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
부드러운 살갗이 조심스럽게 포개졌다. 그게 입술이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든 생각은 엉뚱하게도 따듯하다는 감상이었다.
카르옌은 체온이 서늘한 편이었다. 손도 뺨도 만지고 나면 늘 시원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맞닿은 입술은 뜨거웠다. 그게 기묘하게 느껴졌다. 다른 세상에 사는 것 같았던 이 마법사도 인간이라는 사실이.
입술이 홧홧해졌다. 토파즈가 카르옌의 어깨를 쥐었다. 세게 밀어낸다면 떨어지겠지만 힘을 줄 수가 없었다. 어깨가 토파즈보다 더 넓고 딱딱한 놈인데도 첫인상 탓인지 세게 쥐면 부서질 것처럼 느껴지고는 했다.
토파즈가 차마 떼어내지 못하고 어깨만 움켜쥐고 있는 사이, 카르옌은 뺨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가 맞닿은 입술을 살짝 벌렸다. 토파즈의 입술도 자연스럽게 함께 벌어졌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뺨을 간질였다.
온몸에서 가장 여린 살갗을 내어주고 있음을 깨달은 순간 긴장감이 발끝까지 차올랐다.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서로를 헤집을 수 있었다. 입 안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혀끝이 움찔거렸다.
후우, 맞닿은 입술 사이로 숨이 밀려 들어왔다. 깊게 숨을 불어넣은 카르옌은 틈 없이 포개진 입술을 한 번 느릿하게 문지른 뒤 떼어냈다. 뺨에 닿아 있는 손이 살짝 떨린 것 같았다.
뭐…….
토파즈는 멍청하게 물속에서 입을 벌리고 숨을 들이마시는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러나 물이 폐로 밀려 들어와 속절없이 고통스러워지리라는 예상과 달리 몸은 잠잠했다.
‘……?’
금방이라도 다시 입술이 스칠 듯한 거리에서 카르옌과 눈이 마주쳤다. 조금 전에 닿아 있던 입술이 뜨거웠던 탓일까. 내려다보는 눈동자는 시리도록 푸른색이었는데도 기묘한 열감이 느껴졌다.
카르옌이 입술을 벙긋거렸다. 붉은 입술에 시선을 빼앗겨 뜻은 조금 뒤에야 해석할 수 있었다.
‘숨.’
토파즈가 미간을 찡그렸다. 제 말을 못 믿는다고 생각했는지 카르옌이 보란 듯이 코로 숨을 깊이 들이마시는 시늉을 했다. 토파즈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를 따라 숨을 내쉬어 보았다. 이내 폐부로 물이 아니라 신선한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카르옌은 토파즈의 아랫입술을 엄지로 문지르고는 급하지 않게 몸을 떼어냈다. 달라붙어 있던 몸이 떨어지자 잊고 있던 서늘함이 느껴졌다.
‘놀랍게도 저도 수영을 꽤 잘한답니다. 물속에서 숨도 쉴 수 있어요.’
아까 한 말이 농담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의도는 알겠으나 꼭 이런 방식이어야 했냐고 멱살을 붙들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카르옌의 등 뒤로 유영하는 무언가 때문이었다.
토파즈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사실은 자신이 조금 전에 기절했고, 그 이후는 모두 꿈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호수 아래에 사람이 있었다. 아니, 저걸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토파즈가 카르옌의 팔을 잡아 위로 끌어당겼다. 손끝이 얽혔다. 물속에서 숨을 쉬며 헤엄치는 기묘한 경험을 만끽할 새도 없이 다급하게 팔다리를 움직였다. 다행히도 ‘그것’은 그들을 쫓아오지 않았다.
촤악! 거세게 물을 튀기며 두 사람의 몸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메르디나는 검을 뽑아 든 채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고 하란은 이미 무릎까지 호수에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한 몸처럼 엉겨 붙어 수면 위로 떠오른 두 사람을 보고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지나치게 잘 보였다. 아까까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자욱하던 안개가 사라진 덕분이었다.
수면 위로 나온 두 사람은 천천히 헤엄쳐서 뭍에 다다랐다.
“하도 안 나와서 진짜 잘못된 줄 알았습니다.”
“……설마.”
토파즈가 물을 흠뻑 먹어 무거워진 셔츠를 짜냈다. 물이 지저분했던 탓에 꼴이 말이 아니었다. 토파즈가 카르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카르옌은 뺨을 타고 흐르는 물기를 손등으로 대강 닦아내고 있었다. 저 가느다란 손에 구해진 게 벌써 세 번째였다.
“너, 대체 무슨 생각으로 따라 들어왔어?”
“아무 생각 안 했어요.”
“…….”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대답이었다. 한 걸음 다가온 카르옌이 뺨 언저리로 손을 뻗었다. 토파즈는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굳혔다.
“못 했다는 표현이 더 알맞을까요.”
카르옌의 손은 이번에는 뺨을 감싸는 대신 가볍게 목덜미를 쥐어 왔다. 젖은 손이 경동맥에서 펄떡거리는 맥박을 확인하듯 짚은 뒤 목깃부터 어깨까지 쓸고 지나갔다. 이내 무겁게 늘어지던 옷이 말랐다. 물기가 떨어지던 머리칼도, 흙이 엉겨 붙어 있던 손톱 아래도 모두 깨끗해졌다.
카르옌은 그 뒤에야 자신에게도 마법을 걸었다. 언제 물에 빠졌었냐는 듯 멀끔해진 카르옌이 덧붙였다.
“토파즈님도 저를 구하겠다고 대답해 주셨잖아요.”
카르옌이 천천히 입꼬리를 당겼다. 웃으며 돌아서는 얼굴이 그제야 평소와 비슷해 보였다.
“그래서 대체 뭐였어? 호수에 마수라도 사는 거야?”
“마수가 아니라 인어가 있던데.”
카르옌의 대답에 하란이 미간을 구겼다.
“넌 그 꼴로도 농담할 생각이 들어?”
“……농담이 아닐지도.”
메르디나가 호수를 향해 검날을 세웠다. 그곳에는 수면 위로 고개를 빼꼼히 내민 누군가가 있었다. 보이는 것은 얼굴뿐이었지만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코와 입이 모두 물속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잔뜩 엉킨 머리칼 사이로 반쯤 보이는 귀의 모양도 독특했다.
일행이 경계하며 수면을 노려보는데 ‘그것’이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그것의 모습이 점점 드러났다. 여성도 남성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외관에 푸른색이 감도는 머리칼, 사람의 것이 틀림없는 어깨, 그리고 지느러미. 상체는 사람이고 하체는 물고기인 인어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전설 속에서 그려지던 신비롭고 아름다운 인어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상체는 뼈가 다 드러날 정도로 앙상했고 본래 푸른 빛이었을 비늘은 윤기를 잃어 조금도 반짝이지 않았다. 색이 바래고 사이사이에 흙과 이끼가 끼어 지저분한 모습이었다.
거리를 두고 멈춰 선 인어가 물었다.
“왜 돌아왔지? 또 호수를 망치려고?”
적개심이 흘러넘치는 목소리였다.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또’, 그리고 ‘돌아왔다’라는 표현을 들으니 드디어 맞게 찾아왔다는 판단이 섰다. 다만 인어의 경계심이 높아 실마리를 얻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누구로 착각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저희는 오늘 여기에 처음 옵니다. 호수를 망칠 생각 같은 건 전혀 없고요.”
하란의 말에 인어가 꼬리로 물을 거세게 내리쳤다. 호수에 둥근 파동이 퍼졌다.
“거짓말하지 마. 마법사를 데려왔잖아.”
인어의 날카로운 시선이 카르옌을 향했다. 카르옌은 말없이 그 시선을 받아냈다. 갑자기 표정이 변한 것은 인어 쪽이었다. 카르옌의 얼굴을 노려보던 인어가 눈을 홉떴다.
“잠시만, 너…….”
인어가 꼬리로 물살을 가르며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세 검사는 인어가 갑자기 공격이라도 할까 봐 더욱 경계했지만 정작 인어는 조금 전보다 누그러든 얼굴이었다. 이내 인어의 입에서 얼떨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혹시 너야?”
일행을 경계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마치 오랜 친구를 부르는 듯한 아련함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인어는 곧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구불구불한 머리칼이 흔들렸다.
“아니,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죽어서 흙이 되어도 백 번은 되었을 시간인데…….”
인어가 어쩐지 기운이 빠진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는 곧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탄식했다.
“그래……. 넌 그의 후손이구나. 정말 놀랄 만큼 닮았네.”
인어는 계속해서 카르옌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토파즈는 인어가 지금껏 눈을 한 번도 깜빡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엉망으로 엉킨 암청색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새까만 눈에는 눈꺼풀이 없었다. 인간이 아닌 물고기의 특징이었다.
“누구를 이야기하는 거지?”
“네 조상 중 가장 뛰어난 마법사였을 존재 말이야. 겨우 천 년쯤 흘렀다고 그의 이름이 세상에서 지워지진 않았을 테지.”
카르옌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네가 가리키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것 같은데……. 너는 어떻게 그를 알지? 네 말대로 천 년은 전에 죽은 사람인데. 마치 네가 그때부터 살아왔다는 말처럼 들리는 건 내 착각인가.”
“착각이 아니야. 난 그가 젊었을 때도, 죽은 뒤에도 쭉 이 호수에 살았으니.”
“믿기 힘든데. 인어는 불멸하기라도 한다는 거야?”
카르옌의 말에 인어가 코웃음 쳤다. 인어는 물속에 파묻혀 있던 제 팔을 들어 올렸다. 손바닥 사이에는 푸르스름한 물갈퀴가 있었다. 손등을 덮은 비늘은 여기저기 떨어지고 상처가 나 있었다.
“인어 따위가 아니야. 나는 그저 조금 오래 사는 물고기였다. 인간들이 들이닥쳐 날 사람도 물고기도 아닌 괴물로 만들어 놓기 전까지는.”
분노에 찬 목소리였다.
“그게 언제 일입니까? 설마 20년쯤 전?”
하란이 물었으나 인어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듣지도 못한 사람 같았다. 그는 주변에 있는 세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는 듯 카르옌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여기에 왜 왔는지 알 것 같아. 너는 내가 천 년 동안 본 마법사 중 두 번째로 위대하구나. 아마 막 태어났을 때는 지금보다 더 뛰어난 마법사였겠지.”
인어가 카르옌을 보며 눈을 번뜩였다. 희미한 그리움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절실한 욕망이었다.
“이 호수의 일을 나보다 더 잘 아는 존재는 없어. 네가 원하는 이야기도 아마 내가 가지고 있을 터.”
“…….”
“네가 내 소원을 들어준다면, 아는 것을 모두 말해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