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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토파즈 (46)화 (46/110)

#046

카르옌은 창문을 열었다. 늘 들고 다니던 주머니에서 손가락 두 마디 길이의 물빛 피리를 꺼내 입술 사이에 물었다. 후욱, 숨결이 짧은 관을 통과했으나 피리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곧 작은 새들이 창가로 몰려들었다. 카르옌이 창밖으로 팔을 뻗었다. 새들은 긴 가지처럼 뻗어 나온 흰 소매 위로 몸을 내렸다.

아름다운 사내가 잠에서 깨어나 새들을 불러 모으는 장면은 꼭 동화 같았다. 새들을 훑는 시선이 냉정하게 가라앉아 있지만 않았다면 더욱 그랬을 것이다.

“전하, 그건 위험한……!”

“쉿.”

하란의 반발을 차단한 카르옌은 손끝으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새의 하얀 깃을 쓰다듬듯 건드렸다. 이내 새의 까만 눈동자가 푸른 빛으로 물들었다. 새는 제자리에서 몇 번인가 날갯짓하더니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동시에 카르옌의 몸이 뒤로 풀썩 쓰러졌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하란과 메르디나가 각자 한쪽 어깨를 잡아 지탱했다.

꼭 감겨 있던 카르옌의 눈이 떠진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가 한쪽 입꼬리만 당겨 웃었다.

“찾았어.”

분명 아름다웠으나 어딘가 스산하게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세 사람은 곧장 토파즈의 흔적을 뒤쫓아 갔다. 그의 흔적은 베론을 둘러싸고 있는 산으로 이어졌다.

“바퀴 자국은 여기서 끊겼어.”

흙길에 나 있는 덜 지워진 바퀴 자국은 산속 한가운데에서 끊겼다. 주위를 둘러봤지만 마차는커녕 인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나무가 빼곡히 들어차 있을 뿐이었다.

카르옌이 팔을 들어 하란과 메르디나가 더 나아가지 못하게 막았다. 그리고 앞으로 팔을 뻗어 손끝을 툭, 튕겨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파동이 느껴졌다.

“결계야.”

“……!”

“제대로 찾아왔다는 소리지.”

“풀 수 있겠어?”

“그럴 시간 없어.”

“뭐? 너…….”

결계를 없애기 위해서는 결계의 매개가 되는 물건을 찾아 부수는 방법과 결계를 펼친 수식을 알아내 반전하는 방법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힘으로 눌러서 깨는 것은 그중 가장 무식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카르옌은 그 무식한 방법을 아무렇지 않게 펼칠 수 있는 마법사였다. 카르옌은 결계가 쳐진 지점에 손을 얹고 마나를 쏟아부었다. 보이지 않는 힘의 충돌이 일어났다. 카르옌은 뺨이 희게 질릴 정도로 힘을 쏟아냈다.

이내 얇은 휘장이 벗겨진 것처럼 눈앞의 광경이 변했다. 아마 이 결계를 친 마법사는 지금쯤 영문도 모르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겠지만 상관없었다. 카르옌 역시 누군가 손으로 심장을 쥐어짜는 통증을 느껴야 했다.

조금 전까지 숲처럼 보였던 공간이 마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법한 오솔길로 바뀌었다. 바퀴 자국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나무 사이로 공터가 펼쳐져 있었다. 그곳에 세워진 천막과 마차 따위가 보였다.

풀풀 날리는 흙먼지 사이로 시커먼 옷을 입은 이들이 정신없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저 소란의 중심에 누가 있을지는 뻔했다. 카르옌은 입가를 타고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걸음을 옮겼다.

* * *

“집을 나선 지 네 시간 만에 이런 꼴을 하고 계시니, 마음이 아프네요.”

토파즈의 양손에 매달려 있는 구속구를 보자마자 카르옌이 꺼낸 말이었다. 누가 할 말인지. 그냥 여관에서 잠이나 자고 있을 것이지, 왜 또 피죽도 못 얻어먹은 얼굴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누굴 가출 소년처럼 얘기해.”

“차라리 가출 소년이 낫다는 생각이 들어요.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잘만 보살펴 주면 집 나갈 생각은 하지 않을 테니까요.”

카르옌은 구속구를 살펴보려는 듯 토파즈의 손을 잡아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움찔한 토파즈가 손을 놓으려 하자 오히려 깍지를 끼며 손을 꼼짝하지 못하게 했다.

아무리 마나를 운용하지 못한다고 해도 이십 년 가까이 검을 쥐고 단련해 온 몸이었다. 힘을 쓰면 이 정도는 쉽게 뿌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토파즈는 굳이 그러지 않았다. 구속구를 들여다보며 심각한 낯을 하는 카르옌을 보자 탄자를 만난 뒤 날이 서 있던 감각이 조금씩 누그러들었기 때문이었다.

“범죄자에게만 사용되는 마나 구속구네요. 최신식은 아니지만요.”

카르옌의 말에 따르면 최신식 마나 구속구는 벽돌처럼 생긴 네모난 덩어리에 양손을 끼우는 방식이라고 했다. 만약 오늘 토파즈의 손목에 채워진 것이 최신식이었다면 싸우기 더 곤란할 뻔했다.

“어쩌다가 이런 게 밖에 수십 개씩 버젓이 나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는 조심하는 편이 좋겠어.”

카르옌의 손가락이 토파즈의 손목과 구속구 사이의 좁은 틈을 파고들었다. 여전히 경계심 따위는 개나 준 얼굴이었다. 토파즈가 미간을 좁히며 경고했다.

“이런 구속구를 찬다면 너도 충분히 인질이…….”

툭. 말을 끝맺기도 전에 오른손의 구속구가 풀리며 아래로 떨어졌다. 토파즈는 바닥으로 떨어지는 구속구를 반사적으로 받아냈다. 이내 왼손을 얽매고 있던 구속구마저 풀렸다.

“납치 시도라면 저도 적잖이 당해 봤습니다만, 저를 인질로 삼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거든요.”

카르옌은 어떤 방해물도 없이 훤히 드러난 손목을 문지르며 눈을 접어 웃었다.

“……너 이런 것도 풀 수 있었어?”

“제가 못 하는 일은 자는 사이에 벌어지는 토파즈님의 기행을 막는 정도랍니다.”

“…….”

평소처럼 웃고는 있지만 어딘가 날이 선 태도였다. ‘기행’에 방점을 찍은 말속에도 칼이 담긴 것처럼 느껴졌다.

“다행히도 아직 마나를 차단하는 물질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 족쇄도 결국 누군가가 마나를 구속하는 마법을 걸어둔 마도구일 뿐이에요. 모든 마법은 원칙적으로 더 상위의 마법으로 파훼할 수 있으니 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덧붙인 설명 역시 네 걱정이나 하라는 뜻으로 들렸다. 평소와 똑같이 조곤조곤한 말투였는데도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가 뭘까 고민하던 토파즈는 곧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카르옌은 아까부터 자신과 눈을 전혀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그 사이 하란과 메르디나는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용병들을 제압하고 천막과 마차를 일일이 뒤지기 시작했다.

“저쪽 천막에서 의뢰인의 딸을 발견했습니다. 그 외에도 천막과 마차 안에 스물이 넘는 인원이 갇혀 있었습니다.”

“상태는?”

“손발이 묶인 것 외에 외상은 없지만 이상하게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같이 있던 다른 이들도 모두 동일합니다.”

운이 좋았다. 아마 내일 날이 밝은 뒤에 왔다면 다른 곳으로 옮겨져 일이 복잡해졌을 것이다. 혹은 살릴 기회를 영영 잃었거나.

“강제로 재우는 약을 쓴 것 같았어.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깨어날 거야. 그리고 도망친 놈들이 있는데…… 아마 쫓아가도 이미 늦었을 거야.”

메르디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혹시 모르니 주위를 확인해 보겠다며 하란과 함께 다시 말에 올라탔다.

반면 카르옌은 토파즈의 것은 손수 풀어주더니 마차 안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죄다 똑같은 구속구를 차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금세 질린 얼굴을 했다. 역시 평소와 다름없는 척하고 있지만 어딘가 비틀린 태도가 느껴졌다. 토파즈가 설마 하며 물었다.

“너한테 말없이 나가서 화났어?”

“……화요? 제가 왜 토파즈님께 화를 내겠습니까.”

카르옌이 뺨을 실룩거리며 대꾸했다. 토파즈는 무심코 그 뺨 위에 손을 올렸다.

“화 난 것 같은데.”

토파즈가 어린애 살갗처럼 부드러운 뺨을 쓰다듬었다. 이미 닦아낸 것 같았지만 입술에서 희미한 혈향이 묻어났다. 어떻게 찾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무리해서 마법을 쓴 게 뻔했다.

카르옌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토파즈의 손바닥 안에 얼굴을 파묻었다. 늘 실실 웃고 다녀서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제법 차갑게도 보이는 인상이었다.

“저는 걱정을 한 겁니다, 토파즈님.”

“…….”

카르옌의 목소리가 조금 떨린 것처럼 들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꼭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네가 왜 나를 걱정해. 그럴 시간에 네 걱정이나 하지.”

“토파즈님도 제 어깨 조금 찢어졌을 때 꼭 임종 앞둔 사람 보듯이 어쩔 줄 모르셨잖아요.”

토파즈가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그랬다고? 아니, 그보다…….

“너랑은 다르지.”

딱 잘라 말하자 카르옌이 코웃음을 쳤다.

“몰랐는데, 토파즈님은 불사라도 되시나 봅니다.”

“…….”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다고 배배 꼬인 말이 펴져서 들리는 건 아니었다. 토파즈가 미간을 좁혔다. 카르옌이 손을 뻗어 구겨진 미간 사이를 꾹꾹 문질렀다. 토파즈는 그 서슴없는 행동이 황당했지만 이어진 말에 주의를 빼앗겼다.

“토파즈님이 강한 건 압니다. 하지만 강하다고 해서 무적은 아니지 않습니까. 똑같이 다치고, 죽을 수도 있는 사람인데……. 당신은 너무 무모하십니다.”

이상했다.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기라도 하는 것 같은 눈앞의 마법사가.

“납치당한 사람을 구해 달라는 의뢰였지 근거지를 박살 내 달라는 의뢰가 아니었습니다. 그깟 의뢰 목숨 걸고 들어줄 필요도 없었고요. 정보는 다른 데서 얻으면 그만이니까요. 굳이 해결하고 싶었다면 더 안전하게 접근할 방법도 있었을 겁니다. 하다못해 저희와 함께 간다는 선택지도 있었는데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드셨죠.”

“…….”

“토파즈님은 그냥 어떻게든 빠져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신 거예요. 아니, 그러다 못 빠져나와도 그만이라고 생각하셨던 겁니다. 제 말이 틀린가요?”

내리깐 눈이 토파즈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그의 눈가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자신의 말이 틀렸냐고 물으면서도 꼭 틀렸다고 말해 주기를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토파즈는 한 마디도 반박하지 못했다. 카르옌의 말이 무척이나 정확해서, 마치 치부를 들킨 기분이었기에.

“저를 보호 대상으로 여겨 주시는 게 기뻤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제가 잘못 생각한 것 같아요. 호의 때문이든 의뢰 때문이든, 당신이 지켜야만 했던 사람은 무수히 많았을 테고 그중 누구도 특별하지 않았을 텐데.”

카르옌은 미간 사이를 꾹 짓누르던 손끝을 내려 토파즈의 눈가를 쓸었다. 토파즈는 그가 자신의 얼굴을 제멋대로 만지작거리도록 내버려 두었다.

“당신은 정작 누군가에게 걱정받고, 지켜져 본 적은 없었던 거예요.”

“…….”

“그러니 앞으로는 제가 곁을 지켜드려야겠습니다. 이렇게 상처 입으시는 일 없게.”

카르옌이 혼잣말처럼 낮게 읊조렸다. 마냥 곱지 않은 손이 피가 흐르는 토파즈의 뺨을 쓰다듬었다. 간지러운 감촉이 어쩐지 거북스러워 고개를 비틀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카르옌이 꼭 그것마저 막으면 울어 버릴 것 같은,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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