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9
고개를 돌리자 마법사를 기절시킨 카르옌이 말갛게 웃고 있었다. 토파즈는 손바닥을 간지럽히는 숨결에 입술을 덮고 있던 손을 떼어냈다.
카르옌은 반대편 손으로 웬 줄을 쥐고 있었다. 메르디나가 위에서 밧줄이라도 내려줬나 했는데 자세히 보니 꼭 금실로 꼰 것 같은 동아줄이 위에서 당기는 사람도 없이 혼자 팽팽하게 서 있었다.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자 카르옌이 씩 웃었다. 어쩐지 재수 없는 얼굴이었다.
“여러분의 연대가 아름답긴 합니다만, 옆에 훌륭한 마법사가 있는데 참 활용을 안 하시네요.”
“…….”
“진작 말할 것이지…….”
하란이 발자국이 남은 옷을 탈탈 털며 허무하게 중얼거렸다. 물론 카르옌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가 양손으로 줄을 잡자 누군가 위에서 당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몸이 안정적으로 끌어 올려졌다. 어깨를 구겨 가며 환풍구 구멍을 통과한 카르옌이 고개를 쏙 내밀며 웃었다.
“저 제법 쓸모 있죠?”
토파즈가 헛웃음을 흘리던 때였다. 귀를 찢는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렸다. 토파즈는 반사적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복도가 아닌 각 방 안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토파즈가 곧바로 하란에게 턱짓했다. 조금 전 기절한 마법사를 방 안에 넣어서 숨겨 둘까 고민하던 하란은 곧바로 그를 내팽개치고 달려왔다. 밧줄을 잡은 하란이 환풍구 위로 올라갔다.
마지막으로 토파즈가 올라갔을 때는 이미 통로 너머로 그림자가 보였다. 토파즈가 올라가자마자 하란이 뚜껑을 닫았다. 아슬아슬하게 조금 전까지 그들이 서 있던 통로와 이어진 양쪽 복도에서 마법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마법사들 중 하나가 복도에 쓰러져 있는 마법사를 보고 휙휙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도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볼 생각까지는 하지 못하고 2번 복도 쪽으로 뛰어갔다.
“침입을 들켰나 본데요.”
시끄러운 경고음 사이로 하란이 말했다. 토파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밑에 쓰러져 있는 놈이 소리 지른 걸 누가 들었든가, 아니면 아까 그 수배범 놈이 뭔가 수상함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아까 위층에서 기절시킨 마법사들이 깨어난 걸 수도 있어요. 영원히 재워둘 걸 그랬나…….”
카르옌이 농담 같지 않은 소리를 중얼거렸다. 해 온 짓거리를 돌이켜 보니 여태 들키지 않은 쪽이 오히려 기적 같았다.
네 사람은 기척을 죽이며 환풍구를 기어갔다. 중간중간 나 있는 틈 아래로 간혹 마법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실험실 문을 하나씩 열어 보며 정체불명의 침입자를 쫓는 사람도 있었고, 종이와 마석 따위를 가방에 쓸어 담는 사람도 있었다. 누군가는 경고음을 듣고도 성가시다는 듯 귀를 틀어막고 하던 일을 계속하기도 했다.
“어느 쪽으로 갈까요.”
가장 앞서가던 메르디나가 작게 물었다. 갈림길이었다. 아까 확인해 본 결과 왼쪽으로 가서 사다리를 타면 바로 건물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토파즈와 메르디나가 들어온 입구와 정 반대편 외벽과 이어지는 듯했다.
오른쪽은 창고에서 만난 소년이 가르쳐준 길로, 건물 1층 내부로 이어졌다.
토파즈는 고민했다. 지체할수록 건물 밖으로 나가는 일이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마법사들은 이미 건물 내부에 침입자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으니,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으려 들 것이다. 수십 명의 마법사들과 교전이 벌어진다면 아무리 이 인원이라도 무사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소년은 소란이 일어나면 그 틈을 타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탈출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과연 모두가 탈출할 수 있었을까? 이 공장에 있는 아이들이 총 몇 명이나 되지?
추측은 의미 없는 짓이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게 빠를 것 같았다. 토파즈가 입을 열었다.
“너희 셋은 왼쪽으로 가서 바로 밖으로 나가. 나는 1층 상황을 살펴보고 갈 테니.”
“…….”
왜 아무도 대답이 없지? 의아해하던 차에 앞에서 반쯤 기어가던 카르옌이 갑자기 멈추며 상체를 세웠다. 곧바로 멈췄지만 거리가 워낙 가까웠던 탓에 머리와 가슴이 부딪쳤다. 코를 문지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몸을 돌린 카르옌이 물었다.
“1층에 아이들이 있어서 그러시는 거죠?”
“확인만 하려는 거야.”
“정문은 통행패가 있어야만 드나들 수 있어요. 들어올 때는 물론 나갈 때도요.”
토파즈가 미간을 좁혔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빠져나가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아니, 친구와 함께 탈출했다는 제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이들끼리는 다른 통로를 알고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냥 다 같이 가요. 여길 계속 엉금엉금 기어서 가느니 밖으로 나가서 정문으로 뛰쳐나가는 게 빠를 것 같기도 하고요.”
“그냥 여길 더 이상 기어가기 싫은 건 아니고?”
“들켰네요.”
벌써 여섯 번째로 ‘청결’ 마법을 쓰며 대꾸하는 목소리가 능청스러웠다.
결국 일행은 다 함께 1층으로 향했다. 1층 바닥으로 이어지는 환풍구 뚜껑을 열어젖히려는데, 환풍구 옆에서 서성거리는 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메르디나는 날을 세우는 대신 뚜껑을 뜯어냈다. 기척을 숨길 줄 모르는 걸음 소리는 어른의 것이라기에는 너무 작고 가벼웠다. 메르디나를 선두로 총 네 사람이 환풍구에서 튀어 나가자 힉, 겁에 질린 숨소리가 들렸다.
아까 그 소년이었다. 검은 로브 일행을 본 소년이 희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우리야.”
메르디나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하며 후드를 뒤로 젖혔다. 소년이 눈을 크게 뜨며 멈춰 섰다. 얼굴을 알아봤는지 소년이 곧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하아…….”
“왜 아직 여기에 있어?”
뒤이어 나온 토파즈도 후드를 벗으며 물었다. 내부를 밝히던 천장의 램프가 대부분 나가 있었다. 창문 하나 없는 건물 안은 밤처럼 어둑했다. 소년은 떨림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말을 이었다.
“앞쪽의 커다란 문으로는 갈 수 없어요. 저희끼리만 아는 출구가 있어요. 그, 그래서 알려드리려고…….”
“그래서 우릴 기다렸다고?”
토파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위험하기 그지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두려움으로 온몸을 떨면서도 힘껏 고개를 끄덕이는 소년을 꾸짖을 수 있을 턱이 없었다.
토파즈가 말문이 막혀 있는 사이, 메르디나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소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고마워.”
“……!”
눈을 크게 뜬 소년이 어쩔 줄 모르고 허둥거렸다. 조금 전까지 희게 질려 있던 아이의 뺨에 혈색이 돌며 귓바퀴까지 붉어졌다. 토파즈는 귓바퀴를 만지작거리는 소년에게 팔을 뻗었다.
“어디로 가면 되는지 알려 줘.”
무릎 아래로 손을 넣어 한쪽 팔로 들어 안자 소년이 놀라서 어깨를 짚어 왔다.
“다른 애들은?”
“다, 다들 먼저 갔어요. 무슨 경고음이 울리고 나서 감독관들이 전부 나가서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정확히 모르면서 애들만 두고 저들끼리 탈출했다는 뜻이었다. 기대한 적도 없었지만 머리가 지끈거렸다.
“서두르자.”
아이가 말한 출구는 주방에 있었다. 출구라기보다는 개구멍에 가까웠다. 사용한 지 오래된 듯 먼지 쌓인 벽난로 안쪽으로 빛이 내리쬐었다. 왼쪽에 벽돌이 몇 개 빠져 있었다. 어린아이들이라면 충분히, 어른이라면 몸을 한껏 구겨서 통과할 수 있을 만한 작은 구멍이었다.
“이곳에서 오래 지낸 아이들만 아는 곳이에요. 평소에는 벽돌이랑 물건을 쌓아서 숨겨 둬요.”
“탈출로를 아는데, 너는 왜 탈출을 안 했어?”
소년이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혼자서는 탈출할 용기가 없었어요. 도망치다가 붙잡히면 지하로 끌려가거나 검은 마법사들 손에 잡혀가요. 그런 애들을 다섯 명도 넘게 봤어요. 어차피 여기서 나가 봤자 갈 곳도 없고요.”
저절로 탈출을 포기하게 되었다는 소리였다. 그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바가 아니라 입맛이 썼다.
토파즈는 소년을 먼저 구멍 너머로 내보내고 몸을 구겨 빠져나왔다. 어깨에 걸려 벽돌 몇 개가 더 부서졌다.
나오자마자 마법사들과 교전이 펼쳐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공장 밖은 평화로웠다.
한데 뭉쳐 있던 아이들이 뒤늦게 나온 소년을 보고 펄쩍 뛰며 다가왔다. 대부분은 말을 못 했지만 모두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소년이 ‘피터, 너도 말할 수 있게 됐어?’ 하며 놀라서 얼싸안는 모습을 보니 저주가 방금 풀린 아이들도 있는 듯했다.
혹시 보이지 않는 곳에 적이 있는 것은 아닐까 경계하며 주변을 살피는데 카르옌이 말했다.
“마법사들은 아직 없을 거예요. 사실 제가 승강기에 장난을 좀 쳐 뒀거든요.”
승강기는 뭐고 장난은 또 뭔가 싶어 의아하게 쳐다보자 카르옌이 설명을 덧붙였다.
“위층과 아래층을 오가는 조그만 운송 수단 같은 거예요. 원래는 초록불이 위로 올라가는 버튼, 빨간불이 밑으로 내려가는 버튼인데 아까 둘을 반대로 바꿔 놨어요. 너무 느리길래 속도도 시원하게 높이고요.”
“뭐? 대체 언제?”
“아까 내려가면서.”
하란의 경악한 물음에 카르옌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 위로 올라오려고 빨간불을 누른 마법사들은 지금쯤 땅 밑으로 꺼졌을걸요. 지하에 좀 파묻혔다고 죽진 않았겠지만 올라오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거예요. 다른 출입구도 없는 것 같던데, 저처럼 환풍구를 기어서 올라올 만한 열정과 체력을 가진 마법사는 흔치 않거든요.”
환풍구를 통과하는 동안 ‘무릎이 아프다’, ‘저거 혹시 쥐새끼 아니냐’, ‘폐가 썩을 것 같다’라며 내내 궁시렁거린 주제에 제법 뿌듯해 보이는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