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
“이런. 죽일 것까진 없었잖아.”
아까운 인재를 셋이나 잃게 생겼다며 탄식하는 목소리는 평소와 별반 다른 점이 없었다. 토파즈는 자신이 그동안 탄자에 대해 전혀 몰랐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왜…….”
말을 하려는데 목 안에서 피가 울컥 솟아 나왔다. 바닥으로 검붉은 핏덩이가 점점이 떨어졌다. 토파즈는 손등으로 거칠게 피를 닦아내며 물었다.
“왜 죽였어?”
“가넷, 아니. 토파즈. 네가 자초한 일이잖아.”
“베릴은 왜 죽였냐고, 개새끼야.”
“아아……. 베릴?”
탄자의 시선이 바닥에 쓰러진 베릴의 시체에 닿았다. 입술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무감했다. 쓸모가 사라진 사물을 보는 것처럼.
“베릴은 너무 똑똑해서 성가시더라고.”
“미친 소리, 씨발…….”
토파즈는 입을 다물었다. 더는 대화를 나눌 가치가 없었다. 토파즈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탄자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웃음기를 지우고 검을 움켜쥐었다.
어린 시절 함께 훈련할 때부터 수없이 검을 섞어 본 상대였다. 서로를 잘 아는 검은 일방적으로 밀고 밀리는 것 없이 팽팽하게 맞부딪쳤다.
“쿨럭, 큭.”
“하아, 하아.”
누구도 틈을 내주지 않자 자잘한 상처만 늘어났다. 탄자도 오른팔을 거의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더 불리해지는 쪽은 토파즈였다. 복부의 상처가 점점 벌어지며 눈앞이 흐릿해졌다. 이미 옷은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통각도 희미해질 만큼 몸이 둔해지고 검의 궤적이 조금씩 느려졌다. 탄자를 상대로 지금까지 버티는 것도 죽을 듯이 달려들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묵직한 검을 이 악물고 막아내던 토파즈의 팔이 잘게 떨렸다. 주로 힘으로 상대를 눌러 버리는 방식을 택했던 토파즈였지만 지금은 불가능했다. 다음 합도 막아낼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찰나의 틈이 생기자 탄자의 검이 망설임 없이 심장을 노리고 찔러 들어왔다. 토파즈는 완전히 피하는 대신 어깨를 내어주었다.
“윽!”
날카로운 검이 왼쪽 어깻죽지에 박혔다. 토파즈는 어깨를 내어준 대신 아까부터 노리고 있던 탄자의 오른팔을 내리그었다. 온 힘을 실은 공격에 이미 너덜거리던 팔이 완전히 잘려 나갔다. 탄자가 균형을 잃고 휘청였다.
토파즈는 어깨에 검이 더 깊게 박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며 검을 들었다. 진심으로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입으로 하는 해명 따위는 필요 없었기에.
“컥.”
그때 쓰러질 듯 앞으로 몸을 숙였던 탄자가 토파즈의 배를 걷어찼다. 이미 크게 다친 부위를 무기나 다름없는 다리로 걷어차이자 상처가 헤집어졌다. 내장이 쏟아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갈비뼈도 몇 대쯤 부러졌을 것이다.
토파즈는 그대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피가 울컥 올라왔다. 등을 부딪친 찬장에서 술병 따위가 쏟아지는데 머리를 감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손끝 하나 움직일 힘이 없었다. 검을 놓치지 않은 것이 최선이었다.
“허억, 큭.”
“후우…….”
오른팔을 잃은 탄자가 저벅저벅 다가왔다. 그가 걷는 자리마다 핏방울이 흥건히 떨어졌다. 가게 안은 이미 모든 집기가 부서져 엉망이었다. 탄자가 쿨럭, 기침을 토해 내더니 바닥에 침을 뱉었다. 온통 피였다.
“우리의 마지막이 이렇게까지 엉망일 줄은 몰랐어. 난 정말로 너를 형제라고 생각했거든.”
토파즈는 반쯤 늘어져 숨만 몰아쉬면서도 핏발 선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탄자가 웃었다.
“뭐, 형제라고 꼭 사이가 좋은 건 아니지. 그런데…… 난 너를 미워도 형제라 여겼지만 넌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잖아, 토파즈.”
탄자는 테이블보였던 천을 주워 들어 제 어깨에 휘감았다. 그리고 왼손과 이로 매듭을 한 쪽씩 잡아당겨 묶었다. 한 손으로 하다 보니 몹시 엉성한 모양새였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피를 많이 흘린 그의 눈도 반쯤은 돌아 있었다.
“네가 녹스를 떠났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어떤 파장이 있을지, 넌 그딴 문제는 고려해 본 적도 없을 거야.”
다가온 그가 토파즈의 오른손을 짓밟았다. 벗어나기 위해 꿈틀거리던 손이 곧 힘을 잃었다. 겨우 놓치지 않고 있던 검이 손에서 빠져나갔다.
날까지 전부 새카만 검이었다. 그 검을 눈에 담는 순간 무감하던 탄자의 눈동자에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의 아버지, 유리가 아들이 아닌 제자에게 남긴 유품이었다.
“네게 의미 있는 인간은 ‘가넷’과 유리뿐이니까.”
탄자가 검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그 검으로 토파즈의 심장을 찔렀다. 푹. 날카로운 검 끝이 정확히 심장을 파고들었다.
“방해가 될 거라면 차라리 죽어, 토파즈.”
“…….”
“그리고 영원히 녹스를 빛내는 영웅으로 남아.”
탄자는 일부러 검 끝을 돌려 심장을 헤집은 뒤 검을 뽑아냈다. 피가 울컥거리며 쏟아져 나왔다. 일반인이었다면 즉사할 상처였지만 상대는 때로 아군에게도 괴물이라고 불리는 남자였다. 확인 사살을 위해 검 끝을 목덜미에 가져다 대는 때였다.
쿵, 쿵, 쿵. 술집 문을 다급히 세 번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탄자는 축 늘어진 토파즈를 힐끔 살피고 몸을 돌렸다.
탄자는 문틈 사이로 얼굴을 확인한 뒤에 문을 열어 주었다. 들어온 사람은 원래 오늘 술자리에 함께하기로 한 동료인 젬마였다.
“탄자님, 팔이!”
젬마는 오른쪽 어깨 아래가 휑하니 빈 탄자를 보고 놀라 소리쳤다.
“괜찮아. 무슨 일인데?”
탄자의 어깨에 묶인 흰 천을 꽉 묶어 준 젬마는 술집 안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엉망진창이 된 내부와 동료들의 시신, 쓰러져 눈을 감고 있는 토파즈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너무 소란을 피웠습니다. 경비대에 신고가 들어갔고, 용병단 내에도 냄새를 맡은 놈들이 있어요. 피해야 합니다.”
“벌써?”
탄자가 혀를 찼다.
“당신이 가넷을 직접 처리했다는 사실이 바깥에 새어나간다면 모든 일이 허사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상처도 당장 치료하셔야 해요!”
“아직 숨통을 확실히 못 끊었어.”
“이걸 지금 사용하면 됩니다. 아무리 가넷이라도 살아나오는 건 불가능합니다.”
젬마가 꺼낸 것은 주먹만 한 크기의 붉은색 돌이었다. 화염의 마법사라 불리던 베릴이 직접 불꽃 마법식을 새겨 친구인 젬마에게 선물해 준 마도구였다.
“서두르십시오. 화재로 위장하려면 시간이 없습니다.”
“주방 쪽 뒷문으로 나가지.”
“네.”
탄자가 먼저 빠져나가고 젬마가 그 뒤를 따랐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베릴과 우고를 스쳐 지나가는 그들의 눈에는 별다른 감정이 깃들어 있지 않았다.
젬마가 붉은 돌을 던져 넣었다. 주방과 이어지는 문이 닫히자마자 화르륵, 불꽃이 조용히 터져 나왔다.
“쿨럭. 헉, 허억.”
토파즈는 짧은 기침과 함께 겨우 의식을 붙잡았다.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심장으로 마나를 집중시켰다. 예정된 죽음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서였다.
마법사의 불꽃은 매캐한 연기를 내는 대신 모든 것을 불사를 것처럼 그저 맹렬하게 타올랐다. 모든 것을 한 줌 재로 만든 뒤에야 꺼질 불꽃이었다.
뜨거운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유리로 된 술병이 차례대로 터지는 소리가 났다. 술이 바닥으로 쏟아지는 소리는 화마에 묻혔다. 나무로 된 의자와 테이블보에도 불이 붙었다.
의뢰를 성공적으로 마친 날에도, 동료를 지키지 못한 날에도, 누군가의 생일에도 하루가 멀다 하고 드나들던 술집이었다. 오랜 추억이 통째로 불타고 있었다. 몸이 아프다던 주인장도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한 팔만큼 떨어진 곳에 베릴이 누워 있었다. 토파즈는 눈을 돌려 자신이 만든 불꽃 속에 잠긴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눈과 입술이 놀란 듯 크게 벌어져 있었다. 동료의 배신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얼굴로.
토파즈는 남은 힘을 쥐어짜 왼팔을 움직였다. 아슬아슬하게 베릴의 뺨 언저리에 손이 닿았다. 이를 악물고 손을 움직였다. 손끝에 부드러운 눈꺼풀이 닿았다. 토파즈는 마법사의 눈꺼풀을 감겨 주었다. 초록빛 눈이 영원히 감겼다.
모든 것을 재로 만드는 마법사의 불꽃이 코앞까지 다다랐다. 토파즈의 옷자락에도 불이 옮겨붙은 것 같았다. 뜨겁고 숨이 막혔다. 숨소리가 점차 희미해졌다.
분노조차 되지 못한 허무가 몸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토파즈는 죽음을 예감하며 눈을 감았다.
* * *
그러나 다시 눈을 떴을 때, 토파즈는 손과 발끝이 얼어붙을 듯한 추위를 느꼈다.
“……?”
오직 배 부근만이 따뜻했다. 고개를 내리자 웬 하얀 털 뭉치가 복부를 덮고 있었다.
“……뭐야.”
작게 중얼거리자 동그랗게 말려 있던 털 뭉치가 꿈틀 움직였다. 곧 고개를 내미는 것은 코가 비죽 튀어나온 흰 여우였다.
언뜻 푸른색 눈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검은색이었다. 흰 여우는 풍성한 꼬리를 살랑이더니 다시 토파즈의 배 위에 엎드렸다.
배? 토파즈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상체에서 미끄러진 여우가 불만스레 꼬리로 바닥을 쳤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몸이 멀쩡했다. 옷을 걷어 올리자 내장이 모두 쏟아져 나올 것처럼 깊었던 상처가 흉터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있었다.
문을 열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토파즈는 반사적으로 검을 찾았지만 허리는 비어 있었다. 그 대신 협탁 위에 놓인 작은 칼을 집어 들었다. 편지 봉투를 뜯는 데나 쓰는 무딘 칼이었지만 토파즈의 손에서는 무기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토파즈가 누워 있던 낯선 방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역시나 낯선 얼굴로,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었다. 노인은 금방이라도 칼을 날릴 것처럼 팔을 들고 있는 토파즈를 보더니 화들짝 놀랐다.
“깨, 깨어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