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57)화 (57/110)

#057

카르옌은 노마법사의 멱살을 거리낌 없이 잡아 휘두르며 그가 조금 전에 빠져나온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방 안에 들어간 하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가운데에 놓인 손님 응접용 소파와 벽에 붙은 연구용 책상, 그 위에 탑처럼 쌓인 책과 바닥에 널브러진 종이, 벽을 채운 장식장에 진열된 상등급 마석까지. 아카데미 시절 몇 번 들어가 봤던 학장실과 매우 흡사한 구조였다.

한 가지 다른 점은 두툼한 양탄자 대신 바닥에 그려져 있는 커다란 마법진이었다. 검붉게 말라붙은 동그란 마법진 가운데에는 새처럼 보이는 마수의 사체가 피를 머금고 놓여 있었다.

“쥐새끼처럼 숨어서 재미있는 짓을 하고 있었네, 베르제.”

베르제는 카르옌의 목소리를 듣고도 긴가민가한 기색이었다. 후드 아래로 드러난 날렵한 턱선을 뚫어져라 보던 베르제가 설마 싶은 얼굴로 표정을 굳혔다.

“이젠 내 목소리도 못 알아듣겠나?”

카르옌이 한 손으로 로브를 벗었다. 베르제가 기억하는 머리 색과는 다른 차분한 흑발이었지만 잘못 볼 수는 없는 얼굴이었다.

“2, 2황자……!”

베르제는 카르옌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사색이 되었다. 카르옌이 서늘한 눈길로 베르제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평생을 궁금해했지. 내게 저주를 건 사람이 누군지……. 그런데 너였다니.”

“무슨……! 오해십니다, 황자 전하. 저주라니요?”

“이 꼴을 보이고도 감히 오해라고 둘러댈 셈인가. 그렇다면 너는 무슨 연유로 지금 이곳에 있지?”

베르제가 오른손을 꿈틀거렸다. 하란은 그가 허튼짓을 하기 전에 손목을 잘라낼 기세로 검을 뽑았으나, 주름진 손은 제 멱살을 잡은 카르옌의 손등을 천천히 어루만질 뿐이었다.

“전하께서 지금 무슨 오해를 하셨는지 알겠습니다. 진정하시면 모두 설명하겠습니다. 한평생 제국의 충신으로 살아온 저, 미하엘 베르제의 말을 믿으셔야 합니다.”

아카데미 시절 들어 온 것과 조금도 다름없는 자애로운 말투였다. 그러나 카르옌은 동요하지 않았다.

카르옌이 제 손등을 쓰다듬는 베르제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천천히 손목을 쥐고 돌린 그는 소매를 걷어야 드러나는 팔목 안쪽에 새겨진 문양을 발견했다. 요람의 표식인 끊어진 별 문양이었다.

“22년 전, 그대는 수도 마법사단 단장이었지. 물론 내 첫 번째 탄신연에도 참석했었고.”

카르옌은 기억나지 않는 어느 날을 되짚으며 말했다.

“그날 황궁에 출입한 모든 마법사가 의심 대상이었고 그대도 예외는 아니었어. 난 그 의심을 한 번도 거둔 적이 없네. 하지만 수도 마법단장과 아카데미 학장을 역임한 자가 정말로 흑마법사였다니, 충격이 없다고는 말 못 하겠는걸. 그대를 신임한 폐하께서 아시면 정말 슬퍼하겠어.”

“전하. 저는 정말로…….”

“누가 시켰지?”

자신의 말을 전혀 믿을 기색이 없는 카르옌을 본 베르제가 초조한 얼굴로 입술을 짓씹었다.

“괜한 걸 물었네. 어차피 네 입에서 나올 이름은 하나뿐일 텐데. 일리야 세이드. 그렇지?”

일리야 세이드. 황제와 이혼한 전(前) 국서이자 1황자, 황녀의 아버지였다. 카르옌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자이기도 했다.

카르옌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베르제가 애써 그려내고 있던 인자한 얼굴을 거둬내며 입술을 달싹였다.

“은빛 창!”

긴 은빛 창이 카르옌의 등 뒤에서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러나 날카로운 창끝은 카르옌에게 닿기도 전에 하란의 검에 가로막혔다.

콰광! 짧은 순간 펼쳐낸 마법의 위력이 어찌나 거셌는지 하란조차 한 걸음 뒤로 밀려났다. 날아가 처박힌 창이 벽에 금을 낸 뒤에 스러졌다. 연구실이 뒤흔들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이제라도 본색을 드러내니 반가울 지경이군.”

카르옌이 한쪽 입꼬리를 당겼다.

“양손 어깨 옆으로 들어. 전하는 뒤로 물러서십시오.”

하란이 베르제의 목에 날카롭게 벼려진 검을 겨누며 말했다. 베르제는 하란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듯 후드 아래로 살짝 드러난 하관을 응시했지만, 망설임 없이 목에 닿는 서늘한 검날에 천천히 양손을 들어 올렸다.

마법사의 두 손과 입을 자유롭게 놔두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카르옌은 대수롭지 않게 손을 내저었다.

“걱정 마. 네가 막을 줄 알아서 안 피한 거니까.”

하란도 카르옌이 다른 검사도 아닌 마법사에게 당하는 모습은 상상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베르제의 목에 겨눈 검을 치우지는 않았다. 고집스러운 모습에 카르옌이 어깨를 으쓱였다.

“베르제. 아카데미에 다닐 때 내가 개발한 마법 기억하나? 거짓말을 탐지하는 마법 말이야. 그때 그대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지. 생명을 해치는 마법을 함부로 쓰지 말라고. 전시가 아니면 용납될 수 없다고.”

회심의 한 수에 실패한 베르제는 대꾸하지 않고 핏발 선 눈으로 두 사람을 살폈다. 하란이 검으로 그 목을 가볍게 툭 건드렸다. 베르제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기억합니다.”

카르옌이 느긋하게 손을 뻗어 베르제의 왼쪽 가슴 위를 짚었다. 심장이 뛰는 자리였다.

“그렇다면 이것도 기억했어야지. 내 전쟁은 이미 시작된 지 오래라는 걸. 다름 아닌 자네 덕분에 말이야.”

베르제는 흠칫하며 경계했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적어도 눈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지금 그대에게 그 마법을 걸었어.”

“무슨…….”

카르옌은 주문을 외우지도 손으로 수인을 맺지도 않았다. 코앞에 있던 베르제가 그것을 보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허세로 치부하고 무시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그러니 심장이 펑, 터지고 싶지 않다면 진실만 이야기하는 게 좋을 거야.”

싸늘한 눈빛과 달리 장난스럽게까지 느껴지는 말투였다. 베르제가 침을 삼켰다.

“이 역겨운 공장도 세이드의 작품인가?”

카르옌은 방 한구석에 쌓여 있는 마석 더미를 턱짓하며 말했다.

“저 마석 한 덩어리가 얼마짜리인지 내가 아는데, 마법사들이 돈을 제법 번다고 해도 이 규모는 납득이 안 되거든. 뒤를 봐주는 사람이 없다면 말이야.”

“……흡.”

“대답 안 할 거야? 심장 터질까 봐 무서워서 그래? 아니면 충성심 때문인가. 늘 중립을 표방하는 척하던 그대가 이렇게 충성스러운 자인 줄은 몰랐어. 마법사가 아니라 연극배우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카르옌의 빈정거림에 베르제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연기뿐이었다면, 수도 마법사단장 자리에 오르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럼, 그 이후에 변절했다?”

“……전하께서 태어나시기 몇 년 전 일입니다. 제 목숨을 살려 준 은인에게 은혜를 갚았을 뿐입니다.”

이야기를 들은 카르옌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쩌다 죽을 뻔했는데? 애초에 널 죽이려 한 게 그 여우 같은 자라는 생각은 안 해?”

“……당시에는 못했지만, 지금은 합니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한때 최고의 마법사라는 소리를 듣던 그대가 그렇게까지 어리석었다면 실망스러울 뻔했어.”

‘한때 최고의 마법사’라는 말을 듣는 베르제의 뺨이 미세하게 실룩거렸다. 그 움직임을 본 카르옌이 고개를 기울였다.

“아. 혹시 나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도 있던 건가? 태어나자마자 ‘최고의 마법사’ 칭호를 뺏어간 건 미안하게 됐어. 내가 원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베르제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무언가 참는 듯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카르옌이 피식 웃었다. 아카데미 시절에도 어딘가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던 그에게 호감을 품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나이가 쉰 살은 차이 나는 제자를 시기해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고루한 인간인 줄은 미처 몰랐다.

“일리야 세이드가 널 자유롭게 살게 뒀을 리가 없는데, 넌 어떻게 여기에 와 있지? 이곳에 뭔가 더 있나? 난 솔직히 그자가 내게 저주를 건 마법사를 어디 가둬 놓고 숨만 붙여 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

“한때 목숨 바쳐 수도를 지키고, 내게도 스승이나 다름없었던 자에 대한 예우로 기회를 주고 있는데 영 협조를 안 하는군. 그냥 그대를 죽여서 저주를 푸는 게 낫겠어. 안타깝지만 내 인내심이 스무 해를 버티고도 더 참을 정도로 길진 않네.”

“그건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전하.”

베르제가 입을 열었다.

“전하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전하의 탄신일에 마법을 걸었습니다. 그 대가로 무엇이든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도록 지원받은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제가 죽어도 변하는 건 없습니다.”

“지금 날 우롱하는 건가?”

저주는 저주를 건 마법사가 죽으면 풀린다. 마법을 잘 모르는 이들도 아는 기본 상식이었다.

“결코 아닙니다. 전하 말씀대로 제 목숨에 전하의 저주가 달려 있다면…… 제가 이토록 자유롭게 살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카르옌이 인상을 찌푸렸다. 마법사의 그릇을 훼손하는 방법이 저주 외에 무엇이 있단 말인가. 금지된 마법을 비롯해 웬만한 마법은 모두 알고 또 사용할 수 있는 카르옌이었다.

“저주가 아니라면 뭐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