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6
“봤지, 하란? 멍청한 마법사가 얼마나 많은지.”
“그건 저 말고 토파즈님께나 말씀하세요.”
수면 마법에 걸린 마법사는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카르옌은 문을 밀며 쓰러지는 마법사의 뒷덜미를 붙잡아 뒤로 당겼다.
수상함을 느끼고 두 사람을 유심히 바라보던 다른 한 명은 이미 하란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고 기절한 뒤였다.
카르옌은 어리석은 마법사가 대신 열어 준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계단이 보이거나 다른 공간이 펼쳐지리라 생각했으나, 나타난 것은 사람 서너 명이 겨우 서 있을 수 있을 법한 네모난 공간이었다.
카르옌은 이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마법사의 탑. 흔히 마탑이라고 불리는 대륙 최고의 마법 연구 기관에도 비슷한 장치가 있었다.
기절한 두 마법사를 아무 방 안에 집어넣고 이불까지 잘 덮어 주고 돌아온 하란도 문 너머를 보더니 혀를 찼다.
“마법사들이 만든 공간이 확실하네요. 계단 오르내리는 것도 힘들어서 이런 운송 수단을 만드는 인간은 비쩍 마른 마법사 노인네들뿐이잖아요.”
“힘든 게 아니라 싫은 거야. 연구에 미쳐서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하는 이들이니까.”
카르옌은 네모난 승강기 안으로 발을 들였다. 벽에는 초록색과 붉은색의 두 가지 버튼이 있었다. 그 아래에는 동그란 홈이 패여 있었는데, 크기며 형태가 눈에 익었다.
카르옌은 붉은색 버튼을 누르고 주머니에서 통행패를 꺼내 그 틀에 맞게 끼웠다. 정답이었는지 붉은색 버튼이 몇 번 점멸하더니 덜컹, 승강기가 아래로 움직였다.
“마탑 물건이 낫네.”
느린 주제에 덜컹거리는 소음이 심하고 탑승감도 별로였다. 하란은 손가락으로 한쪽 귀를 막으며 투덜거렸다.
“계단이었으면 벌써 뛰어서 도착했겠어요. 그런데 이렇게 닮다니, 여기에 마탑 출신 마법사가 있다는 뜻일까요?
“출신이 아니라 현직일지도.”
“설마요. 마탑 마법사가 뭐가 아쉬워서 이런 곳에……. 잠깐, 근데 이 밑에 뭐가 있는지는 알고 내려가는 겁니까?”
승강기 버튼을 만지작거리며 콧노래를 부르던 카르옌이 입을 열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예?”
“나도 처음 와 보는데. 그냥 가 보는 거지.”
하란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이마를 짚었다.
“이러려고 저 데려오셨죠? 몸 안 사리고 막 나가려고.”
“정답.”
카르옌의 대답과 동시에 덜컹거리던 소리가 멎었다. 다행히 내릴 때는 탈 때와 달리 별다른 암호가 필요 없는지 저절로 문이 열렸다. 하란은 반사적으로 카르옌의 앞에 서며 몸으로 그를 가렸다.
카르옌이 피식 웃었다. 입으로는 툴툴거리면서도 중요할 때는 대신 죽어 줄 것 같은 충직함 때문에 데려왔다는 말은 굳이 해 줄 필요 없을 듯했다.
문이 열리는 순간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꽃향기였다. 공장 뒤의 언덕에 피어 있던 리라 꽃 향기가 이곳에서도 짙게 풍겼다.
그런데 리라 꽃이 이 계절에도 피던가? 카르옌은 평소 전혀 관심을 가져 본 적 없는 문제를 떠올렸다가 지워냈다.
눈앞에 드러난 지하 공간은 완전히 다른 세계 같았다. 으스스하고 어두침침한 공간이 나타나리라 예상했으나 막상 펼쳐진 풍경은 나무를 파서 지은 아늑한 도서관 같은 공간이었다.
반원으로 된 공간의 둥근 면은 책장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층고가 2층에 가깝게 높았는데 천장 높이까지 책장이 이어져 있었고 그 위로 올라가기 위한 사다리도 놓여 있었다.
중간중간 놓인 책상에는 검은 로브를 쓴 이들이 앉아 있었다. 책을 펼치거나 무언가를 바쁘게 적어 넣는 인원은 어림잡아도 열 명이 넘었다.
카르옌과 하란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책을 고르는 척하며 주변을 살폈다. 하란이 미간을 찌푸렸다. 위층을 양탄자 공장으로 위장하고 있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마치 평범한, 정말로 학구열 넘치는 마법사들의 연구 기관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감상은 곧 깨졌다.
반원 형태 공간의 직선 부분에는 커다란 세 개의 나무 문이 달려 있었다. [1], [2], [3] 으로 차례대로 숫자가 붙은 나무 문 너머로는 쭉 뻗은 통로가 보였다. 안은 모두 이어져 있는 듯 조금 전에 1번 문으로 돌아간 사람이 2번 문으로 나오기도 했다. 방음 마법이 걸려 있는지 그 안의 소음은 물론 문이 여닫히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카르옌과 하란은 눈짓을 주고받으며 1번이라고 쓰여 있는 문으로 다가갔다. 앞서 걸어가는 마법사를 따라 자연스럽게 문을 통과했다.
그리고 문 하나를 통과한 순간 평화는 깨졌다. 쇠가 끌리는 소리와 짐승의 으르렁거림, 사람의 비명이 귀를 덮쳤다. 매캐한 냄새와 피 냄새 위로 인위적일 정도로 짙고 달콤한 꽃향기가 맴돌았다.
일직선의 통로를 따라 왼쪽으로는 작은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아마 2번 통로로 이어지는 듯한 복도가 열 걸음에 하나씩 나타났다. 통로와 통로 사이가 무수한 ‘H’ 형태로 이어져 있어 꼭 거미줄 같았다.
왼쪽에 늘어선 방들은 문에 한 뼘짜리 창이 하나씩 나 있어 누구나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작은 창 너머로 보이는 방은 구조 자체는 깔끔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감상이 달라졌다.
어떤 방에는 족쇄에 묶인 마수나 마수의 사체가 있었고, 다른 방에는 사람이, 또 다른 방에는 마수와 사람이 함께 있었다. 마치 감옥이나 실험실 같았다.
“생명 반응 없음.”
“또 실패네. 제물 방으로 옮겨.”
잠깐 지켜봤을 뿐이지만 무슨 짓을 하는지 대충 감이 왔다. 그들은 마수에게서 피를 뽑아내 사람에게 주입하거나, 마수의 신체 일부와 장기를 사람에게 이식하고, 마수에게 검보랏빛 액체가 든 정체불명의 주사를 투약하기도 했다.
이곳이야말로 공장 같았다. 재료가 물건이 아니라 생명체일 뿐.
2번 통로의 모습은 1번과 비슷했지만 마수는 없고 사람만 있었다. 3번 통로의 모습은 조금 달랐다.
문에 창이 달려 있지 않아서 안이 보이지 않았고 훨씬 인적이 드물었다. 복도 곳곳에 마법진이 그려진 종이 낱장 따위가 떨어져 있었다. 평범한 잉크로 그린 것도 있었지만 검붉게 말라붙은 정체불명의 액체도 있었다.
역겨운 광경이었다. 평범한 도시의 조금 수상쩍은 공장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으리라고는 차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카르옌도 하란도 멈춰서서 경악하거나 헛구역질을 할 만큼 심약하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확인한 인원만 삼십 명을 넘어섰다. 모두가 마법사는 아니었다. 1번 통로 실험실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 비마법사였다.
이것은 개인이 건드릴 수 있는 규모가 아니다. 그렇게 판단한 하란은 카르옌에게 당장 다시 지상으로 올라가자고 말하려 했다.
그때 두 사람이 조금 전 지나친 방문이 열렸다. 뒤에서 들리는 걸음 소리는 셋이었다. 그중 둘은 그들이 이미 지나온 반대 방향으로 향했지만 나머지 하나는 하란과 카르옌의 뒤를 따라왔다.
“이보시오.”
“…….”
뒤따라오던 이가 갑자기 목소리를 냈다. 나이가 지긋한 노인의 목소리였다. 3번 복도에는 그들뿐이었으므로 다른 사람을 불렀을 리는 없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하란과 카르옌은 못 들은 체하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왜 그쪽으로 가지? 그 문으로는 나갈 수 없는데.”
하란은 속으로 욕을 삼켰다. 3번 문으로는 나갈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한 명뿐이니 어떻게든 때려눕힐 수 있겠지만 소란을 피우면 불리했다. 이곳에는 마법사 수십 명이 있었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이 건물 어딘가에 있을 메르디나와 토파즈까지 위험해질 터였다.
하란은 카르옌 역시 그 사실을 알기에 최대한 조용히 일을 넘기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하란의 뒤를 따라오던 단정한 걸음 소리가 멎었다. 하란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제발 얌전히 있어, 카르예니프……. 속으로 이를 갈면서도 손은 착실하게 검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예민하게 벼려진 하란의 귀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란은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그 웃음소리의 주인은 카르옌이 맞았다.
“자네, 지금 뭐……!”
하란이 다급하게 뒤를 돎과 동시에 쿵, 무언가 벽에 처박히는 소리가 났다. 카르옌이 검은 로브의 멱살을 쥐고 벽에 처박는 소리였다. 하란은 오랜만에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구는 카르옌 탓에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몸은 곧바로 튀어 나갔다.
그리고 카르옌이 멱살을 쥔 마법사의 후드를 완전히 벗겨 낸 순간에는 그가 왜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는지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잘 아는 얼굴이었다.
수도를 수호하는 두 날개 중 하나, 수도 마법사단의 전(前) 단장. 그리고…… 두 사람이 다니던 황립 아카데미 학장이었던 마법사, 미하엘 베르제였다.
하란이 어느 날의 기억을 되짚었다.
‘하란.’
‘아, 베르제 학장님.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웬일로 혼자구나.’
‘하하, 네. 제가 카르예니프와 함께 있지 않아서 아쉬우신 모양입니다. 조금 서운한데요?’
‘티 났니?’
노마법사는 짧게 기른 흰 수염을 습관처럼 쓸며 허허 웃었다.
‘나야 물론 하란 네게도 기대가 크지만, 내가 요즘 그분께 열심히 매달리고 있지 않니. 다음 대 학장까지는 감히 바라지도 않으니 우리 연구실에 자리 하나만 마련해 주고 싶은데……. 늘 코웃음만 치시니 이 노인네 속이 타.’
미하엘 베르제는 평민 출신으로서는 겨우 세 번째로 수도 마법사단 단장의 자리에 올랐는데, 은퇴 후 황립 아카데미 학장직에 추천받아 재직하다가 세 사람이 졸업반이던 때 임기를 마치고 조용히 은퇴했다.
어느 세력에도 자신을 의탁하지 않은 채 청렴하고 강직하게 임무를 수행해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는 마법사였다. 카르옌이 그를 성가시게 여겨 하란도 특별히 따른 적은 없었지만…….
‘네가 알고 지낸 마법사 중 한둘쯤은 집에서 사람 죽여다가 그 피로 마법진을 그리고 있을지도 몰라.’
그렇다고 해도 설마 흑마법과 연관된 이일 줄은 몰랐다.
추악한 민낯을 포장하는 일은 왜 이토록 쉽단 말인가? 하란은 허탈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