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
“죽었네요. 아무래도 금기를 어기면 입 안에 독이 퍼지는 마법이 걸려 있었나 봅니다. 생각 없이 입을 연 걸 보면 본인도 죽는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 같고요.”
카르옌의 차에 독을 탔다는 주방 시종도 같은 마법에 걸려 있었을 가능성이 컸다. 토파즈가 한숨을 내쉬었다.
바깥에서 죽었으면 어디 야산에 묻기라도 할 텐데 번화가 한복판의 여관에서 사람이 죽다니, 골치 아파졌다. 시체를 어떻게 처리해야 살인범으로 몰리지 않을지 고민하는데 카르옌이 말했다.
“시신은 태우죠.”
“…….”
카르옌이 아무렇지 않게 제안했다. 눈썹을 까딱이며 바라보자 싱긋 웃으며 되묻기까지 했다.
“죽어도 싼 놈인데 곱게 화장해 주기까지 한다니, 너무 과한 친절인가요?”
조금 찝찝하기는 했으나, 토파즈는 더 나은 대안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 먼저 내려가 계세요. 망도 봐 주시면 좋고요.”
토파즈는 카르옌을 혼자 둬도 될지 잠시 고민했으나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닫고 나왔다. 정보를 캐낼 구석을 잃었으니 다시 막막해졌다.
죽은 남자에게서 얻은 실마리와 제인이 그려 준 그림을 머릿속에서 정리하던 토파즈는 불현듯 어떤 추측을 떠올리고 옆방의 문을 세 번 두드렸다.
“나야.”
하란이 문틈으로 토파즈를 확인한 뒤 문을 활짝 열었다.
“소란스럽던데, 뭡니까?”
“그놈 죽었어.”
“예?”
기어이 죽여 버린 거냐는 시선을 무시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 제인은 여전히 침대에 작은 몸을 누이고 잠들어 있었다. 제인이 그린 그림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아마 하란이 들여다보고 있던 듯했다. 종이를 쥔 토파즈가 잠들어 있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뭐 하려고 그러십니까?”
토파즈가 무릎을 굽혀 침대 곁에 앉았다. 그리고 잠결에 이불을 꾹 움켜쥔 제인의 손을 조심스럽게 쥐고 살폈다.
아까 손을 잡았을 때도 느꼈지만, 아직 여물지 못한 아이의 손끝에는 자잘한 상처가 수없이 많았다. 아물 틈 없이 계속 무언가에 쓸렸는지 흉터가 되다 만 상처들이 반은 굳고 반은 터져 있었다. 꼭 반복되는 노동을 한 노동자의 손 같았다.
토파즈는 제인이 그린 그림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맨땅에 덩그러니 세워진 건물, 검은 로브를 입은 마법사들, 네모난 틀을 가득 메운 가느다란 직선과 그 앞에 그려진 작은 머리통들, 커다란 타원형의 무언가…….
토파즈가 짤막하게 내뱉었다.
“양탄자 공장.”
“예?”
“율리안이 그랬지. 메이온에는 어린애들도 일을 시켜 주는 양탄자 공장이 있다고.”
“…….”
‘메이온에는 양탄자를 만드는 공장이 있는데, 애들한테도 일자리를 준대요.’
하란은 소매치기 소년이 했던 말을 떠올렸는지 설마 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게 정확히 어디지?”
* * *
토파즈의 추측이 맞다는 사실과 공장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생각보다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깨어난 제인이 어눌하게나마 말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말을 할 수 없었던 이유가 저주 탓이었고 그 저주의 시전자였던 남자가 죽음으로서 자유로워진 것이었다.
제인은 메르디나가 안아서 데려온 다른 아이의 창백한 얼굴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시체처럼 눈만 감고 있는 아이를 카르옌이 치료해 주었을 때는 울음마저 뚝 그쳤다. 제인은 더듬거리면서도 내용만은 정확하게 양탄자 공장에 관해 설명했다.
제인의 설명에 따라 도착한 곳은 도시 외곽이었다. 메이온 외곽에 하나둘 들어서고 있는 공장들은 대부분 의류나 완구 따위를 생산하는 수공업형 봉제 공장이었다.
공장들은 넓은 부지를 사용하고 있어 서로 동떨어져 있었고, 대부분이 공장 안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돌아가고 있어 드나드는 인적이 드물었다. 마음먹고 악덕한 짓을 하기에는 제격이었다.
토파즈와 세 사람은 양탄자 공장 뒤편의 언덕에 숨어 있었다. 언덕에는 보랏빛 꽃이 잔뜩 핀 리라 나무가 있어 짙은 꽃향기가 났다. 공장과는 거리가 조금 있었지만 시력이 보통 이상인 네 사람이 근처를 살피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양탄자 공장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공장처럼 보였다. 그러나 공장에는 창문이 하나도 없었고, 두꺼운 철문으로 된 출입문은 내내 굳게 닫혀 있었다.
문을 지키는 경비병은 따로 없었다. 간혹 위아래로 새카만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공장 주변을 순찰하듯 어슬렁거릴 뿐이었다. 카르옌의 확인에 따르면 마법사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라고 했다.
수풀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메르디나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소리 없이 하란의 어깨를 툭 쳤다. 하란은 카르옌의 옆구리를 쳤고, 카르옌은 토파즈의 손을 잡아 슬쩍 당겼다. 그러나 토파즈의 시선은 이미 카르옌이 당기기 전부터 아래쪽을 향해 있었다.
언덕 아래로 난 갓길로 무늬 하나 없이 새카만 로브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두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의 걸음은 공장을 향하고 있었다.
“둘 다 마법사네요.”
카르옌의 확인이 떨어지자 네 사람은 차근히 시선을 교환했다.
잠시 후, 두 검은 로브 일당은 기절해 수풀 사이에 누워 있었다. 그들은 각자 빗장뼈와 복숭아뼈 부근에 문신을 새기고 있었다. 죽은 남자가 이야기한 ‘요람’의 표식이었다. 공장의 정체가 점점 명확해졌다.
“평범하게 생겼네. 길 가다 마주쳤으면 흑마법에 미친놈들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겠어.”
하란의 말에 카르옌이 어깨를 으쓱였다.
“흑마법을 연구한다고 겉으로 티가 나지는 않으니까. 그러니 더 무서운 거야. 네가 알고 지낸 마법사 중 한둘쯤은 집에서 사람 죽여다가 그 피로 마법진을 그리고 있을지도 몰라.”
“너만 아니면 돼.”
심드렁한 대꾸에 카르옌이 피식 웃었다.
그들은 기절한 두 흑마법사의 입에 재갈을 물린 뒤 손발을 꽁꽁 묶어 풀숲에 던져 두고 검은 로브를 벗겨내 갈취했다. 목에 걸려 있던 납작한 패도 챙겼다.
“아마 공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출입패 같네요. 인원을 둘씩 나누죠.”
카르옌과 하란은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정문으로 출입을 시도하기로, 다른 두 사람은 비밀스러운 통로를 찾기로 했다. 말은 거창했지만 쥐새끼처럼 굴뚝이나 환풍구를 찾아 숨어들 계획이라는 뜻이었다.
경비원의 눈을 피해 통로를 찾는 사이, 카르옌과 하란은 당당히 걸어가 정문으로 향했다. 아무런 소란도 일어나지 않아서 잠입이 무사히 성공했음을 알았다.
토파즈와 메르디나도 쓸 만한 통로를 발견했다. 외벽에 달린 환풍구였다. 환풍구는 두 사람의 키보다 조금 높은 곳에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메르디나가 품에서 갈고리가 붙어 있는 줄을 꺼냈다. 그는 높이를 가늠하더니 갈고리를 던져 환풍구의 창살에 걸었다. 줄이 팽팽해질 정도로 잡아당기자 창틀 전체가 기사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나왔다. 신속하고 매끄러운 과정이었다.
“도둑으로 전직해도 되겠는데.”
“아쉽게도 직업을 바꿀 생각은 없습니다.”
시답지 않은 농담에도 성실한 대꾸가 돌아왔다. 토파즈는 어깨를 으쓱이고 외벽의 홈을 발로 디뎌 훌쩍 뛰어올랐다. 환풍구 안에 들어가 손을 내밀자 그것을 잡은 메르디나가 수월하게 올라왔다. 다른 손으로는 환풍구 틀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무도 들어온 적 없는 것처럼 다시 환풍구 틀을 끼워 둔 두 사람은 앞으로 나아갔다.
좁은 통로를 기어가다시피 하는데 다행스럽게도 통로가 점점 넓어졌다. 창문이 아예 없는 건물이라서인지 환풍구가 제법 넓었다. 앉아서 허리를 펼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 토파즈는 아래를 바라보았다.
환풍구 덮개의 틈 사이로 내려다보이던 지루할 정도로 긴 복도를 지나자 넓은 공터 같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아래에 아이들이 있었다. 천장에 닿을 듯한 높이로 세워진 베틀 같은 도구와 거기에 매달린 양털 따위의 모직물, 형형색색의 실, 그리고 그 앞에 앉은 어린아이들. 제인이 종이에 빼곡히 그려 넣은 직선이 실제 모습 위로 어렵지 않게 겹쳐졌다.
아이들은 일렬로 앉아 부지런히 색실을 엮었다. 아이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는 어른이 둘 있었다. 한 명은 구석의 나무 상자 위에 앉아 졸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몽둥이를 휘두르며 아이들 사이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쉴 틈 없이 손을 놀렸다. 조금이라도 속도가 늦어지면 불호령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대부분 열 살도 채 되지 않아 보였다. 토파즈는 메르디나가 조심스레 어깨를 짚어 올 때까지 그 광경을 내려다보다가 앞으로 전진했다. 지금은 소란을 일으킬 때가 아니었다.
조금 지나자 또 긴 복도가 나오고, 복도를 지나자 아무도 없는 창고 공간이 나왔다. 완성된 양탄자를 보관하는 공간인 듯 크고 작은 양탄자가 차곡차곡 걸려 있었다.
아래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두 사람은 환풍구를 뜯고 뛰어내렸다. 양탄자를 잔뜩 걸어둔 공간은 모직물 특유의 냄새와 날리는 잔털로 인해 공기가 탁했다.
토파즈가 눈앞에 걸린 양탄자를 올려다보았다. 어린아이들이 손끝이 부르틀 때까지 엮은 양탄자는 그 과정을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오래 살필 시간은 없었다. 나무로 된 문 너머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기민하게 알아챈 두 사람은 시선을 주고받으며 서로 다른 양탄자 뒤에 몸을 숨겼다.
문이 열렸다가 닫히고, 느린 발소리가 들렸다. 토파즈는 숨을 죽이며 그 기척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