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45)화 (45/110)

#045

하나로 땋아 내린 백발과 그만큼 흰 뺨, 시원하게 뻗은 눈매. 오랜만에 마주한 얼굴은 4년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토파즈가 기억하는 그대로의 탄자였다.

탄자가 지금 이곳에 있다는 것은 두 가지 사실을 나타냈다.

첫째, 베론에서 일어나고 있는 납치 사건의 뒤에는 용병 길드 녹스가 있었다. 그것도 일부의 일탈이 아니라 길드장이 직접 나설 정도로 본격적인 개입이었다.

둘째, 녹스는 이교도라는 집단과 손잡고 무슨 짓인가를 벌이고 있었다.

‘최근에 받아 오는 의뢰들이 좀 이상해. 우리한테 숨기는 것도 늘었고. 위험한 사람들과 손을 잡은 것 같아.’

어쩌면, 이미 수년 전부터 말이다.

이가 바득 갈렸다. 용병은 돈만 주면 무슨 짓이든 해 준다는 시선이 지겹다고 하지 않았던가. 무기를 든 이상 깨끗한 일만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명예를 아는 이들임을 보여 주자고 말했었지.

너는 변한 것일까, 원래 그런 인간이었던 걸까.

……네가 고작 간사한 거짓말쟁이였다면, 진심으로 그 뜻에 동의해 모여든 이들은 뭐가 되지? 베릴, 이잔, 페로자, 그리고 녹스의 이름을 기꺼이 짊어진 수많은 용병들은.

잊었다고 생각한 분노가 울컥 목구멍 너머로 넘어왔다. 머리가 뜨거워졌다. 어떻게 이 분노를 잊은 척 지낼 수 있었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감정이 선명히 되살아났다.

탄자의 얼굴을 다시 마주한 순간 토파즈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복수의 끝은 허망하겠지만, 자신은 과거를 잊을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어차피 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면 여기서 저 배신자와 함께 주저앉으리라. 그게 어리석은 선택일지라도.

토파즈의 검에 힘이 실렸다. 단번에 죽일 각오로 심장을 노리고 찔러 넣은 검이 가로막혔다. 검을 밀어내는 힘에 팔이 떨리고 어깨가 욱신거렸다.

본래 토파즈는 무모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상대를 몰아붙이는 공격 방식을 지향했다. 그러나 지금은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치는 대신 적당히 흘리며 틈을 노려야 했다. 힘을 옥죄고 있는 마나 구속구 때문이었다.

챙, 챙!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검이 여러 번 교차했다. 탄자는 왼손잡이였다. 왼손잡이의 검술은 그 궤적이 반대라 싸우기 어려워하는 오른손잡이 검사들이 많았다. 그러나 토파즈는 아니었다. 특히 수없이 검을 섞어 본 탄자를 상대로라면.

두 사람의 검이 날카롭게 부딪치며 주변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근처에 있던 누구도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추기경이라는 이가 그 틈을 타 자리를 벗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탄자가 그를 위해 시간을 벌어 주고 있다는 사실도 뻔히 보였다. 목적을 이루도록 협조해 줄 생각은 없었다. 토파즈가 땅을 박찼다.

주저 없이 목을 노리고 휘두른 검을 탄자가 고개를 젖혀 피했다. 검 끝이 머리카락을 스쳤다. 서걱, 날카로운 검 끝에 머리카락이 잘려 나갔다. 묶인 채로 잘린 은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어졌다.

탄자는 턱선까지 잘려 나간 제 머리카락을 힐끔 보더니 곧바로 반격해 왔다. 후드 아래에 숨겨진 토파즈의 얼굴을 바라보는 시선이 꿰뚫을 듯 집요했다.

토파즈는 손목에 족쇄를 매달고도 용케 호각으로 싸웠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빼앗은 용병의 검은 정예 검사의 공격을 여러 번 견딜 정도로 튼튼하지 못했다. 아슬아슬하게 버텨 내던 검날이 예고도 없이 뚝 부러지고 말았다.

곧바로 고개를 꺾었지만 완전히 피하지 못한 부러진 검날이 뺨을 스쳤다. 뺨에 핏방울이 맺히고 후드 끄트머리가 찢어졌다.

토파즈는 곧바로 발을 들어 상대의 복부를 걷어찼다. 탄자는 오른손으로 그 발을 가볍게 받아냈다. 그대로 몸을 끌어당겨 중심을 무너뜨리려 하기에 반동을 이용해 오히려 가까이 붙었다. 부러진 검을 팔뚝에 내리찍었다.

그러나 토파즈는 검 끝이 박히기도 전에 낭패감에 혀를 차고 말았다. 꼭 진짜 살갗처럼 부드러웠지만, 이 오른팔은 의수일 터였다. 그의 어깨와 팔을 분리해 놓은 장본인이 바로 4년 전의 자신이었으니까.

토파즈는 검을 팔뚝에 박아 넣자마자 손잡이를 놓고 뒤로 훌쩍 물러났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전까지 토파즈가 서 있던 자리로 검이 날카롭게 찔러 들어와 허공을 갈랐다. 자칫하면 몸통이 둘로 분리되었을 것이다. 탄자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넌 누구지?”

“…….”

“재밌네. 내 팔이 가짜라는 것까지 알고 있다니.”

토파즈에게는 이제 무기가 없었다. 메르디나가 빌려준 은장도가 있기는 했지만 이것으로 탄자의 검을 받아치려고 했다가는 손가락부터 잘리고 말 것이다.

주변에 있는 다른 용병들의 검을 빼앗을 기회를 노렸지만 탄자는 멍청히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의 검이 곧장 머리통을 가를 듯 날카롭게 휘둘러졌다.

토파즈는 이를 악물고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손목에 매달려 있던 마나 구속구와 검날이 부딪혔다. 마나 구속구는 검을 충분히 막아 줄 정도로 단단했다. 상대의 얼굴을 후려친다면 이빨 몇 개쯤은 충분히 날릴 수 있을 정도였다.

붕, 탄자의 얼굴을 노리고 날아간 손이 허공을 갈랐다. 아쉽게도 코뼈를 내려앉혀 줄 수는 없었으나 곧바로 온 힘을 쏟아부어 날린 발차기는 먹혔다.

복부를 걷어차인 탄자가 저 멀리 날아갔다. 중간에 자세를 잡아 한 손을 바닥에 짚으며 안정적으로 착지했지만 타격이 전혀 없지는 않았던 듯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가 터져 나왔다. 탄자가 입가를 닦아냈다.

요행이 여러 번 먹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다른 이들의 검을 빼앗을 틈을 노려야 했다. 토파즈는 아까 쓰러뜨린 용병의 허리춤에서 검을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검을 다 뽑기도 전에 뒤에서 달려드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토파즈는 다급히 한 바퀴 굴러 몸을 피했다. 쾅! 땅이 파이고 흙먼지가 날렸다.

토파즈는 텅 빈 손을 그러쥐며 침을 삼켰다. 품에서 메르디나의 은장도를 꺼내 바투 쥐었다. 긴장감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삑, 삐이이이. 그때 어디선가 긴박한 경고음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예민하게 곤두서 있던 탄자와 토파즈가 동시에 휙 고개를 돌렸다.

“왜, 왜 이러지?”

용병들이 들고 있던 마나 감지기였다.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감지기에서 경고음 같은 소리가 나더니 구슬에서 붉은빛이 번쩍였다. 반복되는 높고 빠른 음은 듣는 사람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빨간색?”

한 용병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탄자는 더 이상 관심을 주지 않고 토파즈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토파즈는 발견했다. 흙먼지가 날리는 바닥을 타고 금빛 물결이 조용히 퍼지고 있었다. 토파즈는 탄자에게 맞서는 대신 뒤로 물러났다. 갑자기 도망치는 그를 보며 탄자가 눈을 가늘게 뜰 때였다.

“빨간색은…… 측정 불가라는 뜻인데.”

어느 용병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바닥에서 금빛 창이 일제히 수십 개 솟아올랐다.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컥!”

가만히 서 있던 용병들의 몸이 그 창에 속수무책으로 꿰뚫렸다. 탄자는 땅을 박차 올라 가까스로 피했지만 피한 자리에서도 연신 창이 솟아올랐다. 탄자는 토파즈를 노리는 것을 포기하고 몸을 물렸다.

추기경이라는 자는 두 사람이 싸우는 동안 이미 몸을 피한 뒤였다. 탄자는 아마 그를 쫓아갈 것이다. 토파즈는 그들을 뒤쫓아야 할지 고민했지만, 고민은 오래가지 못했다.

나무 위에 앉아 있던 새들이 푸드덕거리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토파즈는 새들이 떠나온 자리로 고개를 돌렸다.

말의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곧 익숙한 얼굴들이 나타났다. 마법사와 두 기사가 나란히 말을 타고 달려왔다.

붉은 피와 잘린 신체, 부서진 마차와 푹 파인 땅. 엉망진창이 된 공터에서 유일하게 두 발로 서 있는 토파즈의 앞에 말 세 마리가 멈춰 섰다.

맨 앞에 있는 말에 카르옌이 타고 있었다. 늘 차분하던 검은 머리가 이마 위에서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몇 시간 만에 보니 저 얼굴도 꽤 반갑게 느껴졌다.

* * *

약 두 시간 전. 카르옌은 몸을 흔들어 깨우는 손길에 잠에서 끌려 나왔다. 최근 들어 몸이 꽤 가벼워진 카르옌이었다. 몸이 회복 중이라는 증거인지, 예전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은 잠에 빠지고는 했다.

어쩌면 기분상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카르옌이 가진 오랜 불면증의 원인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 아니었던가. 자신, 혹은 ‘그’가 말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카르옌의 ‘그’는 카르옌이 잠든 동안 얌전히 옆을 지켜 주는 성미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가 혼자 나가게 내버려 뒀다고.”

잠에서 깨어나 메르디나의 설명을 들은 카르옌이 싸늘히 물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메르디나는 변명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카르옌도 알고 있었다. 그가 가고자 하는 길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였다. 자신조차도.

약한 것을 측은히 여기는 사람이라 약한 척도 하고, 어린아이에게 관대한 사람임을 알아 어리광도 부렸다. 조금이나마 옆을 파고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카르옌이 떨리는 손을 들어 머리칼을 헤집었다.

“그가 어디로 간다고 했지?”

“특별히 그런 말씀은 없으셨으나, 서쪽 시가지로 향하는 것을 봐 두었습니다.”

“……나간 지 두 시간이 지났다고 했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이를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지쳤다. 카르옌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창백하다 못해 푸르스름하게 질린 낯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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