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
토파즈가 카르옌의 손가락을 꽉 압박하고 있던 손을 떼어내며 말했다.
“흉터 안 남게 치료나 해.”
“아 맞다, 저 마법사였죠?”
“…….”
그제야 돌아오는 소리가 저 얼빠진 소리였다.
“마법사들은 전부 똑똑하다고 들었는데…….”
“그럴 리가요. 세상에 멍청한 마법사가 얼마나 많은데요. 물론 저는 아닙니다만.”
미심쩍은 눈초리로 쳐다보자 카르옌이 또 살살 웃었다.
“카샤프에 있는 황립 아카데미 아시죠?”
제국민 중 그 이름을 한 번도 못 들어본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황립 아카데미는 신분에 상관없이 제국 최고의 인재들만 모인다는 교육 기관이었다. 토파즈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똑똑했던 동료, 베릴이 바로 황립 아카데미 출신이었다. 불쑥 떠오른 얼굴에 기분이 가라앉으려는 찰나였다.
“제가 아카데미 마법부 수석 졸업생이랍니다.”
“…….”
황립 아카데미는 입학도 어렵지만 졸업 시험은 더욱 어려워 몇 년 동안 졸업을 못 하는 학생들도 숱하다고 들었다. 졸업장만 따내면 온갖 이름 높은 곳에서 모셔간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수재들만 모인 곳에서 수석 졸업이라고? 토마토 껍질도 못 벗기는 애가?
토파즈가 저도 모르게 사기꾼을 보는 눈빛을 했는지 카르옌이 ‘정말입니다…….’ 하며 풀 죽은 척을 했다.
“거기서는 순 마법 실력만 보나 보지?”
“실습 비중이 크긴 하지만 졸업 시험 과목은 총 열두 개입니다. 하나라도 낙제점 맞으면 졸업을 못 한답니다.”
카르옌이 목을 울리며 낮게 웃었다. 놀랍게도 하란과 메르디나가 반박하지 않는 것을 보니 사실인 모양이었다. 하란이 말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그 열두 과목에서 전부 만점이었습니다, 저놈.”
“…….”
“그때 아카데미 학장이었던 베르제 영감이 다음 대 학장이 되어 줬으면 좋겠다면서 졸졸 쫓아다니기까지 했죠. 저 녀석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요.”
학장? 게다가 베르제라는 이름은 토파즈도 얼핏 들어본 적이 있었다. 한때 제국 최고의 마법사라고 불리던 이름 높은 마법사로, 수도 마법사단의 역대 단장 중 한 명이었다.
“참고로 이쪽이 저희 기수 검술부 수석 졸업생이고요.”
카르옌이 손가락을 뻗어 메르디나를 가리켰다. 메르디나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을 뿐 으스대거나 부정하지 않았다. 토파즈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은 확실히 신뢰가 갔다.
토파즈는 자연스럽게 그 옆에 있는 하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얘는 차석쯤 되나. 저도 모르게 대답을 기대하며 쳐다보는데, 하란이 겸연쩍은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하란은 검술 과목만 빼고는 낙제를 겨우 면했죠.”
카르옌이 토파즈의 귓가에 입술을 붙이며 속삭였다. 속삭이는 척했지만 여기에 그 정도 소리를 못 들을 청각의 소유자는 없었으니 결국엔 다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카르옌은 그 이후로도 자신의 재능을 증명해 보이겠다며 저절로 칼질하는 마법을 고안하겠답시고 얼쩡거리다가 하란에게 쫓겨났다.
갑자기 황립 아카데미의 성적 산출 방식에 대한 신뢰가 확 떨어졌다.
밤이 깊자 빗줄기가 더욱 굵어졌다. 원래대로라면 야영이 어려웠을 정도의 장대비였다. 그러나 토파즈와 일행들의 머리 위는 여전히 깨끗했다.
토파즈는 결계를 점검하고 오겠다는 카르옌을 따라나선 참이었다. 빗소리를 들으며 마른 땅을 밟는 일이 어색했다.
“뭘 한 거야?”
“일종의 결계예요. 제가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침범할 수 없는 한 뼘짜리 공간이죠.”
한 뼘이라고 비유하기에는 제법 넓은 공간이었지만, 너무 쉽게 설명하니 마법사쯤 되면 이 정도는 다 할 수 있나 보다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걸 밤새 유지하겠다고? 네가 잠들기라도 하면 깨지는 거 아니야?”
“아뇨. 이건 물리적인 공격을 막는 용도의 결계와는 조금 달라요. 처음 펼칠 때만 힘을 쓰면 그 이후로는 매개체를 통해 유지되거든요.”
메이온에서 토파즈가 자발적으로 납치되어 갔던 숲에도 이런 식으로 사람들의 눈을 가리는 결계가 쳐져 있었다고 했다.
“그쪽에 있는 바위가 매개체예요. 허술하게 만든 거라 잘못 건드리면 결계가 깨질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
두 사람은 결계를 점검하고 다시 야영지로 돌아왔다. 토파즈가 자신의 천막으로 들어가 문을 내리려는데 불쑥, 천 사이로 희고 고운 손이 비집고 들어왔다.
“……?”
천막 앞에 신발까지 가지런히 벗어 놓은 카르옌이 멀쩡한 제 천막을 두고 따라 들어왔다. 소형 천막은 딱 성인 한 명의 취침 용도였다. 비좁게 누우면 두 명도 누울 수 있기는 했다.
꼭 예전에 살던 로즈 거리의 판잣집이 떠오르게 하는 넓이였다. 얼기설기 지은 그 판잣집에 비하면 ‘보온’ 외 3가지 마법이 걸린 천막이 훨씬 비싸겠지만, 어쨌든 좁은 것만은 비슷했다.
“왜 여기로 들어와?”
허리를 굽히며 들어오는 카르옌을 보며 토파즈가 떨떠름하게 물었다. 카르옌이 방긋 웃었다.
“또 몰래 나가서 사고치고 다니실까 봐 걱정되어서 감시하려고요.”
“…….”
이 풀밭에서 사고를 쳐 봤자 뭘 얼마나 치겠냐만, 감시하겠다는 말을 저토록 당당하게 하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가.”
토파즈는 뻔뻔한 침입자의 어깨를 밀어 천막 밖으로 쫓아냈다. 그리고 바깥과 달리 훈훈한 온기가 감도는 천막에 두 발을 뻗고 누웠다.
빗소리 외에는 고요하기 그지없는 밤이었다. 얌전히 제 천막을 찾아 돌아갔어야 할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모닥불이 일렁이며 천막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인영이 비쳤다. 저런다고 숨겨질 덩치라고 생각하나?
“하…….”
토파즈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다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천막을 젖히자 그 앞에 양 무릎을 모으고 앉아 팔을 괴고 있는 인물이 보였다. 서늘한 바람이 새카만 머리칼을 흩트렸다.
“들어와.”
짧은 허락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나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속은 것 같았다. 커다란 성인 남자가 한 명 더 들어오자 천막 안이 순식간에 좁아졌다.
“감시를 하든지 잠을 자든지 알아서 해.”
토파즈는 한쪽 팔을 베고 자리에 누웠다. 내려다보는 시선에 뺨이 따가워질 즈음 꾸물꾸물 옆에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토파즈는 뒤척이다가 물었다.
“너, 이교도에 대해서 알아?”
“남들이 아는 만큼은요.”
흠, 낮게 목을 울린 카르옌이 물었다.
“베론의 납치 사건이 이교도와 관련 있다고 하셨죠?”
토파즈가 눈을 감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자기들끼리 추기경이니 교주니 뭐니 하면서 부르는 것 같던데. 교주가 마법사를 싫어한다는 말도 했어.”
“그들은 원래 마법사를 배척해요. 카스테로페의 아들인 초대 황제가 이 땅 위에 마법을 가져왔으니, 카스테로페를 모시는 다프닌교와 마법은 끊을 수 없는 관계죠. 다프닌교를 타도하고 새롭게 권세를 잡고 싶다면 당연히 마법을 부정할 거예요. 마법사를 잡아다 죽일 정도로 싫어한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지만요.”
“죽일 생각은 없어 보였어.”
그래서 더욱 의문스러웠다. 단순히 마법사에 대한 배척과 증오 때문에 사건을 벌였다기에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너무나 많았다.
“내가 그 교주였다면 귀찮게 납치를 사주하는 대신 차라리 살인을 했을걸. 게다가 정식으로 마법사가 되지도 못한 어린애들이 아니라 수도에서 이름 날리는 마법사들을 대상으로 삼았을 거야.”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잡혀간 피해자들은 마법사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평범한 사람에 가까웠어요. 꼭 일부러 그런 사람들만 노린 것처럼요.”
“…….”
대체 그들의 목적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들을 돕던 녹스와 탄자는…….
토파즈가 팔을 들어 눈가를 가렸다. 눈을 감아도 눈꺼풀 너머로 일렁이던 램프의 불빛이 겨우 차단되었다. 토파즈가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했다.
“거기에서 아는 사람을 봤어.”
“……동료였나요?”
“그래.”
“당신의 뒤통수를 쳤다던?”
“응.”
“이름이 뭔지 궁금합니다.”
토파즈가 눈을 떴다. 좁은 천막 안, 카르옌은 고작 한 뼘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다. 희미한 램프 불빛이 도자기처럼 매끈한 뺨을 한쪽만 노랗게 물들였다. 음영이 짙게 드리운 얼굴에 걸린 무표정이 낯설었지만, 한편으로는 늘 그런 얼굴이었던 것처럼 잘 어울렸다.
“탄자.”
“…….”
“누군지 알아?”
“압니다. 녹스의 길드장, 자안(紫眼)의 탄자.”
탄자의 이름을 발음하는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뺨을 한 번 쓸어내린 카르옌이 조용히 물었다.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뭘?”
“그 배신자 말입니다.”
“…….”
누가 보면 배신당한 사람이 카르옌이라고 착각할 만한 표정이었다.
이교도와 제국 최대 용병 길드가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못 알아들었을 리 없는데, 거기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녹스의 길드장이랑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는 전혀 묻지 않네.”
“그게 중요한가요?”
“중요하진 않지만, 너답지 않아서.”
카르옌은 늘 토파즈에게 시시콜콜한 질문을 해댔다. 넨베르그의 정보상 마샤를 만났을 때만 해도 어떻게 알게 된 사이냐, 친하냐 따위를 물어 오지 않았던가. 그랬던 녀석이 며칠 만에 철이 들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남은 가능성은 하나뿐이었다.
“너희, 내가 누군지 이미 알고 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