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
“아, 대장님!”
익숙한 부름에 남자가 몸을 돌렸다. 차분한 흑발에 푸른 눈을 가진 남자였다.
그는 황제의 친위대 대장이자 황가의 가장 올곧은 검이라고 불리는 남자였다. 현 황제 엘제니아의 어린 시절 친우이며 한때 제국을 발칵 뒤집어 놓은 재혼 상대이기도 했다.
25년 전, 황자와 황녀의 아버지인 세이드 대공과 이혼한 황제가 친위대장과 사랑에 빠졌다는 염문은 호사가들의 화젯거리였다.
황제가 친위대장과 불륜에 빠져 대공과 이혼한 것이다, 그게 아니라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연인이었는데 정략혼 때문에 잠시 헤어졌던 것이다 등 사실 여부를 알 수 없는 소문이 온 제국을 휩쓸었다.
황제와 충성스러운 기사의 사랑 이야기는 제국민들에게 꽤 친근한 소재였다. 초대 황제와 그의 반려 이야기 때문이었다.
신의 두 번째 아들, 에페르테는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기를 좋아했다. 그는 어느 날 마수와 싸우느라 고군분투하는 기사 한 명을 보게 되었고, 그 기사를 갸륵히 여겨 인간의 모습으로 현신했다.
에페르테는 기적을 일으켜 마수를 몰아냈다. 그리고 신의 곁으로 돌아가는 대신 이 땅에 남았다. 기사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에페르테는 스스로를 황제로 칭하고 그 기사를 평생의 반려로 삼았다. 그것이 에델티움 제국의 건국 신화였다.
제국민들은 그들의 나라가 사랑 때문에 탄생했다는 신화를 몹시 좋아했다. 그래서 기사와 사랑에 빠진 엘제니아 황제에게도 그 신화를 덧씌워 낭만적이라고 여겼다.
물론 친위대장, 로디언이 한미한 남작가의 사생아라는 사실을 아는 일부 귀족들의 입장은 달랐지만.
“무슨 일이지?”
로디언이 묻자 부하가 손에 들고 있던 종이 꾸러미를 두 손으로 내밀었다.
“대장님 앞으로 온 우편물입니다. 맨 위에 있는 것부터 확인해 주십시오. 테투스 자작가에서 보낸 급보입니다.”
“테투스 자작?”
“예. 자작가에서 직접 보낸 전령이 꼭 대장님께 전달해 달라고 여러 번 당부했습니다. 안전 검사는 마쳤습니다.”
“그래, 수고했네.”
부하를 돌려보낸 로디언은 우편물 뭉치 가장 위에 있는 서신을 뒤집어 확인했다. 붉은색의 [급보] 표시와 함께 원 안에 ‘X’ 자로 두 선이 교차한 그림이 찍혀 있었다. 허락받지 않은 자가 뜯으면 내용이 백지가 되는 마법이 걸려 있다는 의미였다. 로디언은 의아해졌다.
테투스 자작이라면 분명 제국 서부의 자작가였다. 로디언은 테투스라는 이름이 자신과 인연이 있었는지 되짚어 봤지만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비밀리에 서신을 주고받을 만한 접점이라고는 없는 곳인데…….
그러나 집무실 앞에 다다랐을 때, 로디언은 무언가를 깨닫고 급한 손길로 우편을 들쳐 보았다.
테투스 자작은 아히네스 백작가의 가신 중 하나였다. 아히네스 백작가는 교황을 비롯한 고위 신관들을 여럿 배출해 낸 독실한 성직자 가문이었다. 그리고 예순이 넘은 현 아히네스 백작의 일곱 자식 중 가장 잘 알려지지 않은 막내의 이름이 바로…….
“하란.”
그의 아들, 카르예니프의 절친한 친구가 아니었던가. 로디언은 나머지 우편물을 모두 집무실 책상 위에 쏟아 놓고 서신을 뜯었다. 역시나 서신은 테투스 자작의 이름으로 왔지만 보낸 사람의 이름과 직인은 아히네스 백작의 것이었다. 서신을 읽던 로디언의 눈가가 잘게 떨렸다.
“……넨베르그라고?”
서신의 내용은 북동부 넨베르그 신전에 테투스 자작가의 차남 이름으로 된 신관 추천서 한 장이 들어왔으나, 테투스 자작가에서는 그런 추천서를 쓴 적이 전혀 없다는 내용이었다.
테투스 자작가의 차남은 신학교 출신의 고위 신관으로, 그의 이름과 서명을 아는 자 중 태연하게 남의 가문 이름을 사칭할 만한 사람은 세상에 하란 아히네스뿐이라는 결론이었다.
즉, 하란이 넨베르그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아마도 카르예니프와 함께.
로디언은 이 서신이 함정이거나 하란이 카르예니프를 배신했을 가능성을 셈해 보았지만 일단 그 가능성은 뒤로 미뤄두기로 했다. 그리고 곧장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지나가며 마주친 시종이며 기사들이 일일이 인사를 해 왔지만 평소처럼 받아주지 못하고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황궁 안이라서 그의 속도대로 달릴 수 없음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로디언은 이 시각 황제가 있을 곳을 단번에 찾아냈다. 수십 년간 매일 같이 쏟아지는 격무에 파묻혀 사는 황제가 마침 짧은 휴식을 취할 시간이었다.
“폐하께서는?”
“안에 계십니다.”
유리 온실 바깥을 지키고 있던 친위대원들이 경례를 하며 문을 열어 주었다. 로디언이 온실 안으로 들어갔다.
황제궁 후원에 지어진 온실은 무척 넓었다. 쉽게 보기 힘든 각국의 꽃과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고, 유리에 비친 햇살이 푸른 이파리 위에 조각조각으로 부서져 반짝거렸다.
이 안에 들어서면 마치 황궁이 아닌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황제가 이곳을 좋아하는 거겠지.
식물의 생육 환경에 따라 구역별로 나뉘어 관리되는 복잡한 온실에서 로디언은 조금도 헤매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개울처럼 맑은 물이 흐르는 수로와 화려한 분수를 지나쳤다. 이내 이 온실에서 가장 커다란 나무가 나타났다.
잎이 넓은 나무 아래, 덩그러니 소파가 놓여 있었다. 언뜻 보면 색이 바랜 것처럼 보이는 낙엽색 소파였다. 그 위에 누군가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허리춤까지 오는 구불구불한 금발이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었다. 희다 못해 창백해 보이는 얼굴에 마른 뺨을 가진 여자였다.
무성하게 자라는 나무들과 달리 시들어 가는 황제. 그의 머리 위에 얹어진 찬란한 왕관이 그의 생기를 모두 빨아들이는 것만 같아 로디언은 종종 두려웠다.
“폐하.”
일부러 기척을 숨기지 않으며 다가간 로디언은 대답 없는 황제의 곁에 천천히 무릎 꿇었다. 하나뿐인 주군이자 사랑하는 이의 뺨을 쓰다듬는 손길이 애틋했다.
“엘제니아.”
이름을 부르자 황제, 엘제니아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애초에 잠든 적도 없었다는 듯 선명한 시선이 로디언을 응시했다.
“들으셔야 할 소식이 있습니다. 카르옌의 흔적을 찾은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로디언은 엘제니아가 몸을 일으키는 것을 도왔다.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나 앉은 엘제니아가 로디언을 내려다보았다. 로디언은 맞잡은 손을 더 힘주어 잡았다 놓으며 품 안에서 서신을 꺼냈다. 찬찬히 서신을 읽어 내리는 엘제니아의 입술이 떨렸다.
엘제니아와 로디언의 아들 카르예니프가 행궁으로 향하던 중 사라진 지가 벌써 한 달째였다. 카르예니프의 측근인 하란, 메르디나와 함께 호위로 보낸 십수 명의 인원들까지 모두 증발한 것처럼 사라졌다.
비밀리에 급하게 결정된 이동이었다. 2황자궁이 안전하지 않다는 판단하에 출발 시각도, 동선도 비밀스럽게 다뤄졌다. 수도의 바로 옆 도시 바이델에 있는 행궁에는 황제가 직접 믿을 수 있는 이들로 선별한 시종과 의사, 신관들이 황자의 회복을 돕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2황자 일행은 예정대로 행궁에 도착하지 못했다. 연락을 받은 직후, 황제와 로디언은 은밀히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눈을 동원해 카르옌의 흔적을 추적했다.
누군가의 습격을 받았든 내부에 배신자가 있었든, 분란이 있었다면 뭐라도 발견되었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카샤프와 바이델 사이의 모든 길목을 뒤져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수도 마법사단 단장의 보고에 따르면 흔적을 지우는 종류의 마법이 쓰였을 거라고 했다.
황제는 아들의 생사조차 모르게 되었다.
“……무사했구나.”
황제의 입에서 안도 섞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늘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로디언이 그 어깨를 끌어안았다.
“분명 무사할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이런 곳에서 죽을 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한 살 생일, 카르예니프의 그릇이 손상되었을 때도 모두 그 아이가 세 살이 되기 전에 죽거나 미치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카르예니프는 스물두 살이 되도록 꿋꿋이 살아남았다.
그 아이에게는 분명 신의 손길이 닿아 있었다. 그것이 축복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으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 아이의 불행은 모두 내 탓이지.”
엘제니아는 스스로를 황제라는 자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선황의 막내딸로 태어났으나 뛰어난 손위 형제들이 있었던 덕분에 한 번도 후계자로 주목받은 적 없었다. 엘제니아는 그 사실이 불만족스러웠던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었다.
엘제니아는 어릴 때부터 황궁 바깥을 동경해 어떻게 하면 몰래 궁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 골몰하느라 어린 시절을 다 보낸 소녀였다.
부황이 곳곳에 심어 놓은 눈들을 피해 함께 어울려 준 유일한 소년이 바로 당시 호위 기사였던 로디언이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로디언은 엘제니아 대신 수없이 불려가 벌을 받았고 결국에는 유배되듯 수도를 떠나야 했다.
그러나 황궁에 있던 유일한 친우를 잃은 뒤 엘제니아의 방랑벽은 더욱 심해졌다. 연금을 명하고 기사 수십 명을 호위로 붙여도, 황녀궁 앞으로 배당된 예산을 삭감하겠다고 협박해도, 너 대신 시종에게 책임을 묻겠다고 겁줘도 소용없었다.
담을 넘거나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위험한 탈출을 감행하는 것은 다반사였다. 그마저 못하게 지척에서 감시하면 식사를 거르며 궁 안에서 시름시름 말라 갔다.
예산 삭감 따위는 코웃음 쳤고 황녀궁에는 시종이 필요 없다며 모두 해고해 제 형제의 궁으로 보냈다. 그리고 제 손으로 대충 머리를 감고 산발한 채 옷을 아무렇게나 뒤집어 입고 다니며 황궁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엘제니아를 업어 키운 유모는 그 품위 없는 행동에 놀라 눈물까지 흘렸다.
차라리 자신의 황녀 직위를 박탈해 달라고 사흘 밤낮 동안 무릎을 꿇고 청했을 때는 결국 부황이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황제가 엘제니아의 행동을 눈감아 주기 시작한 것은 그가 열일곱 살 때의 일이었다.
엘제니아는 수도를 넘어 제국 전역, 그리고 제국 밖으로까지 외유를 다녔다. 상단 행렬에 끼어 평민 신분으로 국경을 넘거나 가방 하나만 달랑 메고 험난한 레프 산맥을 넘기도 했다. 가끔 인사도 없이 곁을 떠난 친우가 떠오를 때도 있었지만, 그때를 제외하면 엘제니아는 더없이 자유롭고 행복했다.
셋이나 되던 그의 형제들이 한날한시에 모두 죽고, 운명이 그를 황제의 자리로 떠밀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