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61)화 (61/110)

#061

빗속에서 하염없이 걷기만 한 일행은 육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조금씩 지쳐 있었다.

카르옌에게 봉인 마법을 걸었다는 마법사 베르제의 입에서 나온 ‘동쪽 호수’를 찾아 나선 지 벌써 며칠째였다. 그 사이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의 자취가 짙어졌다. 바람이 서늘해지며 일행의 옷도 두꺼워졌다.

‘단서는 세 가지예요. 저주를 풀려면 동쪽 호수로 가야 한다. 동쪽 호수는 메이온에서 동쪽으로 쭉 가면 나오는 호수다. 하지만 타하라 호수는 아니다.’

카르옌의 정리에 지도를 들여다보던 하란이 손끝으로 몇 군데를 짚었다.

‘메이온에서 동쪽, 타하라 호수 제외……. 그럼 남은 후보는 두 개뿐이야.’

‘동부에는 크고 작은 호수가 꽤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 다 뒤지지 않아도 된다니 그나마 다행이네.’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까지는.

일행은 메이온 동쪽에 있는 두 호수를 찾아갔지만 허탕이었다. 두 호수 중 하나인 미네 호수는 호숫가가 내려다보이는 절벽을 따라 여관이며 식당이 빼곡히 들어선 번잡한 휴양지였다. 반대로 리마누 호수는 근처에 작은 집과 오솔길이 펼쳐져 있는 고즈넉한 마을이었다. 두 호수 모두 흑마법 따위와는 연관도 없어 보이는 평화로운 장소였다.

수상한 사람도, 마법의 흔적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찾아야 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몰랐기 때문에 더욱 막막한 상황이었다. 정말 없는 것인지, 발견하지 못한 것인지조차 판단할 수 없었으니까.

하나의 실마리를 찾은 것은 리마누 호수 인근 마을에서였다.

‘혹시 이 부근에 타하라와 미네, 리마누를 제외한 다른 호수도 있습니까?’

하란의 질문에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어리둥절하게 반응했다.

‘다른 호수? 내가 알기로는 없는데.’

그때 나이 지긋한 노인 하나가 수염을 쓸며 이렇게 말했다.

‘설마 레프 산맥 너머의 아리아 호수를 찾는 건가?’

‘아리아 호수요? 처음 듣는 이름인데요.’

‘거긴 지형이 험하고 마수가 득실거려서 아무도 가지 않는 곳이오. 오랫동안 잊힌 땅이지.’

동부의 끝자락, 레프 산맥과 동쪽 바다 사이에 있는 아리아 호수는 지도에조차 표시되어 있지 않은 곳이었다. 산맥이 막아 주고 있어 마을로 마수가 침입하는 일은 드물지만, 사람들의 발길은 더 드물다고 했다.

‘몇십 년 전에도 호수에 대해 묻는 사람들이 있긴 있었지…….’

‘그게 언제입니까?’

‘내 손자가 태어날 때쯤이었으니, 벌써 20년은 족히 되었을 거요.’

그만큼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이라는 뜻이었지만, 일행은 노인이 덧붙인 말에서 오히려 가능성을 엿보았다. 결국 토파즈 일행은 나침반 하나만 들고 지도에도 제대로 나오지 않은 호수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

산맥을 넘을 때까지는 그나마 양호한 여정이었다. 제국의 북동부를 가로지르는 레프 산맥은 다행히도 북쪽에 비해 동쪽이 훨씬 낮고 완만했다. 그러나 산 아래로 내려오자 세 기사와 마법사 하나가 버티기에도 험난한 환경이 펼쳐졌다.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앞이 잘 보이지 않았고 중간중간 비까지 내렸다. 그런 와중에 수풀 사이에서 마수가 불쑥불쑥 튀어나오니 사람들이 발길을 꺼리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아니, 오히려 수상쩍을 정도였다. 마치 사람의 접근을 막으려는 의도로 잘 설계된 곳 같지 않은가. 평범한 여행자들이었다면 벌써 위험에 빠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제가 보기엔 저희가 이미 호수 지대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아요. 위치상 그래요.”

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하란이 말했다. 토파즈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안개가 아까보다 더 짙어졌고 바닥도 축축했다.

안개는 바로 앞에 있는 일행의 얼굴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어졌다. 발소리와 목소리로만 서로가 낙오되지 않고 무사히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까부터 코끝을 맴돌던 물비린내도 짙어졌다. 그다지 좋은 냄새는 아니라고 생각하며 묵묵히 견디는데, 바스락 소리와 함께 갑자기 달콤한 냄새가 퍼졌다.

고개를 돌리자 카르옌이 역하다는 표정으로 입 안에 사탕을 쏙 집어넣고 있었다. 양탄자 공장에서 만난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고 몇 개 남은 사탕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카르옌은 사탕을 머금어 뺨이 볼록한 채로 물었다.

“토파즈님도 드릴까요?”

“……됐어.”

“호수가 아니라 썩은 물이 고여 있는 게 틀림없어요.”

“녹조가 부패해서 나는 냄새일 거야. 오랫동안 관리가 안 된 것치고 심한 편은 아닌데. 아마 호수가 생각보다 깊은 모양이야.”

산간이나 고지대에 있는 호수는 깊은 경우가 많았고, 깊으면 녹조가 덜 생겼다. 당장이라도 코를 틀어막고 싶다는 얼굴의 카르옌에게는 잘된 일이겠지만 뭔가를 찾아 헤매는 입장에서 좋은 조건은 아니었다.

“헛디뎌서 빠지지 않게 조심해.”

호수의 물은 강처럼 흐르지도, 바다처럼 파도가 치지도 않았다. 안개가 자욱한데 물소리까지 들리지 않으니 생각보다 물이 가까워져도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었다.

“혹시 제가 물에 빠지면 구해 주러 오시나요?”

“그럼 죽게 둬?”

“저와 메르디나, 하란이 모두 동시에 빠진다면 누구부터 구해 주실 건데요?”

“너.”

즉답하자 카르옌이 놀란 눈을 했다. 왜냐고 묻지도 못하고 눈만 크게 뜨는 얼굴을 향해 토파즈가 덧붙였다.

“네가 제일 못 빠져나올 것 같아서.”

“…….”

하란이 이를 악물며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카르옌은 “합리적이시네요…….” 하고 중얼거리더니 입 안에서 사탕을 굴렸다. 반대쪽 뺨이 볼록해졌다.

“놀랍게도 저도 수영을 꽤 잘한답니다. 물속에서 숨도 쉴 수 있어요.”

네가 무슨 동화 속 인어냐는 말이 혀끝까지 차올랐을 때였다.

첨벙. 멀지 않은 곳에서 물이 작게 튀는 소리가 났다. 토파즈가 본능적으로 카르옌의 어깨를 밀쳤다. 동시에 축축한 무언가가 발목을 휘감았다. 곧바로 검을 뽑아 끊어내려 했지만 그것이 토파즈를 끌어당기는 것이 더욱 빨랐다.

“토파즈님!”

뒤에 서 있던 하란과 메르디나가 동시에 손을 뻗었다. 메르디나가 손으로 잽싸게 로브 끄트머리를 붙잡았으나 반대편에서 끌어당기는 힘이 워낙 강한 탓에 옷자락이 찢어지고 말았다.

풍덩! 토파즈는 고작 몇 걸음 만에 호수에 끌려 들어갔다. 호수는 생각보다 더 가까운 곳에 있었다.

순식간에 온몸이 찬물에 잠겼다. 토파즈는 숨을 참으며 물속에서 눈을 떴다. 로브가 위로 붕 떠오르며 시야를 방해했다. 토파즈는 물을 잔뜩 먹어 무거워진 로브를 벗어 던졌다.

그제야 탁한 호숫물이 시야에 담겼다. 그의 발목을 끌어당기고 있는 것은 질긴 덩굴이었다. 물에 빠지면서도 놓치지 않은 검으로 곧바로 잘라냈지만, 다른 방향에서 뻗어 나온 덩굴이 검을 쥔 오른손을 휘감았다. 토파즈는 재빨리 손을 바꾸어 왼손으로 또다시 덩굴을 끊어냈다.

그러는 동안 토파즈의 몸은 점점 밑으로 가라앉았다. 호수는 예상보다 더욱 깊어서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물색도 거의 검은색처럼 느껴질 정도로 탁했다.

아무리 뛰어난 검사라도 익사에는 방도가 없었다. 토파즈는 폐활량이 좋은 편이었지만 그래 봐야 아가미가 없는 한낱 인간이었다. 서둘러 위로 올라가기 위해 헤엄쳤지만 호수 바닥에서 자꾸만 뻗어 나오는 덩굴과 눈앞을 흐리게 하는 흙탕물이 토파즈를 방해했다.

그때 토파즈가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찰나였으나 무언가가 눈에 걸렸다. 저 멀리, 물속 깊은 곳에서 푸른빛이 반짝였다.

꼭 비늘 같았지만 물고기라기에는 꽤 컸다. 먹을 것도 없어 보이는 지저분한 호수에 저렇게 큰 물고기가 살 수 있는 건가?

토파즈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뜬 순간이었다. 물의 흐름이 미세하게 바뀐다 싶더니 머리 위에서 무언가가 내려왔다.

토파즈가 고개를 들었다. 수면 아래로 헤엄쳐 내려오는 사람이 보였다. 수초처럼 흔들리는 새카만 머리칼을 발견한 토파즈의 표정이 굳었다. 카르옌이었다. 다른 두 사람도 아니고 하필이면.

대체 왜 따라 들어온 거야? 말만 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 윽박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로브는 어디다 벗어 던졌는지 카르옌은 얇은 흰 셔츠에 조끼, 단출한 바지 차림이었다. 길게 뻗은 팔다리가 물살을 갈랐다. 팔을 휘저을 때마다 헐렁한 셔츠 소매가 부풀었다가 팔에 달라붙기를 반복했다. 목 언저리에서 무언가 희미하게 반짝거렸다.

물에 빠지기 직전에 인어 이야기를 해서일까. 수평으로 물살을 가르며 다가오는 카르옌은 정말로 동화에 나오는 인어 같았다. 두 사람의 거리가 손끝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웃음기 없이 굳은 얼굴의 카르옌이 토파즈에게 팔을 뻗었다. 그는 토파즈의 양어깨를 붙들고 위로 끌어당겼다. 그러나 그새 토파즈의 다리를 휘감아 오는 덩굴 탓에 움직임이 가로막혔다.

호숫물보다 더 새파랗게 빛나는 눈동자가 싸늘하게 아래를 응시했다. 낯선 얼굴이었다.

토파즈는 그의 팔을 뿌리치려 했다. 이대로 있어 봐야 익사하는 사람이 하나에서 둘로 늘어날 뿐이다. 물론 순순히 죽어 줄 생각은 없었지만, 자신이 수영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 카르옌이 옆에 있어 봐야 신경 쓰이기나 할 뿐이었다.

그러나 카르옌은 어떻게 되어 먹은 것인지 쉽게 밀려나지 않았다. 작정하고 떼어내면 뗄 수 있겠지만 물속에서 하기엔 위험했다.

물속에서 무용해지는 것은 마법사도 마찬가지였다. 주문을 외울 수도 없고, 흔들림 없이 마법진을 그리거나 수인을 맺기도 어렵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토파즈의 눈앞에 있는 것은 주문 한 마디 없이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였다. 토파즈는 카르옌의 손끝에서 꽃처럼 피어난 마법진을 보며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흰 손가락에서 금빛으로 된 둥근 마법진이 뻗어 나왔다. 마법진은 순식간에 카르옌과 토파즈의 발밑을 감싸며 퍼졌고, 수풀은 그 위로 접근하지 못했다.

방해물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토파즈가 이번에는 먼저 카르옌을 끌어당겼다. 최대한 빠르게 헤엄쳐서 올라갈 생각이었다.

슬슬 숨이 모자랐다. 수풀이 사정없이 잡아당겨서 꽤 깊게 내려온 것 같은데, 죽기 전에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토파즈는 초조함을 느끼며 팔로 카르옌의 어깨와 허리를 휘감았다. 젖은 몸이 달라붙었다.

그때 서늘한 손이 토파즈의 양 뺨을 쥐었다.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워진다 싶더니, 무언가 입술에 닿았다. 토파즈가 눈을 크게 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