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
“…….”
카르옌이 입을 벌렸다. 그러나 무슨 말이라도 할 것처럼 벙긋대던 입은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긴 침묵 끝에 되돌아온 질문에 토파즈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건 내가 해야 할 질문 아니야?”
“…….”
“처음부터 내가 누구인지 아는 듯 굴었잖아. 어떻게 알아봤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북쪽 숲에서부터 의심해 온 것이었다. 카르옌은 물론 하란과 메르디나도 너무 쉽게 토파즈를 받아들이고 신뢰했다. 카르옌이야 겁이 없어서 그렇다 치더라도 경계심이 정상 수준인 두 기사조차 토파즈에게는 한 수 물러 주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떻게 알았어? 이름 때문인가?”
붉은 머리칼에 가넷이라는 이름 외에는 나이도 성별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토파즈라는 이름을 듣고 연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르옌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예전에 뵌 적이 있으니까요.”
“……나를?”
토파즈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용병 활동을 하며 수많은 사람을 만났었다. 스쳐 지나간 이들까지 따지면 셀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토파즈는 카르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흑단 같은 머리칼이 잘 어울리는 흰 피부, 섬세한 눈매와 오똑한 코, 옹골찬 턱 아래로 이어지는 사슴 같은 목.
이렇게 생긴 남자의 얼굴을 기억 못할 수가 있을까. 더군다나 마법사에 귀족이라는 특이사항까지 있는데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짚이는 점이 없었다.
“난 너희 같은 귀한 집 자제들과 어울려 본 적 없는데. 나랑 인연이 있으려면 차라리 뒷골목 소매치기였거나 약쟁이였던 쪽이 빠를걸.”
“기억 못 하실 줄 알았습니다.”
말끝에 희미한 웃음소리가 묻어났지만 진짜 웃음이 아닌 자조에 가깝게 들렸다. 이윽고 조용히 내리깐 눈이 처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왜 저렇게까지 처량한 얼굴을 한단 말인가.
“정말이라면 우리가 어디서 만났는지 이야기해 봐.”
“싫습니다.”
“뭐?”
단칼에 거절당할 줄은 몰랐던 토파즈가 황당함에 미간을 찌푸렸다. 기억을 못 하는 것도 싫은데 알려 주기도 싫다면 대체 어떻게 하라는 걸까.
카르옌이 한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몸을 숙였다.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며 긴 그림자가 토파즈의 시야를 가렸다. 결 좋은 머리칼이 쏟아졌다. 조금만 더 숙이면 머리칼 끝이 토파즈의 뺨을 간질일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토파즈님이 직접 기억해내 주세요.”
나지막이 속삭인 카르옌이 입술을 당겼다. 푸른 눈동자가 꼭 밤바다처럼 고요히 빛났다.
“저희의 계약이 끝나기 전에 기억해 내시면 좋겠네요.”
* * *
메이온은 동부에서는 넨베르그 다음으로 꼽히는 대도시였다. 매끈하게 닦여 있는 돌바닥 위로 다양한 차림새를 한 사람들이 오갔다.
토파즈 일행은 메이온의 찻집에 앉아 있었다. 골동품점을 겸하는 찻집은 독특한 분위기였다. 붉은 커튼, 낡은 괘종시계와 섬뜩하게 생긴 도자기 인형 따위가 곳곳에 장식되어 있었다. 토파즈가 보기에는 고물이나 다름없어 보이는 물건도 잔뜩 있었는데 먼지가 쌓이지 않은 것을 보면 관리는 되고 있는 듯했다.
맞은편의 보라색 벨벳 소파에 앉은 카르옌은 붓꽃 무늬가 그려진 찻잔을 우아한 자세로 쥐고 있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달그락 소리 한 번 나지 않게 잔을 내려놓은 그가 무심한 눈길로 내부를 둘러보았다.
“과연 같은 장소에 또 나타날까요?”
그들이 한가로이 차를 마시고 있는 이유는 이곳이 그들이 쫓는 지명수배범, 알베르 카툴로가 가장 최근에 목격된 장소이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최근이라고 해 봤자 반년이나 전이었잖아요. 그 정보상한테 사기당한 거 아닙니까?”
[알베르 카툴로. 메이온의 찻집 ‘오르골’에서 6개월 전 마지막으로 목격됨. 수배지를 눈여겨본 시민의 제보가 들어와 경비대가 출동했지만 놓쳤다고 함.]
실종 사건을 해결한 뒤 전달받은 짤막한 쪽지를 떠올렸는지 하란이 불신 어린 눈초리를 했다. 토파즈는 그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부연했다.
“다른 곳에서 또 목격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해. 목격되었다면 마샤의 귀에 들어왔을 테니 멀리 가진 않았을 거야. 그리고 그 지명수배범 한 놈만 이 도시에 있는 건지, 비슷한 놈들이 같이 어울리고 있는 건지도 알아봐야지.”
“후자이길 빌어야겠네요. 단서를 캘 수 있는 대상이 한 명뿐이라면 찾기 쉽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한 가지 중요한 실마리는 저희가 찾는 사람이 마법사라는 점이죠.”
카르옌이 품 안에서 마나 탐지기를 꺼냈다. 베론에서 몇 개 주워 온 것이었다.
“지금 작동되고 있는 거 맞아?”
“측정 불가는 안 뜨도록 개조했어요. 정예 검사들에게 반응하는 것도 고쳤고요.”
“그게 그렇게 뚝딱 되는 거였어?”
“제가 본래 못 하는 일이 없답니다.”
카르옌이 뿌듯하게 대꾸하며 토파즈로서는 하나도 못 알아들을 원리를 설명하기 시작한 때였다. 마나 탐지기의 불빛이 노란색으로 점멸하기 시작했다. 카르옌이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노란색은 마나가 미약하게 쌓인 사람이 주변에 있다는 뜻이에요. 마력을 제대로 다룰 줄 모르는 예비 마법사나, 소질만 있는 평범한 사람이요.”
토파즈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들 사이를 찬찬히 옮겨 가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췄다. 선반에 놓인 물건을 조심스럽게 만지고 있는 아이였다. 아이가 나무를 둥글게 깎아 만든 오르골 뚜껑을 열자 저절로 태엽이 풀리며 청아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본 제국의 전통 민요였다.
“저 아이인가?”
“토파즈님은 정말 예민하시네요. 가끔 마법사들끼리는 서로의 존재를 느끼기도 하지만 검사가 알아채는 경우는 드물거든요.”
카르옌은 토파즈를 신기하다는 얼굴로 바라보다가 마도구를 톡톡 건드렸다.
“불빛이 초록색으로 변한다면 저희가 찾는 진짜 마법사일 가능성이 커요. 마법사들은 언제든 마법을 쓸 수 있도록 ‘그릇’에 마나를 저장해 두는 법부터 배우거든요.”
쉽게 말해 탐지된 마나의 양에 따라 색깔이 변한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측정 범위가 넓지 않아요. 이 마도구가 측정할 정도면 대상이 이미 눈에 보일 정도의 거리에 있다는 뜻이에요. 저나 토파즈님에게는 큰 쓸모가…….”
그때 카르옌의 눈이 가늘어짐과 동시에 불빛이 초록색으로 점멸했다. 토파즈는 카르옌의 시선이 향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앉은 자리 바로 옆의 아치형 창문 너머로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카르옌의 시선이 향한 사람은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걷는 젊은 아버지였다. 옅은 갈색 머리칼을 어깨까지 기른 남자는 평범하다 못해 흐릿한 인상이었다. 유심히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을 것 같았다.
“흠, 제국이 아직 안 죽었네요. 생각보다 마법사가 많아요.”
토파즈는 혹시 몰라 스쳐 지나가는 그 남자의 손등이며 드러난 살갗 부분을 빠르게 확인했지만 문신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우연일까.
“근데 마법사라고 다 잡아다가 확인해 볼 수도 없잖아. 그러다가는 그 지명수배범보다 우리가 더 빨리 경비대에 잡혀갈걸.”
“안 들키면 되잖아?”
“네가 그렇게 말하면 농담으로 안 들려.”
“맞게 들었어, 하란.”
카르옌과 하란의 대화를 들으면서도 토파즈는 남자와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머리에 리본을 맨 아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얇은 창 너머로 꼭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토파즈가 미간을 좁혔다.
그 남자를 또 마주친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이른 아침, 토파즈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혼자는 아니었다.
보호 겸 감시 역으로 동행한 하란이 온 시장 상인들에게 말을 걸며 뒤따라오고 있었다. 카르옌이 거덜 낸 소금을 비롯한 식자재를 사고 몇 마디 수다를 나누더니 덤으로 얻은 사과며 무 따위로 양손이 무거워 보였다. 누가 보면 매일 아침 이 시장에서 장을 보는 사람인 줄 알 것 같았다.
토파즈는 하란이 마음껏 식자재 조달을 하도록 내버려 두고 사과 한 알을 베어 먹으며 걸음을 옮겼다.
인근에 기초 학교가 있는 탓에 거리에는 가방을 멘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 혹은 하인들이 자주 보였다. 그리고 그 사람들 사이에 어제 찻집 앞에서 본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어제처럼 아이의 손을 붙잡고 길을 지나고 있었다. 멀끔한 옷을 입고 머리에 리본을 묶은 아이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다가 토파즈와 눈이 마주쳤다.
어제 마나 감지기가 초록색으로 반응한 사람은 총 넷이나 되었지만, 저 남자는 유독 토파즈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어제 어렴풋이 느낀 그 이유를 지금은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토파즈는 조용히 그 남자의 뒤를 밟았다. 학교가 있는 거리로 향하는 다른 이들과 달리 남자는 주택가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네 딸인가?”
조용히 뒤따라가던 토파즈는 골목으로 들어선 남자의 어깨를 짚으며 물었다. 남자가 소스라쳐 놀라며 뒤를 돌았다. 꼭 붙들고 있던 아이의 손은 놓친 채였다.
“뭡니까? 볼일 있어요?”
남자는 토파즈를 경계하는 내색을 감추지 않으며 아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무어라 벙긋거리려는 아이의 뒤통수를 끌어안고 제 품에 숨겼다.
“딸 이름이 뭐지?”
토파즈가 차분히 물었다. 남자가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게 갑자기 무슨…….”
“딸인데 이름도 몰라?”
“아니, 그쪽이 누구신데요? 수상한 사람한테 내가 왜 귀한 우리 딸 이름을 가르쳐 줘야 합니까?”
토파즈는 아이의 뒤통수를 짓누르다시피 꽉 껴안고 있는 남자의 손을 보며 서늘한 눈을 했다.
“네가 더 수상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