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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토파즈 (49)화 (49/110)

#049

낮이 점점 짧아지더니 이제는 바람의 온도가 달라졌다. 계절이 바뀌고 있다는 증거였다.

토파즈와 일행은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동부로 향하고 있었다. 마샤의 의뢰를 해결해 주고 얻어낸 정보에 따르면, 수배 전단 속 흑마법사가 가장 최근에 목격된 장소는 바로 동부의 도시 메이온이었다.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였다.

메이온으로 향하는 그럭저럭 쓸모있는 세 사람과 쓸모없는 한 사람의 여정은 제법 평화로웠다. ‘쓸모없는 한 사람’의 역할을 토파즈가 떠맡게 되었다는 점만 제외하면.

사르륵, 수풀을 가르는 기척을 느끼자마자 토파즈가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그러나 검을 뽑기도 전에 저지당했다. 토파즈는 제 검집 위에 가볍게 얹어진 새하얀 손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또 시작이었다.

‘토파즈님은 당분간 나서지 마세요. 아직 부상이 낫지 않으셨으니까요.’

납치 사건 직후 카르옌은 단호하게 말했다. 토파즈는 황당함에 헛웃음을 지었다.

‘이 정도가 무슨 부상이라고. 정 신경 쓰이면 네가 마법 써 주든가.’

‘아니요. 이번에는 치료 안 해 드릴 겁니다.’

‘……?’

상처 입은 어깨가 꼭 제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숨을 푹푹 쉴 때는 언제고, 대답하는 얼굴이 꽤 결연했다. 토파즈는 미간을 좁히며 그의 이마를 짚었다. 카르옌의 눈이 커졌다.

‘너 어디 아파?’

‘……아니요…….’

마법을 물 쓰듯이 쓰던 놈이 갑자기 몸을 사리니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을 뿐인데, 카르옌은 조금 전까지 짓고 있던 단호한 표정을 무너뜨리고는 눈가를 발긋하게 물들였다. 아무래도 어딘가 아파 보였다.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던 카르옌이 토파즈의 어깨를 짚어 왔다. 곧 어깨가 화끈거리더니 상처가 아물었다. 토파즈가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자 카르옌이 어깨를 문지르던 손을 떼어내며 말했다.

‘다 나은 게 아니에요. 겉만 겨우 꿰매 놓은 수준이니까, 회복될 때까지 절대 몸을 쓰시면 안 됩니다.’

그렇게 부상을 회복해야 한다는 명목 아래, 멀쩡한 검이 검집 안에서 녹슨 지가 벌써 며칠째였다.

카르옌은 겉만 꿰매어 놓은 수준이라고 말했지만 토파즈가 느끼기로는 완치에 가까웠다. 어깨를 돌리거나 크게 움직이면 뻐근하기는 했으나 이 정도는 부상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했다. 미약한 후유증 정도면 모를까.

예전에 용병 일을 할 때는 살이 파여 뼈가 드러나는 상태로도 임무를 잘만 끝마쳤던 토파즈였다. 토파즈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팔다리가 너덜거려도 돈 받은 일은 악착같이 끝내는 게 용병이라는 족속들이었다.

즉, 지금 말도 안 되는 과보호를 당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토파즈는 수풀에서 튀어나온 늑대를 닮은 마수와 유유히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카르옌의 등을 보며 어처구니없다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제발 말려 보라는 눈길로 옆에 서 있던 메르디나를 바라보았지만 메르디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짧게 말할 뿐이었다.

“뒤에 계십시오.”

정중한 어조였지만 결국 뒤로 빠져 있으라는 말이었다. 하란은 저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저놈에게는 기대도 안 했다.

네 사람의 전력을 생각하면 토파즈가 꼭 나서야만 하는 상황인 것은 아니었다. 이 중에 마수 몇 마리쯤 상대하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토파즈는 엄연히 그들에게 고용된 용병으로, 고용주를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 세상에 용병을 보호해 주는 고용주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토파즈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소중한 이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라던 스승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누군가 자신을 지켜 주겠다고 덤빌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런 건 안 가르쳐 주지 않았느냐고.

“동료를 걱정하는 게 과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들 원래 그렇게 걱정이 과하냐’는 물음에 나뭇가지를 줍던 메르디나가 건넨 말이었다.

며칠 내내 들짐승 한 마리도 상대하지 못하게 방해받던 토파즈는 야영 준비를 할 때마저 애물단지 취급을 받고 있었다. 모닥불을 피울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 오는 잡일거리마저 메르디나라는 동행이 붙고 나서야 허락되었다.

토파즈는 메르디나의 말을 조용히 곱씹다가 반박했다.

“동료의 실력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는데.”

“그건 그렇습니다.”

메르디나가 동조했다. 토파즈는 역시 그렇지 않냐며 그를 제 편으로 설득할 생각이었으나 안타깝게도 메르디나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토파즈님께도 그 말씀을 돌려 드리고 싶군요.”

“…….”

그러니까, 토파즈야말로 그들의 실력을 믿고 얌전히 있으라는 뜻 같았다. 토파즈가 한숨을 흘렸다. 살에 닿는 공기가 눅눅한 것이 곧 비가 올 것 같았다.

“엄밀히 따지면 너희는 내 동료가 아니라 고용주지.”

“그건…….”

메르디나가 말끝을 흐렸다. 고요한 암청색 눈동자가 토파즈를 눈에 담았다.

“조금 서운한 말씀이군요.”

“…….”

서운해? 다른 이들도 아닌 메르디나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더욱 놀라웠다. 그는 꼭 감정 표현을 절제하는 법을 교육받은 사람처럼 늘 평온했다. 속상하다느니 서운하다느니 하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카르옌과는 달리 속내를 대놓고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그만큼 조금 전에 들은 말이 진심으로 다가왔다. 차마 장난스럽게 넘겨 버릴 수가 없었다.

“……서운하게 했다면 미안하군.”

그러나 뒤통수를 친 옛 동료와 재회한 것이 고작 며칠 전이었다. 그들을 동료라고 인정하는 말이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결국 토파즈가 내뱉은 것은 속이 빈 사과뿐이었다.

나뭇가지를 한쪽 팔에 모아 쥔 메르디나가 물었다.

“베론에서 누구를 만나셨습니까?”

“…….”

토파즈의 얼굴이 굳었다. 반면 눈만 들어 올려 바라본 메르디나의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했다.

“무력이 제한된 상태였다고는 해도, 토파즈님께 아무나 상처를 입힐 수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몇 번이고 검을 맞대어 본 저와 하란도 작은 생채기 한번 내지 못하고 늘 패배하지 않았습니까.”

메르디나가 덧붙였다.

“다들 눈치채고 있을 겁니다. 말씀해 주시길 기다리고 있을 뿐.”

토파즈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렇게까지 표정 관리를 못 했던가. 어쩌면 그들이 토파즈를 싸고돌며 뒤로 물러나 있게 한 것도, 그가 평소와 다르다는 사실을 기민하게 눈치채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툭, 뺨을 감싼 손등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기어이 비가 내리려는 모양이었다. 메르디나도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보더니 나뭇가지를 로브 안쪽으로 감쌌다.

“비가 내립니다. 돌아가죠.”

토파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기껏 주운 마른 나뭇가지가 쓸모없어지는 일은 다행히도 벌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이 걸음을 서둘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천막이 보인다고 생각한 순간 가는 빗줄기가 잦아들었다.

벌써 그쳤나? 무심코 생각한 토파즈는 위화감에 뒤를 돌아보았다. 한 걸음 뒤에서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눈이 이상한가 싶어 팔을 뻗자 손끝에만 빗방울이 떨어졌다.

머리 위를 올려다보니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는 그대로였다. 그런데 떨어지는 도중 꼭 어떤 막에 부딪힌 듯 빗방울이 튕겨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기현상을 이해하지 못해 우뚝 멈춰 서 있는데 메르디나가 아무렇지 않게 설명했다.

“카르옌일 겁니다. 비 맞는 걸 싫어해서요.”

“……보통은 비가 좀 싫다고 이런 짓을 하진 않지.”

떨떠름한 대꾸에 메르디나가 조금 머뭇거렸다. 그 머뭇거림이 어쩐지 말썽꾸러기 동생을 감싸야 하는 운명을 짊어진 철든 누이의 얼굴 같았다.

“아시다시피…… 카르옌이 보통은 아닙니다.”

납득하며 걸음을 옮기자 머지않아 ‘보통이 아닌’ 이의 모습이 보였다.

기어이 카르옌이 직접 ‘보온’, ‘축소’, ‘경량’, ‘방어’ 마법식을 새긴 소형 천막 네 채가 커다란 나무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카르옌과 하란은 그 앞에서 식재료를 손질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하란이 요리를 하는데 카르옌이 돕겠답시고 옆에서 알짱거리는 모양새였다.

그는 손에 짧은 칼을 쥐고 어설프게 감자 껍질을 깎다가 토파즈와 메르디나를 발견하고 고개를 들었다.

“오셨네요. 별일은 없으셨나요?”

토파즈가 성큼성큼 걸어가 그의 손에서 칼을 빼앗았다.

“별일은 지금 네 손에서 벌어지고 있는 게 별일이고.”

“네? 아…….”

감자 껍질 대신 제 살이라도 깎을 생각인지 손가락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 꼴을 확인하고도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기에 토파즈가 혀를 찼다. 마른 천을 꺼내 다친 손가락을 쥐어 감싸며 꽉 압박했다. 고작 그것만으로 아픈지 카르옌이 낮게 신음하며 엄살을 떨었다.

‘넌 이런 애한테 칼을 맡겼냐’는 눈으로 하란을 흘겨보자 그가 억울한 얼굴로 가슴을 퍽퍽 쳤다.

“전 정말 억울합니다.”

“네가 안 시켰어?”

“하도 심심하다고 노래를 부르길래 시키긴 했죠. 다른 게 아니라 토마토 껍질 벗기는 일을 맡겼습니다. 근데 잠깐 눈을 뗀 사이에 토마토를 죄다 쥐어 터뜨려 놨지 뭡니까.”

하란의 말을 듣고 눈을 돌리자 한쪽 바닥에 쥐어터진 토마토로 추정되는 붉은 덩어리가 보였다.

“수습할 동안 고기에 소금만 좀 뿌려 놓으라고 했더니 이번에는 소금 절임을 만들어 놨어요. 소금값이 금값인데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금값 주면 되잖아, 하란. 날 이렇게 부끄럽게 만들어야겠어? 나도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 있는데…….”

카르옌이 서글픈 척하며 눈을 내리깔았지만 하란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가 눈을 부라렸다.

“부끄러운 줄 알긴 알아?”

결국 하란이 제발 가만히 있어 달라고 읍소해도 듣질 않아 그의 기준에서 쉬운 일을 하나씩 시키다 보니 감자 껍질 깎기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메이온의 여관 주인에게 감사의 의미로 받은 풍성한 식재료가 그렇게 카르옌의 손에서 차례차례 으스러졌다.

“그래도 검술을 배웠으니 칼질도 기본은 할 줄 알았습니다…….”

침통한 말에 절로 하란을 향한 동정심이 차올랐다. 토파즈는 이 와중에도 그의 손등을 간질이며 손장난을 치고 있는 말간 낯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대체 누가 누굴 지켜 주겠다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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