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
“길 가던 사람 붙잡고 왜 시비예요? 애가 보니까 그만하시죠. 자꾸 이상한 말 하면 신고하겠습니다.”
펄쩍 뛰던 남자는 토파즈와 눈이 마주치자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어…….” 하고 중얼거리더니 아이를 안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 못해 토파즈가 내민 발에 걸려 넘어졌다.
“억!”
몸이 기우뚱 기울며 바닥과 가까워지자 남자는 곧바로 아이를 품에서 던지듯 내려놓고 두 팔로 제 머리를 감쌌다. 토파즈는 그 꼴을 보며 혀를 차고는 아이가 떨어지기 전에 받아 안았다.
“미안. 놀랐지.”
토파즈는 아이가 괜찮은지 확인하며 고개를 내렸다. 아까부터 울먹거리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지만 아이는 입술을 꾹 깨물며 참았다. 벌써 울음을 참는 법을 아는 아이였다.
“귀한 딸이라더니 자기가 넘어질 것 같다고 바로 내팽개치고, 몹쓸 아버지네. 진짜 아버지도 아니겠지만.”
“뭐, 무, 무슨!”
붉은 리본으로 검은 머리를 묶은 아이가 토파즈를 올려다보았다. 어제와 똑같은 차림새, 그러나 다른 얼굴이었다.
“어제도 어린애를 끌고 갔잖아. 너랑도 이 애랑도 전혀 닮지 않은 애.”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불안한 눈을 하던 여자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눈이 마주친 순간에 토파즈는 그 아이가 무언가를 전하고 싶어 한다고 느꼈다. 그러나 아이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고 그대로 남자와 함께 사라졌다.
“끌고 가긴 누가 끌고 갔다고 그래요? 그리고 안 닮았으면 안 됩니까? 무례하긴!”
그의 말대로였다. 아이가 부모와 닮지 않았고, 아이가 불안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길 가던 사람을 함부로 추궁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제의 토파즈는 불길한 직감을 느끼면서도 애써 그가 모르는 사연이 있으리라 여겼다.
그런데 오늘도 전혀 닮지 않은 아이가 마치 같은 아이처럼 꾸며져 끌려가다시피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단순히 우연이라고 볼 수 있을까? 토파즈는 후회했다. 미친놈 취급을 받더라도 어제 그 아이를 멈춰 세워 물었어야 했다고.
“어제 데려간 애는 어쨌어.”
토파즈가 어제를 언급한 순간, 억울함을 호소하던 남자의 얼굴에 당황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남자는 금세 표정을 갈무리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때마침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던 사람을 향해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다, 당장 우리 딸 내려놔! 어디 대낮에 길거리 한복판에서 애를 유괴하려고……!”
“무슨 일입니까?”
그러나 토파즈를 유괴범으로 몰아가려던 시도는 시작도 전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던 남자가 바로 하란이기 때문이었다.
“유괴범.”
토파즈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하란 역시 남자가 어제 스쳐 지나간 마법사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아보고 경계 태세를 갖췄다.
“유괴범이라니! 난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돌봐 주는 후원자일 뿐이야!”
두 사람이 한패라는 사실을 눈치챈 남자가 더 큰 소리로 악을 쓰기 시작했다. 표정만 봐서는 정말 억울한 사람 같았다. 그러나 토파즈는 속지 않았다.
토파즈는 아이를 하란에게 맡기고 남자의 팔을 비틀었다. 남자는 손을 뒤로 돌려 몰래 수인을 맺고 있었다.
“허억.”
다른 손으로는 남자의 목깃을 잡아 뜯듯이 쥐었다. 한 손으로 잡았을 뿐인데 몸이 달랑 딸려 올라가자 남자가 기겁하며 버둥거렸다. 토파즈가 남자의 목을 감싼 옷을 손으로 벌리며 읊조렸다.
“거짓말을 하려거든 네 목에 묻은 피부터 지우고 떠들어.”
“……!”
남자가 버둥거림을 멈추고 제 목을 감싸 쥐었다. 그곳에는 미처 지우지 못한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남자의 안색이 변했다.
“잠시만요, 토파즈님.”
“악!”
하란이 얼굴을 굳히고 끼어들며 남자의 머리채를 잡았다. 남자가 비명을 내지르고 주변을 지나던 사람들의 시선이 슬슬 모여들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정확히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하란이 남자의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바투 쥐고 당겼다. 머리칼이 뒤로 젖혀지며 귓가가 드러났다. 귀 뒤, 뒷목과 이어지는 뼈 부위에 손톱만 한 문신이 그려져 있었다. 새카만 별무늬였다.
“……!”
토파즈와 하란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움직여 남자의 양손을 결박하고 입에 손수건을 처넣었다.
“으, 으으읍!”
“이렇게 바로 쓸모가 생길 줄은 몰랐네요.”
하란이 장을 봐 오겠다며 챙겨 나온 아공간 주머니에서 마나 구속구를 꺼내 남자의 손목에 채웠다.
길거리 한복판에서 수갑을 채우자 사람들이 걸음을 멈춰 서서 수군거렸다. 토파즈는 태연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공무 집행 중입니다. 악질적인 유괴범이에요.”
경비병 복장 비슷한 옷도 입고 있지 않았지만 토파즈의 뻔뻔스러운 태도와 남자의 손목에 채워진 수갑, 하란의 다리 뒤에 숨어 있는 아이의 모습이 나름대로 설득력을 준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차며 흩어졌다. 함께 있는 아이의 손을 꼭 쥐며 경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란이 헛웃음을 흘렸다.
“경비병 사칭은 범죄입니다만.”
“새삼스럽게.”
그의 손에 붙잡혀 읍읍거리는 남자를 보라는 뜻으로 고갯짓하자, 하란이 어깨를 으쓱이며 남자의 목덜미를 깔끔하게 가격했다.
그렇게 납치범 납치가 조용히 이루어졌다.
* * *
아이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말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의사 표현이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경비대를 불러 주겠다는 말에도, 구빈원에 데려다주겠다는 말에도 힘껏 고개를 저은 아이는 기어이 두 사람을 따라왔다.
아이는 특히 하란을 잘 따라 그의 다리에 매달려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이러다가 진짜 유괴범으로 몰리는 것 아닌가 걱정되었지만, 오갈 데 없는 아이를 길바닥에 그대로 두고 올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란은 무릎을 굽혀 아이와 시선을 맞추며 물었다.
“여기, 메이온에 집이 있어?”
아이가 고개를 내저었다. 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는 상황이 진정되자 오히려 또래에 비해 차분하고 어른스러워 보였다.
“그럼 다른 도시에서 끌려왔어?”
아이는 고민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다른 도시에서 온 건 맞지만 끌려온 건 아니라는 뜻일까.
“아까 그 남자랑은 원래 아는 사이야?”
아이는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가 다시 내젓더니 결국 어정쩡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예, 아니오로 대답하기에 난감한 질문인 듯했다.
손에 종이와 펜도 쥐여 줘 봤지만 아이는 침울한 얼굴로 가만히 쥐고 있기만 할 뿐이었다. 아무래도 글을 배우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도 자신의 이름은 쓸 줄 아는지 ‘제인’이라는 이름을 알려 주었다.
“이름이 제인이구나.”
끄덕. 제인은 글을 쓰는 대신 펜을 엉성하게 쥔 채 그림을 그렸는데, 새카만 옷을 뒤집어쓴 사람이 손에 막대기를 쥐고 있는 그림이었다. 하란이 손을 뻗어 막대기를 가리켰다.
“지팡이?”
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널 데려가던 남자가 마법사라는 뜻이야?”
다시 한번 끄덕거린 제인은 옆에 비슷한 사람을 몇 명 더 그려 넣었다.
“마법사가 여러 명 있다고?”
끄덕끄덕. 제인은 드디어 대화가 통하는 게 기뻤는지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이번에는 네모난 상자를 그려 넣었다. 상자 안에 작은 네모가 들어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입구를 표현한 것 같았다.
“건물? 네가 있던 장소야?”
고개를 끄덕인 제인은 건물 안쪽에 다시 네모를 그리고 그 안에 직선을 빽빽하게 내리그었다. 그 앞에는 작고 동그란 원도 몇 개 그렸다. 사람 머리인가?
명확히 이해하지 못한 토파즈와 하란이 눈을 가늘게 뜨자 제인도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서 찌그러진 타원형도 몇 개 그렸으나 무슨 뜻인지 쉽게 알아보기는 힘들었다.
제인은 작은 손으로 열심히 그림을 그리다가 지쳤는지 곧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데려다 침대에 눕혀 주자 금세 곯아떨어졌다.
토파즈는 하란에게 제인을 맡기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바로 옆 방으로 가 문을 세 번 두드렸다. 끼익, 곧바로 문이 열렸다.
“오셨어요?”
방 안에 카르옌과 메르디나가 서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과 조금 떨어진 바닥에 아까 그 남자 마법사가 앉아 있었다. 여전히 마나 구속구를 찬 채였다.
토파즈가 남자의 앞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이름과 나이를 말해.”
남자는 시선을 피하며 대답하지 않았다. 토파즈가 품 안에서 돌돌 말린 종이를 꺼내 남자의 턱을 툭 쳤다. 남자가 모멸감을 느낀 얼굴로 시선을 들어 올렸다. 토파즈는 종이를 펴서 그 눈앞에 들이밀었다. 지명수배지였다.
“이놈 알지. 알베르 카툴로.”
문신이 특정 집단을 가리킨다는 가정이 맞다면 남자와 동료이거나 최소한 아는 사이일 터였다. 그러나 남자는 미간을 좁혀 가며 지명수배지에 그려진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내 남자가 대답했다.
“몰라.”
“그럼 왜 이놈이랑 같은 문신을 새겼지?”
“무슨 문신 이야기하는 거야? 난 몰라.”
“피부를 떠서 직접 눈앞에 보여 줘야 뭔지 알겠어? 네 귀밑에 있는 별 문양 말이야.”
“…….”
토파즈가 아무렇지 않게 협박을 입에 담았다. 특별히 과격하거나 위협적이지 않은 어조였는데도 남자의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그놈 손에도 너랑 똑같은 문신이 있어. 꽤 깊은 사이인가 봐. 가족, 아니면 연인인가?”
“진짜 모르는 사람이야!”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토파즈가 다시 지명수배지를 막대기처럼 돌돌 말아 남자의 목 언저리를 툭, 툭 쳤다. 차분해서 더 두렵게 들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우리 목표는 네가 아니라 이놈이야. 잘 대답하면 넌 곱게 보내 줄 테니 영리하게 굴어.”
남자에게서도 문신이 발견된 이상 목표는 바뀐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토파즈는 그걸 곧이곧대로 말할 정도로 어설프지 않았다. 신문에는 때로 달콤한 미끼가 필요한 법이었다.
“……진짜 보내 줄 거야?”
“그럼. 널 죽여 봤자 수프로도 못 끓여 먹을 텐데 뭐 하러 살생을 하겠어.”
“그, 그 사람이 누군지는 진짜 몰라. 우린 서로 얼굴을 모르거든.”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