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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토파즈 (48)화 (48/110)

#048

그날은 축일이었다. 초대 황제 에페르테가 이 땅에 내려왔다고 알려진 유월 열다섯 번째 날, 거리는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수도에 있는 대신전에서는 황족과 귀족, 평민 신도들이 모두 모여 의례를 행했다. 기도를 하기 위해 찾아온 신도들로 신전 바깥까지 길게 줄이 늘어졌다.

그러나 영광이 흘러넘쳐야 할 그날, 제국은 영광 대신 수많은 피를 흘렸다.

기도가 한창인 이른 오전이었다. 날카로운 종소리가 울렸다. 수도에서 지난 30년 동안 울린 적 없는 고요의 종이 매섭게 울리고 있었다. 영원할 줄 알았던 평화가 잠드는 소리였다.

‘마수, 마수다!’

늘 카샤프에 있는 두 개의 성벽을 굳게 지키는 수도 경비대도 눈을 뜨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마수들이 한낮에 육지가 아닌 강을 통해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수도를 가로지르는 바이올렛 강은 넓고 깊어 꼭 바다처럼 보였다. 푸른 표면이 넘실거리더니 그 안에서 마수들이 꿈틀거리며 나타났다. 뱀을 닮은 그것들은 뱀보다 수십 배는 컸다. 움직이는 속도가 매우 재빨랐으며 독까지 품고 있었다.

성스러운 기도 소리로 가득하던 거리 곳곳이 비명으로 뒤덮였다. 악몽과도 같은 하루였다.

카샤프를 수호하는 수도 기사단과 마법사단은 물론, 신전 기사단과 마탑의 마법사들까지 모두 나서서 마수를 진압했다. 시민들은 마수의 침입을 막는 결계가 쳐져 있는 ‘두 번째 방벽’ 안으로 대피했다. 그럼에도 예상치 못한 습격에 많은 피가 흘렀다.

그날 수도를 물들인 피에는 황족들의 것도 있었다. 황제의 자식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첫째는 앞장서서 검을 들고 시민들을 지키다가 죽었으며, 둘째는 시민들의 대피를 돕다가 마수가 들이받은 다리가 무너지며 강에 빠져 죽었고, 셋째는 가장 먼저 몸을 피해 무사히 황궁으로 돌아왔으나 마수의 독에 중독된 뒤라 며칠을 앓다 죽었다.

황제의 자식 중 살아남은 것은 넷째뿐이었다. 어릴 때부터 유명한 방랑벽으로 수도에 붙어 있질 않아 축일의 기도 의식마저 불참한 괴짜 황녀, 엘제니아.

소식을 들은 엘제니아가 급히 황궁으로 돌아왔을 때는 신관들의 노력으로 간신히 숨이 붙어 있던 셋째마저 숨을 거둔 뒤였다.

한꺼번에 세 자식의 장례를 치른 황제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병을 얻었고 그 자식들만큼이나 갑작스럽게 승하했다. 황궁에 남은 사람이라고는 누구도 후계자가 되리라 여긴 적 없던 열아홉 살짜리 황녀뿐이었다.

운명이 엘제니아의 머리 위에 왕관을 씌워 주었으나 조금도 영광스럽지 않았다. 엘제니아는 가족과 함께 그토록 갈망했던 자유를 잃었다. 자유 대신 주어진 권력이 그에게는 버겁기만 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황궁에는 반가운 얼굴이 단 하나 있었다. 출신은 보잘것없었으나 오직 실력만으로 명성을 쌓고 돌아와 황제의 검이 된 젊은 기사였다. 이제 곧 엘제니아의 검이 될, 어린 시절을 함께한 친우.

‘황녀 전하. 나가고 싶으십니까?’

엘제니아가 황녀로 불린 마지막 밤이었다. 로디언은 무엄하게도 황녀의 침실로 숨어 들어와 그렇게 물었다. 마치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달빛 아래에서 빛나는 검은 머리칼은 그때처럼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러나 철없던 시절의 페이지는 이미 넘어가 버렸다. 상복을 입은 엘제니아가 창백한 얼굴로 되물었다.

‘왜 그런 걸 물어?’

‘기회는 오늘 밤뿐이니까요.’

엘제니아의 눈이 흔들렸다. 즉위식 전날이었다. 이미 모든 절차가 준비되어 있었고 내일이면 엘제니아는 정식으로 황제가 된다. 그런데 차기 황제의 도망을 돕겠다니. 그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 않을, 어쩌면 가장 잘 알고 있을 황제의 친위대 기사가.

‘네 임무를 저버리겠다는 거야?’

‘제 임무는 전하를 지키는 것입니다.’

‘곧 황제가 될 나를 지키는 거겠지.’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푸른 눈이 엘제니아를 올려다보았다. 전 대륙을 돌아다니면서도 이보다 더 푸르고 올곧은 눈은 발견하지 못했다.

‘내가 도망치면 넌 어떡할 건데. 네가 쌓아온 모든 명예가 무너질 거야.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지.’

‘상관없습니다. 전하를 위해 죽을 수 있다면 전하의 기사로서 더없는 영광일 것입니다.’

‘…….’

‘오늘이 지나면 전하는 다시는 자유로이 황궁 밖으로 나서지 못하실 겁니다. 행동 하나하나에 수많은 눈이 따라붙을 테고, 원치 않는 혼인도 하셔야 할 겁니다. 누구도 갖지 못한 부귀와 영화를 누리시겠지만 전하께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압니다.’

그러나 그 순간 엘제니아에게는 상관이 생겼다. 엘제니아는 눈을 질끈 감고 싶은 심정을 참아내며 입을 열었다. 다행히도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볼품없이 떨리는 대신 단호하게 들렸다.

‘아니. 난 도망 안 가, 로디언.’

‘…….’

‘아마 좋은 황제가 되지는 못할 거야. 난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피는 언덕을 알고, 신분패 없이 국경을 넘는 법도 알지만 정치는 하나도 모르는 이름뿐인 황녀였으니까. 하지만…….’

또렷해진 엘제니아의 시선이 충직하게 무릎을 꿇고 있는 기사에게 닿았다. 그가 제게 바치는 것이 오직 충성뿐만이 아님을 은연중에 눈치채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오늘이 지나면 다시는 그 마음을 허락할 기회가 없으리라는 것도. 엘제니아는 황제가 되어야 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 후계를 낳아야 했다. 모두 알면서도 엘제니아는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땅엔 내가 지켜야 할 것들이 있어. 로디언, 네 목숨도 그중 하나겠지.’

‘……전하.’

‘내가 원했든 아니든 황제의 딸로 태어나 누린 권리가 있어. 어찌 의무를 외면할까. 혼란스러운 나라를 두고 비겁하게 도망칠 수는 없어.’

‘……엘제니아.’

오랜만에 불리는 이름에 가슴 한쪽이 뜨거워졌다. 무엄한 행위였지만 어린 그들 사이에서는 아니었다.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일종의 약속이었다. 함께 바깥으로,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자는…….

‘당신이 제국을 지킨다면 당신은 누가 지킵니까. 황녀도, 황제도, 그 무엇도 아닌 엘제니아가 그 안에 있지 않습니까.’

같은 시절을 떠올린 듯 로디언의 목소리에도 서글픔이 감돌았다. 엘제니아는 뺨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눈물을 거칠게 닦아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 다시는 자유로워질 수도 없다. 아마 죽는 순간까지 이 넓은 새장 속에서 가장 화려한 새가 되어 살아가야 하리라.

‘너.’

‘…….’

‘네가 날 지켜, 로디언. 황녀도, 황제도 아닌 엘제니아를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너뿐이니까.’

자신조차 그 아이를 잊을 것이다.

그렇게 열아홉의 엘제니아는 왕관을 쓰고 황제가 되었다. 영광을 상징해 월계관이라고 불리는 황제의 관은 찬란히 빛나되 목이 부러질 만큼 무거웠다.

엘제니아는 제가 가진 권력만을 탐하는 남자와 결혼해 후계자를 낳고, 오직 군주로 사는 데만 몰두했다.

그러나 하필이면 혼란한 시절이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전 제국에서 마수가 날뛰고 국경선에서는 크고 작은 전쟁이 일어났다. 기사와 마법사의 갈등이 극으로 치닫고 용병들은 멋대로 날뛰었다. 이교도의 선동으로 종말론까지 횡행해 백성들은 혼란스러워했다.

굶어 죽은 백성의 숫자를 헤아릴 때는 심장이 선득했고, 내 편이라 믿었던 신하의 배신에는 치가 떨렸다. 사소한 줄 알았던 잘못된 선택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는 것을 볼 때마다 자신의 모자람을 실감했다. 모든 혼란이 황제의 부덕 탓 같았다.

그래도 다음 날에는 다시 고개를 꼿꼿이 들고 옥좌에 앉아야 했다. 황궁 구석에 앉아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저울질했다. 어울리지 않는 왕관을 쓴 엘제니아는 고작 십여 년 만에 닳고 낡아 버렸다. 로디언은 묵묵히 그 곁을 지켰다.

‘방금 이혼이라고 하셨습니까, 폐하?’

이혼과 재혼은 엘제니아가 황제가 된 후 처음으로 부린 욕심이었다. 국서의 가문인 세이드 공작가와 척을 지고 수많은 정치적 부담을 껴안았다. 외도라는 지저분한 추문도 기꺼이 감수했다.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로 존경받아 온 로디언의 명예에도 흠집이 났다. 실력으로 오른 친위대장 자리의 정당성을 의심받고 사생아라는 이유로 모욕당했다.

그럼에도 황제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종말론 따위를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세상은 끝나지 않더라도 이 목숨은 언젠가 다할 터였다. 죽는 순간까지 날개가 꺾인 채 살아야 한다면 마음만이라도 외면하지 말고자 결심했다.

그리고 제국력 999년. 황제가 복중에 품은 아이가 위대한 마법사로 태어나리라는 계시가 내려왔다.

제국력 1000년 1월 1일. 태어난 아이는 찬란한 금발과 푸른 눈, 위대한 마법을 품은 채 태어났다. 마치 새 시대의 상징처럼.

“왜 나처럼 무능한 자가 황제가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늘 생각했어.”

“조금도 무능하지 않으십니다. 한 사람의 어깨에 두기에는 너무 과한 짐을 지고 계실 뿐입니다.”

엘제니아가 손을 뻗어 로디언의 뺨을 쓰다듬었다. 이 얼굴을 꼭 닮은 아들은 제 태를 빌려 태어났으나 자신과는 조금도 닮지 않았다. 외모도, 성격도, 빛나는 재능마저도.

“그런데 카르옌이 태어났을 때는 이런 생각이 들었어. 신은 이 아이를 다음 대 황제로 만들기 위해 내게 잠시 옥좌를 맡긴 건지도 모르겠다고.”

카르예니프는 걸음마보다도 마법을 먼저 깨우친 아이였다. 꼭 어머니의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모든 것을 이해한 채 태어난 것 같았다. 로디언이 속삭이듯 물었다.

“만약 맞다면, 카르옌을 원망하십니까?”

“아니.”

설령 신이 카르예니프를 위해 자신을 이용한 게 맞더라도, 제 사랑스러운 아이를 원망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단지 운명에 휩쓸린 그 아이가 가여울 뿐이었다. 황제가 조용히 눈을 빛냈다.

“로디언. 1황자와 황녀의 행적을 모두 조사해 내게 직접 보고해. 그리고 미리암 공작과 아히네스 백작에게 비밀리에 전령을 보내야겠다.”

1황자와 황녀 역시 엘제니아가 직접 낳은 아이였다. 그들의 아버지인 세이드 대공을 향한 증오와 별개로, 두 아이를 향해서는 애정과 죄책감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자신은 하루아침에 친부를 궁 밖으로 쫓아내고, 외도를 했다는 추문을 몰고 다니더니 끝내 후계자 자리까지 갑자기 나타난 이부동생에게 물려 주려는 못난 어머니일 테니까.

미안한 만큼 더욱 믿어 주고 싶었다. 모든 심증이 황궁 내부에 있을 협력자의 존재를 가리킬 때에도, 설마 제 아이들만은 아니리라 눈을 감았다.

황제는 오랜 시간 동안 결단을 내리지 못했고 그 결과 또 한 번 아들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자신이 치러야 할 대가를 카르니예프가 치르게 된 것이었다.

이제는 감았던 눈을 떠야 할 때였다. 신의 손길이 닿은 아들에게 평범한 인간인 제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이 무거운 왕관을 물려주는 일뿐이더라도.

“명을 따르겠습니다, 폐하.”

로디언이 그의 손등에 깊이 입을 맞추었다. 손등을 타고 온기가 퍼졌다. 이 차가운 새장 속에서 유일하게 온도를 품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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