을 헤집어 상처를 더 벌리는 대신 곧바로 검을 빼냈다.
왈칵, 피가 터져 나와 순식간에 호수를 붉게 물들였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당장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치명상이었다.
토파즈의 검이 빠져나가자마자 인어의 몸이 힘없이 뒤로 쓰러졌다. 토파즈가 반사적으로 팔을 뻗는데, 뒤로 기우뚱 기울던 인어의 몸이 강제적인 힘으로 다시 천천히 세워졌다.
뒤를 돌아보자 카르옌이 인어를 향해 한 손을 뻗고 있었다. 입속에서 빠르게 몇 가지 주문을 읊조리는 소리가 물이 첨벙이는 소리에 묻혔다.
카르옌은 마치 심장을 손으로 부드럽게 쥐기라도 하는 것처럼 오른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가슴의 상처 안에서 무언가 빠져나와 허공으로 떠올랐다.
고작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얇은 파편이었다. 처음에는 피에 젖어 붉게 보이는 줄 알았으나, 핏방울이 흘러내리며 드러난 부분도 피처럼 짙은 선홍빛이었다.
화륵, 곧 파편에 불이 붙더니 재 한 줌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동시에 카르옌이 크게 휘청였다. 토파즈가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쿨럭!”
고개 숙인 카르옌의 입에서 피가 섞인 기침이 튀어나와 땅을 적셨다.
“카르옌!”
카르옌은 바닥에 검붉은 피를 토해 낸 뒤 손으로 입가를 덮었다. 기침을 토해 낼 때마다 새하얀 손 틈 사이로 핏자국이 번졌다. 토파즈는 카르옌의 허리를 껴안듯 지탱하며 얼굴을 굳혔다. 어떻게 된 거지? 설마 인어가 거짓말을…….
그때 어깨를 짚어 오는 손길이 느껴졌다.
“괜찮, 쿨럭. 저 괜찮습니다.”
카르옌이 굽히고 있던 허리를 천천히 폈다. 이윽고 고개를 들어 올린 카르옌은 입가에 피를 묻힌 채 웃고 있었다. 미소를 매단 창백한 낯이 괴이쩍기보다는 아름답게 느껴져서 더욱 기묘했다.
카르옌이 재차 손끝을 뻗어 인어의 심장께를 가리켰다. 입에서는 아무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지만 마법은 시작되고 있었다.
인어의 꿰뚫린 심장에서 피가 멎고, 살갗이 차올랐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실로 바느질을 하는 것 같았다. 혼절한 채로 고통스럽게 일그러져 있던 인어의 미간이 펴졌다. 반대로 카르옌의 목울대는 크게 울렁였다. 피가 차오르는 것을 애써 참는 듯했다.
그러나 마법은 끝이 아니었다. 카르옌의 발밑으로 마법진이 넓게 펼쳐졌다. 한 인간의 발밑에서 시작된 금빛 마법진은 인어를 감싼 뒤에도 멈추지 않고 호수 전체로 퍼져나갔다.
“무슨…….”
수면이 금빛으로 반짝거리는 호수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했다. 토파즈와 두 기사는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곧 호수를 감싼 마법진이 거두어졌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투명한 에메랄드 색을 되찾은 호수와 물빛 비늘이 아름다운 물고기 한 마리뿐이었다.
푸른 물고기는 일행의 앞에서 동그랗게 몇 바퀴 헤엄치다가 꼬리지느러미를 크게 휘둘렀다. 반짝이는 물방울이 허공을 수놓았다. 이내 푸른 물고기는 호수 깊은 곳으로 헤엄쳐 사라졌다.
또 인간이 나타나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수백 년간 그랬듯 자유롭게 호수를 누비리라. 혹은 이 아름다운 호수의 일부로 돌아가거나.
토파즈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허리에 매달려 있던 팔이 떨어지는 것을 느끼고 퍼뜩 고개를 돌렸다.
“너……!”
겨우 몸을 추스르는가 싶던 카르옌이 옆으로 고꾸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