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
“당신 누구야.”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소. 난 의사요.”
그 말을 듣고 보니 노인은 무릎까지 오는 새하얀 로브를 입고 있었는데, 가슴에 치유와 회복을 상징하는 초승달 무늬가 수놓아져 있었다.
“여기가 어딥니까.”
“……그 칼을 내려 주면 대답하겠소.”
“대답하면 내리겠습니다.”
“여긴, 키올렌 마을의 친절한 순록 여관일세.”
“제가 왜 여기에 있습니까?”
“그걸 내가 어찌 알겠소? 나는 여관 주인이 환자가 있으니 좀 봐 달라고 부탁하길래 왕진을 온 것뿐이네만.”
“……오늘이 며칠입니까.”
“새해 첫날이오.”
제국 최북단. 키올렌의 낯선 여관에서 토파즈가 깨어난 것은 1019년 1월 1일, 그가 스물다섯이 된 날의 일이었다.
토파즈가 들고 있던 검을 스르르 내렸다. 토파즈가 기억하는 날짜로부터 보름이 지나 있었다. 그러나 보름간의 기억은 머릿속에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온 세상이 잠시 눈꺼풀을 감았다가 뜬 것 같았다.
죽음을 예감할 만큼 큰 상처였으니 생사를 넘나드는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은 이해가 갔다. 그러나 고작 보름 만에 복부와 심장, 어깨의 상처가 모두 사라졌다. 어디 하나 덧난 곳 없이 완벽히. 아무리 회복력이 괴물처럼 빠른 토파즈라고 해도 정상적인 과정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토파즈는 상의를 걷어 올려 몸 곳곳을 확인했다. 몸에 있던 커다란 흉터가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마법사의 불꽃이 코앞에서 일렁였었는데 화상도 없었다.
죽기 전에 신관의 도움이라도 받은 것일까. 그런 기적 같은 우연이 존재한다고? 차라리 다른 동료, 이를테면 수도에 갔다던 이잔이나 숙소에 있었을 페로자가 구해 준 것일지도 모른다.
토파즈는 몸을 일으켜 1층으로 내려갔다. 식당을 겸하는 1층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활기찬 분위기였다.
“수도에서는 이번 성년식을 크게 한다더군. 2황자 전하의 탄신일을 겸해서 말이야.”
“어린 시절엔 병약하다는 소문이 자자하더니……. 무사히 장성하신 걸 보니 곧 황태자 자리에 오르시겠어.”
그 말을 듣고 둘러보자 머리에 화관을 쓰거나 옷에 꽃으로 만든 장식을 매단 젊은이들이 곳곳에 보였다. 제국에서는 그 해에 열아홉 살이 되는 아이들을 모아 새해 첫날에 성년식을 치르는 문화가 있었다.
의식은 신전이 주관하는데, 신관들이 신의 이름을 빌려 성년이 될 아이들에게 축복을 내려 주고 손등에 마름모 모양대로 ‘성수’를 발라 주었다.
이름이 성수지 그냥 맹물을 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신과 연결해 준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래서 성년식이 끝나고 나면 색이 있는 물감으로 가족 혹은 친구들끼리 손등 위에 그 무늬를 덧그려 주는 관습도 있었다. 그날 밤 잠들기 직전에 깨끗한 물로 씻어내는 것이 관례였다.
식당에 앉아 있는 젊은이들과 창밖을 지나가는 젊은이들의 손등에서 형형색색의 마름모 그림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토파즈 하나를 속이기 위해 온 마을 사람들이 모두 짜고 치는 것이 아니라면, 오늘이 1월 1일이라는 의사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토파즈가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멍하니 서 있을 때였다. 주방에서 나온 중년 여성이 토파즈에게 아는 체를 해 왔다.
“드디어 깼네? 하루가 꼬박 지나도 안 일어나서 걱정했어.”
그가 바로 이곳, ‘친절한 순록 여관’의 주인이었다.
여관 주인이 토파즈를 발견한 것은 어제 아침이었다. 누군가 창에 돌을 던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나서 밖으로 나가 보니 토파즈가 여관 문 앞에 쓰러지듯 기대어 있었다고 했다. 옆에는 아무도 없었고 웬 새하얀 여우 하나만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 말에 토파즈가 제 어깨에 올라탄 여우를 바라보았다. 여우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앞발을 핥고 있었다. 여관 주인은 토파즈를 들여와 방을 내어 주고 의사까지 불러 주었다.
“어차피 겨울에는 여기까지 와서 묵는 숙박객이 별로 없어서 파리만 날려. 노는 방 천지인데 하나 내어 주는 게 어렵지도 않고.”
그는 이 추운 계절에 최북단까지 홀로 온 이방인에게 대단히 안타까운 사연이 있으리라고 짐작하는 것 같았다.
토파즈는 감사 인사를 전하는 대신 품 안에 손을 넣었다. 평소 가지고 다니던 돈주머니가 그대로 들어 있었다. 몸에 힘이 없어서인지 오히려 더 묵직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괜찮다며 거절하는 여관 주인에게 숙박비를 치른 토파즈는 묽은 수프와 빵 한 덩이로 식사를 했다. 머리가 복잡했으나 생존을 위해 생각을 멈추는 데 익숙한 몸은 반사적으로 음식물을 밀어 넣었다.
그러나 주방의 화구를 밝힌 불꽃을 본 순간, 씹고 있던 부드러운 빵이 거친 모래처럼 느껴졌다. 토파즈는 입 안에 있던 것을 겨우 씹어 삼킨 뒤 물 대신 나온 뜨거운 차를 마셨다. 목구멍이 홧홧했다. 잔을 내려놓는 손끝이 잘게 떨렸다.
피 냄새와 텅 빈 녹색 눈동자, 동료의 뼈를 가르던 감각, 눈앞에서 일렁이던 불꽃이 떠올랐다. 토파즈가 떨리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왜.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는 그저 길드를 그만두고자 했을 뿐이었다. 수년간 함께해 온 동료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는 자리였다. 그 밤이 피와 배신으로 얼룩질 거라고는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탄자가 변했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고 베릴에게 자세히 캐물어야 했을까. 탄자는 정말로 변한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동료 따위는 체스 말로 여기는 인간이었던 걸까. 그가 알던 모든 것이 어그러지는 기분이었다.
토파즈는 그 여관에서 보름을 더 머물렀다. 혹시 자신을 도와준 이가 있다면 다시 그곳으로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름을 다 채울 동안 기다려도 찾아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토파즈는 인정했다.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하는 이는 셀 수 없이 많으나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어쩌다가 이곳까지 흘러들어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여관 주인이나 의사처럼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이들에게 우연히 구해진 것이겠지.
앞으로는 무엇을 해야 할까.
복수?
탄자를 찾아가 왜 그랬는지 따져 묻고, 그가 평생 일구어낸 길드를 부수고, 스승의 얼굴을 닮은 목을 손에 쥐고 나면 속이 시원해질까?
모르겠다. 복수를 한다고 이미 벌어진 일을 돌이킬 수는 없다는 사실을 토파즈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복수의 끝에는 아무것도 없고, 떠난 이는 무슨 짓을 해도 돌아오지 않는다. 가넷처럼.
동료는 죽었고, 배신했고, 돌아갈 곳은 없었다. 들끓던 속이 가라앉자 가슴 안에 남은 것은 희뿌연 잿더미뿐이었다.
토파즈는 너무 지쳐 버렸다. 이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토파즈는 주인에게 방값을 치른 뒤 여관을 나섰다. 여관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멎었던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북쪽으로 향할수록 땅에 찍힌 발자국이 줄어들었다.
‘마을 북쪽에 있는 그렌로샤 숲은 실수로라도 가지 말라.’
이 마을에서 머무르는 동안 가장 많이 들은 말이었다. 그러나 토파즈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흔들림 없이 북쪽으로 향했다.
본래 이름보다 저주의 숲, 혹은 죽음의 숲이라고 더 많이 불린다고 했던가. 죽음의 숲이라는 그 이름이 차라리 편안하게 들렸다. 그가 갖지 못한 안식이 그곳에 있을 것만 같았다.
수많은 경고 팻말을 지나 숲의 초입에 도착했을 때였다. 가벼운 발소리가 성큼 가까워졌다. 토파즈는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무시할까 하다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눈처럼 흰 여우가 그곳에 있었다.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이 꼭 토파즈를 만류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착각일까.
토파즈는 망설이다가 손을 뻗었다. 털에 눈을 잔뜩 묻힌 여우가 토파즈의 손을 타고 올라와 어깨에 매달렸다. 이내 어깨에 제 자리를 만들어 앉은 여우는 가벼워서 무게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포근한 털 때문인지 금세 어깨가 따뜻해졌다.
“……왜 자꾸 따라다녀.”
작은 짐승은 대답 없었다.
“설마 배고파?”
끼웅. 애처로운 대답에 작은 한숨이 비집고 나왔다. 한숨을 내쉬고 나서야 자신이 지금까지 숨을 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차라리 죽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묫자리를 찾듯 떠돌고 있었으면서도 사실은 내내 숨을 쉬고 있었다고.
바람이 불며 구름 사이로 해가 드러났다. 머리끝까지 드리워 있던 그늘이 잠시 물러나고, 투명하도록 까만 여우의 눈동자에 푸른 하늘이 잠시 비쳤다가 사라졌다.
“……가자.”
빽빽한 나무 틈으로 걸어 들어간 사람 하나와 여우 한 마리는 곧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눈이 더 내리며 발자국마저 지워졌다.
죽음의 코앞에서 잠시 멈춰서기를 결정한, 어느 겨울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