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55)화 (55/110)

#055

창고로 들어서는 발걸음 소리는 힘없고 무거웠다. 토파즈는 양탄자 너머로 고개를 슬쩍 내밀었다. 때마침 그가 숨은 양탄자는 붉은 바탕에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것이라 그의 머리카락을 어려움 없이 숨겨 주었다.

들어온 것은 두 명의 아이였다. 비죽 마른 소년과 소녀가 자신들 몸집만 한 양탄자를 들어 옮기고 있었다.

토파즈는 메르디나에게 오른쪽을 턱짓했다. 메르디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양탄자를 걸기 위해 움직이던 두 아이의 입이 동시에 틀어막혔다. 툭, 양탄자를 놓친 아이들이 버둥거렸으나 그 힘은 안타까울 만큼 미약했다.

“쉿.”

토파즈가 작게 속삭인 뒤 입이 틀어막힌 소년의 몸을 돌렸다. 그리고 두 아이의 앞에 자신의 모습을 천천히 드러냈다.

“괜찮아. 해 안 끼쳐.”

빈말로도 나쁜 사람 아니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지만, 아이들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없었다.

토파즈가 후드를 살짝 벗어 얼굴을 드러냈다. 딱히 인상이 좋은 얼굴은 아니었으나 음침하게 얼굴을 가리고 있는 쪽보다는 신뢰가 가길 바랄 뿐이었다.

만약의 경우에도 메르디나보다는 자신의 얼굴이 팔리는 게 낫다는 판단도 있었는데, 곧 메르디나도 덩달아 후드를 벗는 바람에 별 소용은 없어졌다. 아이들이 눈을 크게 떴다.

“조용히 하기로 약속하면 놓아줄게.”

유괴범 같은 대사를 지껄이자 토파즈의 손에 붙잡혀 있던 소년이 덜덜 떨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토파즈는 아이의 입에서 천천히 손을 떼어내고 주머니를 뒤졌다. 종이에 감싸인 네모난 초콜릿 두 개를 꺼냈다. 의도는 모르겠지만 카르옌이 심심하면 먹이 숨기는 다람쥐처럼 토파즈의 주머니에 하나씩 넣어 놓는 것이었다.

아이들의 입에 초콜릿을 까서 넣어주자 아이들은 입 안에 들어오는 게 무엇인지 몰라 잠시 버둥거리다가 곧 얌전해졌다. 입 안에 퍼지는 충격적인 단맛에 압도된 것처럼 보였다.

자신도 처음 초콜릿을 먹었을 때 저랬다. 카르옌이 갖고 다니는 초콜릿은 단맛만 나는 싸구려 초콜릿도 아니니 충격이 더욱 클 것이었다.

두 아이는 어렸지만 그래도 여기에서 본 아이들 가운데서는 제법 나이가 있어 보였다. 특히 소년 쪽이 그랬다.

“몇 살이야?”

“…….”

두 아이는 모두 대답하지 않았다. 소년은 눈을 내리깔고 시선을 피했고, 소녀는 눈치를 살피다가 양 손가락을 펼쳤다. 열 살이라는 뜻 같았다. 설마…….

“너희도 말을 못해?”

“…….”

두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낭패였다. 토파즈는 두 아이 대신 양탄자를 걸어 주고 있는 메르디나에게 말했다.

“이곳 아이들 모두 제인이랑 똑같은 저주가 걸려 있나 본데.”

“제, 제인?”

그때 새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냈던 소년이 헙, 소리를 내며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옆에 서 있던 소녀가 황급히 소년의 옷자락을 당기며 입을 벙긋거렸다. 소녀는 진짜로 말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았고, 소년은 일부러 못하는 척한 것 같았다. 토파즈가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넌 어떻게 말을 할 수 있지?”

“제, 제인이…… 살아 있나요?”

소년이 낮게 쉰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부터 말해 달라는 뜻이었다. 겁에 질려 몸을 오들오들 떨면서도 재차 묻는 모습을 보니 제인과 친한 사이인 모양이었다. 소녀의 눈가에도 눈물이 글썽거렸다.

“잘 있어. 아마 지금쯤 배부르게 밥 먹고 자고 있을걸.”

“다, 다행이다. 죽은 줄로만…….”

소년이 눈시울을 붉혔다. 그럼에도 끝내 눈물을 보이지 않고 마른 눈가를 소매로 벅벅 닦았다. 토파즈는 무심코 아직 젖살이 덜 빠진 뺨을 쓸어 주며 물었다.

“이곳 아이들은 다 말을 못 하는 게 아니었어?”

소년은 묻고 싶은 게 많은 얼굴이었지만 꾹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못 해요. 공장에 들어오는 아이들은 모두 특별한 약을 먹어야 하는데, 먹으면 말을 못 하게 돼요. 그런데 아주 가끔 갑자기 말문이 트이는 애들이 생겨요. 몇 명씩만요.”

소년은 반년 전부터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감독관이라고 불리는 감시자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입을 꾹 다물고 숨겨 왔다. 제인을 비롯한 소수의 아이만 비밀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아마 제인과 비슷하게 저주를 펼친 마법사가 죽으면서 저절로 저주가 풀린 아이들이 종종 생기는 듯했다.

“넌 몇 살이야?”

“열두 살이에요.”

어린 나이에 불법적인 일자리를 구하러 모여든 아이들일 것을 감안하면 이 공장에 있는 아이들은 대부분 열세 살 미만일 터였다. 이 소년이 거의 최연장자라고 봐야 했다.

“제인은 이곳에 지하가 있다고 하던데. 지하로 가는 길이 어디 있는지 알아?”

이곳에서 일한 지 3년이나 된 제인은 종종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것을 들었다고 했다. 소리의 원인을 찾기 위해 몰래 공장 안을 돌아다니다가 이 공장 지하에 숨겨진 공간이 있고, 가끔 마주쳤던 까만 로브를 쓴 마법사들이 그곳을 드나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이가 차서 그만뒀거나 버티지 못하고 도망쳤다고 생각한 아이들이 그들과 함께 지하로 가는 모습도 몇 번이나 봤다고 했다.

소년과 소녀가 동시에 입을 다물고 시선을 교환했다. 아직 어리지만 척박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눈치가 기민하기 마련이었다. 토파즈는 이 아이들이 살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불씨를 당겼다.

“여기서 나가고 싶지?”

“…….”

“지하로 가는 길을 알려 주면 너희도 나갈 수 있게 해 줄게. 우릴 도와줘.”

소년은 쉽게 용기가 나지 않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옆에 있던 소녀와 눈을 마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재차 토닥인 아이의 뺨에서는 희미한 초콜릿 향기가 났다.

* * *

한편, 카르옌과 하란은 검은 로브 일당에게 빼앗은 통행패를 사용해 출입구를 통과했다. 그 뒤로는 누구의 저지도 받지 않고 당당히 공장 안을 누볐다.

공장 안은 실제로 노동이 이루어지는 공간보다도 별 쓸모 없어 보이는 텅 빈 복도 따위가 차지하는 공간이 더 많아 보였다. 거미줄처럼 이어진 복도는 복잡하기는 했으나 지키는 사람 하나 없이 허술했다.

간혹 지나가다가 마주친 아이들과 감독관도 로브를 뒤집어쓴 카르옌과 하란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누가 봐도 이질적인 그들의 존재가 이 공장에서는 낯설지 않다는 뜻이었다.

복도를 지나던 카르옌은 어떤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지금껏 지나친 문과 전혀 다를 바 없이 평범해 보이는 나무 문이었다. 처음에는 문이 보이면 일일이 열어젖히던 하란도 먼지 쌓인 창고나 침대가 유독 작다는 것만 빼면 평범한 숙소 따위가 연달아 나오자 지쳐서 포기할 무렵이었다.

“뭐가 있습니까?”

카르옌은 대답 대신 손을 뻗어 문 위의 나뭇결을 더듬었다.

“마법진이 그려져 있어.”

정문을 통과할 때처럼 통행패를 대고 마나를 주입해 봤지만 문은 미동도 없었다.

“허술하게 관리되는 이유를 알겠네. 이 앞에서 특정한 마법을 써야만 지하로 내려갈 수 있는 거야.”

마법사가 아니면 진입을 시도조차 할 수 없는 구조였다. 경비병 하나 세워 놓지 않은 이유는 허술함이 아니라 오만함 때문인 듯했다.

“어떤 마법인지 알 수 있습니까?”

“마법진 여러 개가 중첩되어 있어서 파악이 불가능해. 미리 정해 둔 약속에 따라 주기적으로 바뀌는 방식일 거야.”

“파훼는요.”

“어렵진 않지만 시간이 걸려. 함부로 건드렸다간 다른 장치가 발동할지도 모르고.”

“함정 같은 거 말입니까?”

“대충 그럴걸. 나라면 이 공장이 통째로 불타는 장치 정도는 해 놨을 것 같은데.”

“그건 전하시고요…….”

그때 하란이 카르옌을 문에서 떨어뜨려 제 어깨 뒤로 숨겼다. 곧 복도를 울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하란이 로브 아래에 숨긴 검집에 손을 얹었다.

이내 복도 저편에서 나타난 것은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두 마법사였다. 공장에 잠입한 뒤 처음으로 맞닥뜨리는 상황이었다.

“뭐야. 왜 그러고 서 있어요?”

두 마법사가 걸음을 멈춰 서며 물었다. 아직은 의아해하는 기색일 뿐 의심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시간을 벌까, 아니면 처리할까. 하란이 고민하는 사이 카르옌이 하란의 등 뒤에서 빠져나와 옆에 섰다.

“암호가 바뀐 것 같은데. 이야기 들은 것 있나?”

카르옌이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거짓말이라고는 의심하기 힘들 정도로 여유롭고 당당한 태도였다. 그에 당황한 것은 상대였다.

“예? 암호가 바뀌어요?”

“그래.”

“이상하네……. 아까까지만 해도 됐는데. 아직 바꿀 주기 안 됐잖아요.”

앳된 목소리의 마법사들은 어리둥절해했지만 앞으로 나선 카르옌의 목에 걸려 있는 통행패와 손등에 그려 넣은 요람의 표식, 그리고 어렴풋이 느껴지는 마나의 흐름을 확인하고 금세 경계심을 누그러뜨렸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안 그래도 어제부터 연락이 안 닿는 놈이 하나 있어서 확인하러 온 참인데.”

카르옌이 의미심장한 어조로 말했다. 혼잣말에 가까웠지만 듣지 못할 거리는 아니었다.

“설마! 확인해 볼 테니 다들 뒤로 물러나시죠.”

성질이 급해 보이는 마법사가 앞으로 나서더니 품에서 지팡이를 꺼냈다.

“시린 한숨.”

젊은 마법사가 지팡이를 휘두르며 주문을 외웠다. 한기가 돌게 하는 마법으로, 마수나 사람과 싸울 때는 효용이 없어 기껏해야 음식을 얼리거나 물 온도를 시원하게 만드는 데나 쓰이는 기초 마법이었다.

마법사는 반동을 대비한 듯 어깨를 움찔거렸지만, 예상과 달리 문은 묵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뭐야. 되는데?”

“그러게. 고맙기도 해라.”

그 보드라운 인사가 마법사가 기절하기 전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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