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58)화 (58/110)

#058

“……봉인입니다.”

“봉인? 무슨 봉인을 이야기하는지 똑바로 말해.”

베르제가 메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그의 턱이 잘게 떨렸다.

“제 목숨을 보장해 주신다면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반대야. 들어보고 네 목숨줄을 이어 둘 가치가 있는 대답을 한다면 살려 주겠어.”

“초대, 초대 황제가 사용했던 봉인 마법입니다. 어딘가에 기록이 남아 있었다고 하는데 저도 직접 본 적이 없어서 자세히는 모릅니다.”

“그럼 누가 자세히 알지?”

“……저는 세이드 대공 전하께 들었습니다.”

카르옌이 건 마법에 대해 반신반의하는지, 거짓말은 하지 않으면서도 교묘하게 구체적인 대답을 피하고 있었다.

“머리 굴리지 말고 대답만 해.”

하란이 낮게 경고했다. 베르제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주를 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동쪽 호수로 가야 합니다.”

“동쪽 호수가 어딘데. 자꾸 여러 번 묻게 하니 성가시네.”

“메이온에서 동쪽으로 쭉 가면 나오는…… 타하라라는 이름의 호수입, 헉. 커헉…….”

말을 잇던 베르제가 심장을 부여잡았다.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해 낸 그의 몸이 벽을 타고 주르륵 미끄러졌다. 카르옌이 뺨에 튄 피를 대충 닦아내며 안타까운 얼굴로 혀를 찼다.

“이런. 내가 분명 마법을 걸었다고 이야기했잖아, 베르제.”

“어, 떻…….”

숨소리와 다름없는 마지막 말이 잇새로 흘러나왔다. 죽는 순간에도 그런 게 다 궁금하다니 마법사다운 마지막이라고 해야 할까. 카르옌은 베르제의 앞에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추며 답했다.

“그대가 아는 마법이 세상의 전부일 리가 있나. 아직 물을 게 많은데 어리석은 선택을 했군.”

평생 거짓된 가면을 쓰고 살아온 추악한 마법사는 끝내 자신의 거짓말로 숨을 거뒀다. 제법 어울리는 말로였다.

“전하.”

하란이 뒤에서 조용히 불러 왔다. 카르옌은 대답 대신 몸을 일으켜 제 몸을 더듬었다.

저주를 건 마법사가 죽었다. 그러나 카르옌의 몸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그가 기억하는 한 단 하루도 마음대로 따라 준 적이 없는 몸이었다.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나 싶어 다시 한 번 확인했지만 베르제에게서는 어떤 생명 반응도 없었다. 짙푸른 눈이 가라앉았다.

“정말 저주가 아니었나 봐.”

카르옌이 눈을 감았다. 피로한 얼굴이었다.

“시간을 너무 지체했어. 어서 합류하자.”

그때 하란이 대답 대신 카르옌을 향해 손짓하며 문가에 붙어 섰다. 기척이 느껴진 모양이었다. 하란이 손가락 두 개를 폈다가 접었다. 두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닫아 둔 문이 열리는 순간 하란은 상대의 목이 있을 위치에 검을 들이댔다. 그러나 상대는 그대로 걸음을 멈춰 서는 대신 하란의 검을 맞받아쳤다.

가로로 길게 뻗은 검을 아래에서 위로 쳐올리는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충격에 손이 저릴 정도였다. 방심했다면 검을 떨어뜨리고도 남을 기세였다.

하란은 몸을 숨기고 있던 벽에서 나와 재차 검을 휘두르려 했다.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지만 않았더라면.

“검 내려.”

“……!”

문가를 확인한 카르옌이 예의 가증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토파즈는 방 안의 꼴을 감상했다. 환풍구를 타고 오다가 발아래에서 희미한 진동이 느껴지기에 따라 와 봤더니, 한쪽 벽은 갈라져 있고 바닥에는 웬 시체가 있었다.

“얼굴까지 드러내고 뭘 하는 거야?”

“정보를 좀 얻고 있었어요.”

수줍은 듯 웃어 보여 봤자 뺨에는 붉은 피가 튀어 있었다. 토파즈가 손끝으로 피를 닦아냈다. 카르옌은 기다란 속눈썹을 얌전히 내리깔고 얼굴을 내맡겼다.

“수확은 있고?”

“만족스러운 정도는 아니지만요. 더 얻을 것도 없을 것 같아요.”

애써 입꼬리를 당기는 얼굴이 어쩐지 지쳐 보였다. 토파즈가 그 입꼬리를 손끝으로 꾹 짓눌렀다. 카르옌이 의아하게 눈을 들어 올렸다.

“그럼 됐어. 나가자.”

“……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옆에서 메르디나와 하란도 ‘조용히 잠입하자고 하지 않았나?’, ‘난 그러려고 했어.’, ‘네가 잘 말렸어야지.’, ‘내가 무슨 수로?’ 따위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일단 두 사람은 이걸 쓰세요.”

카르옌이 아공간 주머니에 넣어 놨던 검은 로브 두 개를 꺼내 건넸다.

“어디서 났어?”

“지하로 내려오면서 마법사 둘을 마주쳐서 기절시키고 뺏었어요.”

“강도 다 됐네…….”

“제가 아니라 하란이 뺏었는걸요.”

“왜 날 팔아?”

“서두르죠.”

똑같은 로브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네 사람은 다시 둘씩 짝지어 차례대로 복도로 나갔다.

하란과 메르디나가 먼저 나가고 마지막으로 나온 카르옌이 시체가 쓰러져 있는 방문을 마법으로 잠그고 문을 닫았다.

그때 몇 칸 떨어진 방의 문이 벌컥 열리고 누군가 문밖으로 고개만 쑥 내밀었다. 후드가 반쯤 벗겨져 얼굴이 드러나 있었다.

“아까 그쪽에서 소란이 들리던데. 무슨 일인지 아시오?”

실제로는 처음 마주하는 얼굴이었지만 토파즈와 카르옌 모두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몽타주를 내내 들여다봤기 때문이었다.

나이가 들기는 했으나, 분명 지명수배지에 있던 알베르 카툴로였다. 10년째 지명수배 중인 사람치고 오히려 살이 오르고 인상이 폈다. 토파즈가 인상을 찌푸렸다.

“실험을 하다가 작은 폭발이 있었어요.”

카르옌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거참, 조심하지. 근데 거긴 소장님 방인데?”

“네. 한동안 방해하지 말라시네요.”

“방해는 누가 방해를 한다고…….”

궁시렁거리던 알베르 카툴로는 이내 문을 닫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토파즈의 옆에 붙은 카르옌이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꽤 자연스러웠죠?”

“어. 연극배우인 줄 알았다.”

연극 따위 본 적도 없었지만 대충 칭찬하는데, 그 말이 뭐가 그렇게 웃긴지 카르옌이 쿡쿡 웃음을 터뜨리다가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그런데 토파즈님은 어떻게 내려오셨어요?”

“1층에서 지하로 이어지는 환풍구가 있었어.”

“아하.”

토파즈와 메르디나가 뛰어내린 환풍구는 2번과 3번 복도를 잇는 통로 중 가장 끝 쪽 통로에 있었다. 두 사람이 열어 둔 환풍구 뚜껑 너머로 불 한 점 없이 캄캄하고 좁은 통로가 보였다.

“어떻게 올라가죠?”

지하는 층고가 무척 높았다. 아무리 날고 기는 검사라도 발 디딜 곳 하나 없는 공중에서 진짜로 날아오를 수는 없었다.

“내려올 때는 그냥 뛰어내렸는데…… 올라갈 때는 어떻게 올라갈지 아직 생각 안 해 봤어.”

“대책 없기로는 마찬가지네요.”

“누가 지나가기 전에 빨리 움직이자. 하란, 엎드려 봐.”

“예?”

“쟤네가 엎드릴 수는 없잖아.”

토파즈가 메르디나와 카르옌을 고갯짓했다. 넷 중 가장 가벼워 보이는 메르디나와 바닥에 엎드릴 생각이라고는 먼지 한 톨만큼도 없어 보이는 카르옌을 살핀 하란이 빠르게 체념하며 바닥에 엎드렸다. 토파즈가 그 등을 밟고 올라서며 메르디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어깨 위에서 저기까지 뛸 수 있지.”

“예. 그냥 손으로 받쳐 주시기만 해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만.”

“됐어. 안전하게 한 번에 가자.”

다행히 이쪽 복도는 다들 처박혀서 연구만 하는 모양인지 인적이 드물었으나 언제 사람이 지나갈지 알 수 없었다. 이런 꼴을 보였다간 침입자 여기 있다고 외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개를 끄덕인 메르디나가 하란의 등 위에서 몸을 굽힌 토파즈의 어깨를 양발로 밟았다. 천천히 어깨 위에서 균형을 잡고 일어선 메르디나가 가볍게 발돋움했다.

입구가 좁아서 다소 위험했지만, 메르디나는 깔끔하게 입구에 팔을 걸친 뒤 팔 힘으로 몸을 훌쩍 끌어올려 환풍구 안으로 들어갔다.

토파즈가 다음 차례인 카르옌을 바라보았다.

“꼭 저 먼지 구덩이로 가야 하나요? 쥐도 살 것 같은데. 그냥 벽에 구멍을 내서 1층까지 뚫는 건 어떨까요?”

“넌 건물이 무슨 케이크인 줄 알아? 네 포크질대로 가지런히 잘리게?”

아니, 애초에 안 들키고 조용히 나갈 생각은 없는 건가. 토파즈가 황당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손짓했다.

“됐고 빨리 와. 균형 잡을 자신 없으면 목말 태워 줄 테니까.”

“그것도 끌리긴 합니다만…….”

쉿. 토파즈가 손을 뻗어 카르옌의 입을 막았다. 카르옌은 제 입술에 닿은 단단한 손바닥을 보며 눈만 깜빡거렸다.

토파즈가 하란의 등 위에서 뛰어내림과 동시에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필이면 피할 새도 없이 가까운 방이었다. 토파즈가 카르옌을 밀어 벽에 붙게 했다.

“흐음, 흠흠.”

혼자 콧노래를 부르며 통로를 지나가던 검은 로브의 마법사는 무심코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복도에 뭉쳐 서 있는 세 사람을 맞닥뜨리고 말았다.

“……응?”

세 사람을 차례로 훑어보던 시선이 천장으로 향했다. 메르디나는 재빠르게 몸을 숨긴 뒤였으나 뚜껑이 열려 시커먼 구멍을 드러내고 있는 환풍구만 해도 수상쩍기 그지없었다. 하필이면 눈치가 빨랐던 마법사가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

“침입……!”

가장 앞에 있던 하란이 입을 틀어막기 위해 동시에 튀어 나갔다. 그런데 검은 로브가 소리를 지르다 말고 그 자리에서 푹 고꾸라졌다.

하란이 얼떨결에 옷자락을 잡아 일으켜 세웠지만 그는 순식간에 잠에 빠진 것처럼 늘어졌다. 말 한마디 없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일행 중 한 명뿐이었다.

“깜짝 놀랐네요.”

손바닥에 가로막힌 탓에 웅얼거리듯 흘러나온 목소리는 말의 내용과 달리 느긋하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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