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
“이 문신을 공유한 집단이 있는 건가? 뭐 하는 곳이지?”
“나도 들어간 지 얼마 안 돼서 잘은 몰라. 그냥 평범한 마법사 교류 모임이야.”
“그 말을 지금 믿으라고 하는 소리야?”
토파즈가 피식 웃었다. 그가 팔걸이 위에 양팔을 걸치며 손깍지를 꼈다. 서늘한 시선이 남자의 얼굴과 문신이 새겨진 귓가를 훑었다.
“평범한 마법사가 아니라 흑마법사들이겠지.”
“무, 무슨 소리야! 우린 순수하게 마법을 연구할 뿐이야. 마탑이랑 별다를 것도 없는 곳이라고.”
“들어간 지 얼마 안 돼서 잘 모른다며?”
“……아무리 몰라도 대충 뭐 하는 곳인지는 알아.”
“아이들을 데려다가 뭘 하려고 했지? 죽여서 제물로 쓸 생각이었나?”
남자가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더니 펄쩍 뛰었다.
“죽이긴! 너희가 흑마법이라고 부른다고 다 그런 간악한 술수만 있는 줄 알아? 애를 왜 죽여?”
흑마법은 맞다는 얘기였다. 남자는 누굴 살인자로 몰아가느냐며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토파즈는 남자의 말뜻을 파악해 한마디로 정리했다.
“숨만 붙여 놓을 생각이었다?”
“…….”
숨을 고른 남자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걔넨 어차피 죽을 애들이었어. 죽을 애들을 내가 빼내 준 거라고.”
“그래서.”
“도움 좀 받는 대신 먹이고 재워 주면 서로 좋은 거래 아니야?”
“도움? 뭣도 모르는 애들의 생기를 빨아다가 네 마법의 도구로 쓰면서?”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그게 뭐가 나쁜데?”
“뭐?”
“죽는 것도 아닌데, 마법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니 영광스러운 일이잖아.”
대답의 내용보다도 진심으로 의아해하는 얼굴이 더욱 섬뜩했다.
“마력을 타고나지 못했다는 건 곧 축복받지 못한 존재라는 뜻이야. 이 세상의 이치를 아는 우리와는 다르게 말이야. 위대한 흐름에 기생하며 살다가 의미 없이 죽느니, 뭐라도 보탬이 되는 쪽이 낫지 않아? 한낱 미물이라도 그 정도는 이해할 줄 알았는데…….”
완전히 정신 나간 놈이었다. 어리숙해 보이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혼자 심취해 떠드는 꼴이 꼭 그릇된 신앙에 빠진 신자 같았다.
혼자 떠들어 대던 남자는 토파즈가 질린 표정을 짓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개의치 않았다. 그의 관점에서 토파즈는 말이 통하지 않는 ‘한낱 미물’인 모양이었다. 대신 그는 토파즈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당신도 이해하지 않아?”
토파즈는 남자의 시선이 닿은 대상이 카르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의자에 파묻고 있던 상체를 세웠다. 몸을 앞으로 기울여 남자의 시선을 차단했지만 목소리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저들과 우리는 다르잖아.”
저들과 우리, 명확히 선을 그은 남자가 카르옌에게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카르옌이 당연히 고개를 끄덕이리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등 뒤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한 걸음 다가온 카르옌이 토파즈가 앉은 의자 등받이 위에 팔을 둘렀다. 그가 남자를 향해 허리를 숙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역겨운 이단자가 못 하는 말이 없구나.”
고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대체 어떤 얼굴로 그런 말을 내뱉는지 궁금해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네가 감히 신이라도 그따위로 지껄일 수는 없음을 알아야지.”
그렇게 말하는 얼굴이 신의 대리자라고 해도 믿을 만큼 아름답고 또 냉엄했다. 토파즈는 저도 모르게 그 얼굴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내 눈에는 너도 미물과 다를 바 없다면, 내가 널 함부로 짓밟아도 되는 건가? 어떻게 생각해.”
응? 되묻는 목소리가 흡사 다정하게 느껴질 정도로 부드러웠다. 온기 한 줌 없는 눈빛과 대비되어 오히려 소름이 돋았다. 남자는 카르옌이 풍기는 위압감에 질려 침을 꿀꺽 삼켰다가, 그 사실 자체에 수치심을 느낀 듯 고개를 쳐들었다.
“어차피 오갈 데 없는 고아 새끼들이라 가만히 내버려 둬도 비참하게 죽었을 텐데, 살려 줬으면 된 거 아니야?”
적어도 어제까지는 살아 있었다는 덧붙임에 희미한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미친 새끼.”
간신히 다잡고 있던 이성이 뚝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상상인지 과거의 조각인지 불분명한 장면이 뒤섞여 토파즈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여덟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바닥에 누워 있었다. 피에 젖고 얼굴이 멍든 채로. 창백한 눈꺼풀은 다시는 떠지지 않을 것처럼 꼭 감겨 있었다.
실체 없는 빗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발목까지 물이 차오른 것 같았다. 더 이상 키가 그렇게 작지 않은데도, 이 물에서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토파즈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남자가 앉아 있는 의자에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우당탕! 의자와 함께 넘어진 몸뚱이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났다.
그 이후로는 아수라장이었다. 토파즈는 아이가 어디 있는지 말하라며 남자의 턱에 주먹을 날렸다. 냉정이 흐려졌음에도 죽이지는 않을 만큼 절제된 힘이었다.
상대는 마법사였으나 신체는 민간인에 가까웠기에 찰나의 실수로도 목숨을 앗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토파즈는 이 신도 회개를 포기할 것 같은 놈을 시원하게 한 대 때려 줄 수도 없었다.
고작 몇 대 얻어맞은 남자의 입에서 아이를 숨겨 둔 장소의 이름이 나오고, 방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도 들렸다.
그 직후 뒤에서 다가온 손이 토파즈의 눈가를 가렸다. 반사적으로 붙잡아 꺾으려 했으나 손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체온이 익숙했다. 몸에서 힘이 빠졌다.
“그 정도면 됐어요, 토파즈님. 괜한 힘 빼지 마세요. 그러다 지치십니다.”
토파즈가 겨우 이 정도로 지칠까 봐 염려하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눈가에 닿은 서늘한 손이 시원해 열기가 식었다. 시원한 손은 토파즈의 눈가를 조심조심 누르다가 뺨과 귓가를 스쳐 떨어져 나갔다.
어느새 뒤에는 카르옌뿐이었다. 토파즈는 문이 닫히던 소리를 뒤늦게 기억해 냈다. 아마도 메르디나는 남자가 말한 장소로 향한 것 같았다.
바닥에 널브러진 남자가 쿨럭 기침을 내뱉었다. 아까와 달리 뺨이 붓고 입술이 쥐어 터져 있었지만, 솔직히 토파즈가 보기에는 간지러운 수준의 상처였다. 그러나 평생 책상 앞에서 살았을 남자는 겨우 그 정도로도 겁을 집어먹고 얌전해졌다.
토파즈의 허리와 어깨를 당겨 다시 의자에 앉도록 만든 카르옌이 남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저희 조금 더 인도적으로 하는 게 어떨까요?”
이미 쥐어팼는데 이제 와서? 그런 뜻을 담아 올려다보자 카르옌이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제가 예전에 아카데미에 다닐 때 개발한 ‘거짓말을 탐지하는 마법’이 있어요. 아직 실험 단계에서 멈췄지만, 사소한 윤리적 문제가 있을 뿐 기능에는 문제가 없다고 장담해요.”
‘사소한’을 강조하는 말에 신뢰도가 확 낮아졌다. 카르옌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인간이 거짓말을 하면 신체적인 반응이 나타난다는 점에서 착안한 마법인데요. 심박수가 일정 횟수 이상을 넘어가는 등 몇 가지 증상을 보여서 거짓말임이 감지되면 심장이 자동으로 터져요.”
“뭐?”
너무 태연하게 말해서 터진다는 게 심장이 아니라 코피라도 되는 줄 알았다. 대체 인재들만 모인다는 아카데미에 다니면서 무슨 짓을 한 건지 궁금해졌다. 예전에 베릴에게 듣기로는 교수들이 무척 엄격하다고 했는데…….
“그 마법에 걸려 본 사람이 여태까지 딱 세 명 정도였는데, 신기하게도 다들 진실만 말하더라고요. 그래서 심장이 진짜 터지는지는 미처 확인을 못 해 봤는데 지금 실험해 보면 되겠어요.”
실험 이야기를 하며 눈을 반짝 빛내는 꼴을 보니 이 자식도 마법사는 마법사인 모양이었다. 토파즈가 황당하게 물었다.
“그거 그냥 거짓말하면 죽이겠다는 협박이랑 다른 점이 있는 거야? 그보다 대체 어느 부분이 인도적인데.”
카르옌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음. 심장이 터지는 원인이 제가 아니라 본인의 입이라는 점에서?”
어쨌든 마법은 네가 거는 거잖아……. 아니, 애초에 그딴 걸 마법이라고 불러도 되나 싶었다. 토파즈는 혀를 차며 카르옌의 코끝을 아프지 않게 튕겼다.
뜻밖에도 소득은 있었다. 대화를 듣던 마법사가 자기보다 더한 미친놈은 처음 보겠다는 눈으로 카르옌을 보더니 무조건 사실대로 말하겠다며 넙죽 엎드린 것이었다. 정상이 아니긴 하지만, 미친놈에게 미친놈 취급당하는 꼴을 보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 문신은 무슨 의미지?”
“의미 같은 건 몰라. 그냥 새겨야 한다고 하길래 새긴 거야.”
“네가 속한 단체의 이름이 뭔지 말해.”
남자가 머뭇거리다가 토파즈의 어깨 너머에 서 있는 카르옌을 슬쩍 보더니 대답했다. 심장을 터뜨리는 마법을 진짜 걸기라도 할까 봐 겁이 나는 듯했다.
“요람.”
“요람? 그게 다야?”
토파즈가 미간을 구겼다. 설마 애들 재울 때 쓰는 그 요람 말인가. 양심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이름이었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들 그렇게 불러.”
“너희의 근거지는?”
“근거지는……. 커, 헉!”
말을 잇던 남자가 갑자기 앞으로 허리를 숙였다. 바닥으로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순간 카르옌이 진짜로 심장을 터뜨리는 마법이라도 썼나 싶었지만 그런 기미는 전혀 없었다.
“뭐야.”
토파즈가 재빠르게 다가가 억지로 턱을 벌렸다. 그러자 보였다. 거의 끊어져 너덜거리는 보랏빛 혀와 입 안 가득한 붉은 피, 그리고 피 사이로 보이는…… 별 문양이.
그러나 눈 깜빡할 사이에 문양은 사라졌다. 한기가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