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
하란은 기가 질린 표정을 지었지만, 곧 주변에 감독관이나 경비원이 숨어 있을지 모르니 둘러보고 오겠다며 자리를 떠났다.
아무튼 몰래 빠져나가는 일은 그른 줄 알았는데 카르옌의 괴짜 마법사다운 면모가 도움이 되었다. 여기서 더 큰 사고를 치고 싶지 않다면 서둘러야 했다.
아이들은……. 토파즈가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겁에 질려 있는 어린 동생들을 다독이던 소년이 말했다.
“저희는 알아서 할게요.”
“…….”
“혼자가 아니니까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예요. 꼭 살아남아서 저 공장의 실체도 알리고 싶고요. 더는 저희처럼 속아서 제 발로 들어오는 아이들이 없도록요.”
자신보다 더 어린 아이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아까보다 다부진 태도였다. 그러나 아이가 또래보다 어른스럽다는 건 기특하기보다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아이답게 굴지 못하는 환경 탓에 강제로 의젓해져야 했다면 더더욱 그렇다.
토파즈가 손을 뻗어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일단 제인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줄게. 같이 가자.”
토파즈와 일행은 아이들을 데리고 언덕을 넘었다. 아이들은 힘든 내색을 하지 않고 꿋꿋하게 걸음을 옮겼다.
토파즈는 걸음을 옮기면서도 꼭 누군가 뒤통수를 당기는 것처럼 뒤를 돌아보았다. 누군가 쫓아올까 봐 걱정해서는 아니었다. 두고 온 것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지나가던 합승 마차를 마주쳐 가장 어린아이들을 태웠다. 체구가 작은 아이들과 보호자 역할의 메르디나를 함께 태워 보내고, 과연 저 공장의 정체를 도시의 경비대나 영주가 전혀 몰랐을지에 대해 생각해 보던 때였다.
코끝에 매캐한 냄새가 스쳤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먼 곳에서 희미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공장이 불타고 있었다.
“둥지를 태우고 흔적을 지우는 쪽을 택했나 보네요. 이렇게 되면 조사관을 파견해도 증거를 찾기 어려워질 텐데 곤란해졌어요.”
토파즈는 매캐하게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마법사들은 알아서 탈출할 것이다. 하지만 지하에 갇혀 있던 사람 중에서는 아직 살아 있는 이들이 있었는데…….
용병 일을 하다 보면 비극을 목격하고도 손을 뻗지 못하는 일이 숱했다. 토파즈는 고작 한 사람이었고 세상에 불행은 너무도 많았다. 때로는 침묵했고 때로는 실패했다.
토파즈는 활활 타오르는 공장을 보며 생각했다. 자신은 영웅도 무엇도 아니다. 이토록 정의롭지 못한 영웅은 없을 테니까.
“……즈님.”
“…….”
“토파즈님.”
뺨을 조심스레 붙잡아 당기는 손에 고개가 저항 없이 돌아갔다. 눈앞에 푸른 빛이 스쳤다고 생각한 순간 이마가 맞닿았다. 긴 속눈썹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카르옌이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새카만 홍채 안에 아름다운 얼굴만이 들어찼다. 머릿속에서 어른거리던 불꽃이 씻겨 나갔다.
“일단 아이들이라도 안전한 곳으로 보내요. 그게 우선이에요.”
“…….”
“네?”
뺨을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토파즈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녹스의 길드장, 탄자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최근 들어 조금의 시간이라도 생기면 늘 몰두하게 되는 생각이 있었다. 말도 안 된다고 여기면서도 빠져들고 마는 어떤 가정이었다.
탄자는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곧 1황자의 호위 기사가 응접실 문을 열어젖혔다. 1황자의 옆에 늘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남자로, 백작 가문 출신에 황립 아카데미 검술부를 졸업한 정예 기사였다.
“전하께서 기침하셨다. 들어가 보도록.”
그는 말을 전하면서도 황자가 용병 따위를 직접 응대하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이런 멸시는 익숙했다. 탄자는 익숙하게 인내하면서도 속으로는 냉소했다.
1황자 무리와 손을 잡은 지도 벌써 5년이었다. 그들이 자신을 포함한 용병을 편리한 도구처럼 이용할 뿐이라는 사실은 진작 알고 있었다.
1황자와 그 아버지인 대공의 숙원을 이루고 나면 용병 길드에 대한 막강한 지원을 약속받았지만, 순진하게 그 약속을 믿지는 않았다. 탄자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아 버렸고 깊이 연관되어 버렸다.
무거운 입은 죽은 자의 입뿐이다. 그 오래된 속담을 모르지 않을 1황자가 언제 자신을 제거하려 들지 모른다. 그러나 탄자도 순순히 당해 줄 생각은 없었다. 이용하는 것은 서로 마찬가지였다.
탄자는 휘장 너머로 보이는 실루엣을 바라보았다. 곧 휘장을 젖히고 금발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색이 옅은 금발이 허리까지 쏟아졌다.
얇은 잠옷 차림에 맨발로 부드러운 양탄자를 밟는 그에게 하인들이 달라붙어 가운에 팔을 꿰어 주고 신발을 신겼다. 1황자는 숨 쉬듯 익숙하게 시중을 받으며 걸음을 옮겼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탄자가 허리를 숙였다. 1황자, 레오나르드 델 카샤프는 대충 손을 휘적이며 소파에 앉았다. 그 뒤로 시립한 시종 중 하나가 머리칼을 빗어 하나로 느슨하게 묶었다. 긴 머리칼에 가려져 있던 마르고 창백한 뺨이 드러났다.
뛰어난 기사로 이름을 알린 황녀와 얼굴은 꽃처럼 아름답지만 기골만큼은 장대한 2황자와 달리 레오나르드는 키만 삐죽하게 클 뿐이었다. 외모는 객관적으로 미남이었으나 맑다기보다는 탁한 암녹색 눈동자가 유약한 인상을 더했다. 물론 겉껍데기와 속내는 전혀 다른 인간이었다.
“차는 됐어. 뭐가 그리 급해 해가 뜨자마자 달려왔는지 들어 볼까.”
“베르제가 사망했습니다, 전하.”
“이런.”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던 레오나르드가 미간을 좁혔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설명해 봐.”
“연구소에 침입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정확한 숫자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지만 최소 4명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침입자를 잡지 못한 마법사들은 연구소를 정리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고 공장을 전소시켰습니다. 그 과정에서 베르제를 포함한 마법사 넷과 민간인 연구원 절반이 사망했다는 보고를 받은 게 오늘 새벽입니다.”
“하필이면 베르제가 죽었다니.”
레오나르드가 손끝으로 소파를 두드렸다.
“공장에서 일하는 어린애들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모두 탈출해 신전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그 침입자들이 도와준 것 같습니다.”
“찾아서 없애. 보고 들은 게 많을 애들이야.”
“네. 알겠습니다.”
탄자가 대답했다. ‘그래도 어린아이들인데요.’, ‘신전과 엮여 있어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따위의 대답은 선택지에 없었다. 눈앞의 남자는 부드러운 눈매와 너그러운 목소리로 치장했을 뿐 자비를 모르는 자였다. 후환을 남겨두지 않는 냉정한 방식은 아버지인 대공과도 무섭도록 닮았다. 레오나르드는 다리를 꼬아 앉으며 개탄했다.
“진작 내 조언대로 경비를 강화하고 애들의 혀를 잘라놨으면 이렇게 귀찮아지는 일은 없었잖아. 내 언젠가 베르제 그자의 오만이 일을 망칠 줄 알았지. 마법사들이란 대개 그래. 세상이 제 편인 줄 알고 마법이 전부인 줄 알지.”
탄자는 은은한 미소를 띤 채 레오나르드의 이죽거림을 흘려들었다. 마법사에 대한 그의 증오는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이교도의 교주보다도 그의 증오가 더 깊을지도 모른다.
“지도를 봐야겠는데.”
레오나르드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종이 지도를 가져와 테이블 위에 넓게 펼쳤다. 검을 쥐어 본 적 없는 부드러운 손끝이 지도 위를 천천히 짚었다.
양탄자 공장이 있던 메이온, 결계를 깬 ‘측정 불가’ 마법사가 나타났다는 베론, 신의 기적으로 신전의 화재가 진압되었다는 소문이 도는 리스타바트.
“아무래도 내 아우가 생각보다 멀리 도망친 모양이야.”
“지금은 메이온을 떠난 것으로 확인됩니다. 다음 목적지는 아무래도 동쪽 호수 인근이 아닐까 싶은데요.”
“목숨줄이 참 질겨서 이젠 존경스러워. 성년식에서 피 토하며 쓰러지는 꼴을 봤을 때는 진짜 죽나 보다 했는데, 아직도 버젓이 살아 있잖아.”
레오나르드가 눈을 내리깔며 천천히 팔짱을 꼈다. 2황자 암살에 또 한 번 실패한 뒤, 레오나르드는 점점 조급해지고 있었다. 여유로운 척하는 태도가 몸에 밴 황족이었지만 행동은 숨겨도 눈빛은 숨길 수 없었다.
황제가 명백히 레오나르드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는 황제가 심어 둔 첩자에게 ‘비밀 공간’을 들킬 뻔하기까지 했다. 이미 어느 정도는 꼬리가 잡혔다고 보는 쪽이 타당했다. 덕분에 오늘 탄자도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복잡한 절차를 거쳐 겨우 레오나르드를 만나러 올 수 있었다.
레오나르드는 그것이 국서 로디언의 부추김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듯했으나 어쨌든 황제의 최종 결정이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세이드 대공을 경계하면서도 1황자와 황녀에게는 무르게 굴던 황제의 마음이 변한 것이었다. 이제 실질적으로 계획을 이끄는 사람은 황제의 오랜 감시에 발이 묶인 대공이 아닌 레오나르드였기에 더욱 위험했다. 이대로라면 거사를 시도하기도 전에 판이 엎어질지도 모른다. 지금 가장 초조할 사람은 레오나르드였다.
“시일을 앞당겨야겠어.”
아니나 다를까, 그의 입에서 예상한 말이 튀어나왔다.
“군사는?”
“예정대로 포탈을 이용하면 당장이라도 보이시는 곳에 배치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대답한 것은 레오나르드의 뒤를 지키고 서 있던 호위 기사였다.
“그래…….”
레오나르드가 턱을 쓰다듬었다. 일견 지루해 보이는 낯이었지만 그 내면은 끈적한 욕망으로 채워져 있을 터였다. 턱을 괴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레오나르드가 맞은편의 탄자를 보더니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탄자. 머리가 짧아졌네.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어?”
탄자가 뺨을 쓸었다. 아직 낯설게 느껴지는 짧은 머리칼이 귀 옆에서 흔들렸다.
“아니요. 전투 중에 손상되어서 자른 겁니다.”
“그래? 오늘 네가 유독 집중을 못하던 것과 관련이 있나?”
“제가 그랬습니까? 송구합니다, 전하.”
“뭔가 신경 쓰이는 일이라도 있는 것 같던데. 한번 말해 봐.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르잖아.”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레오나르드가 느릿하게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계속 말해 보라는 뜻이었다. 탄자는 다소 충동적으로 내내 그의 머릿속에 맴돌던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
“사실은 얼마 전에 옛 친구와 닮은 이를 보았습니다.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싸우는 방식이 매우 흡사했습니다.”
“그럼 그 친구가 맞을 수도 있잖아?”
태연한 대꾸에 저도 모르게 잇새로 웃음이 샜다. 탄자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며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큰일이지요.”
“……?”
“그 친구는 돌아올 수 없는 곳에 있거든요.”
“아.”
레오나르드가 이해한 듯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씩 웃으며 내뱉었다.
“곧 내 아우가 갈 곳 말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