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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토파즈 (42)화 (42/110)

#042

“탄자. 가넷 그만둔다는 얘기 아직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 다들 모르는 눈치던데.”

“가넷이 떠들썩한 건 싫대. 당분간은 우리끼리 알고 있다가 연말에 공식적으로 알리려고.”

“재계약 때문에 그런 건 아니고?”

베릴의 물음에 탄자는 순간 멈칫했으나 곧 능청스럽게 웃어넘겼다.

“역시 우리 마법사님은 똑똑하셔. 그 영향도 없진 않지. 가넷이 탈퇴한다고 했다가 다들 우르르 따라 나가면 우리 길드의 손실이 얼마나 크겠어.”

베릴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술집의 문을 열었다. 녹스의 용병들이 반쯤 살다시피 하는 술집이었다. 다만 오늘은 평소의 떠들썩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탄자가 토파즈를 위해 따로 마련한 자리이기 때문이었다. 술집 안으로 들어온 인원은 토파즈를 포함해 네 명뿐이었다.

“주인장은 어디 갔어?”

술집의 주인은 부상을 입고 은퇴한 용병 출신으로, 한쪽 다리가 불편했지만 칼솜씨는 여전히 좋았다. 지금은 그 솜씨를 요리에 십분 발휘하고 있다며 걸걸하게 웃어 대던 얼굴이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몸이 안 좋아서 쉰대. 어차피 장사 접을 거 우리한테 통째로 빌려달라고 한 거야. 술은 마음껏 꺼내 마셔도 돼. 안주는 마른 과자랑 과일 정도뿐이지만 말이야.”

탄자가 그들이 들어온 문을 굳게 닫아걸며 답했다. 가벼운 목소리로 흘러나온 말이었지만 토파즈는 미간을 좁혔다. 토파즈가 알기로 주인장은 가게를 시작한 이후로 단 하루도 문을 닫은 적이 없었다. 쉴 정도로 아프다니, 자리를 파하면 한번 들러 보기라도 해야 할까.

“제가 뭐라도 만들어 올까요?”

맞은편에 조용히 앉던 우고가 물었다. 우고는 제국 출신이 아니었지만 몇 년 전 탄자가 영입한 용병이었다. 지금은 탄자의 심복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대검을 주 무기로 사용하여 늘 등에 메고 다녔다.

구릿빛 피부에 덩치까지 곰 같은 남자가 커다란 검을 짊어지고 다니니 쉽게 위협적이라는 오해를 샀지만, 실제로는 잘 나서지 않고 조용한 성격이었다. 요리 솜씨도 제법 괜찮았다.

“괜찮아. 그냥 있는 대로 먹지 뭐.”

베릴이 손을 내저었다.

“그럼 먹을 만한 게 없는지 대충 둘러보고만 오겠습니다.”

우고가 나무 문으로 구분되어 있는 주방으로 사라졌다.

베릴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벽에 장식된 유리병 중 하나를 꺼내어 가져왔다. 오렌지 빛깔의 액체는 술을 마시지 않는 이들을 위해 들여놓는 과일 음료였다. 베릴이 자주 찾는 음료였지만, 혀가 얼얼할 정도로 달짝지근한 맛이 나서 토파즈는 질색했다. 술잔에 음료를 따른 베릴이 잔을 들었다.

“먼저 건배하자. 신께서 우리 앞날을 굽어살피시길.”

제국에서 가장 상투적인 건배사와 함께 술잔 세 개가 부딪쳤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술맛이 유독 쓰게 느껴졌다.

“인원이 조촐하네.”

베릴의 말에 탄자가 웃었다. 술에 입술만 적신 듯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잔은 마시기 전과 큰 변화가 없었다.

“오붓하다고 해 줘. 어차피 정식 인사는 따로 할 거니까.”

“이잔은 아직 수도에서 안 돌아왔나? 걔가 이런 자리에 빠질 놈이 아닌데.”

“아직 수도에 있어. 갑자기 추가 의뢰가 생겨서, 이잔에게 가 있는 김에 해결해 달라고 부탁했지. 사흘은 더 있어야 올 거야.”

“젬마는? 아까 나한테 갈 거냐고 묻던데 정작 본인은 없네.”

“젬마는 조금 늦을 것 같으니 우리 먼저 마시고 있으라던데.”

“아아.”

베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셋이 있으니 꼭 어릴 때 같네.”

세 사람은 녹스의 단장이 탄자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 유리였을 때부터 함께 한 이들이었다.

“너랑 가넷이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던 때 말이지.”

옆자리의 탄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토파즈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 세 사람은 너도 만만치 않았다느니, 서로의 과거를 끄집어내며 웃었다.

“가넷. 너 정말로 그만둘 거야? 나를 봐서라도 조금 더 함께해 줄 수는 없어?”

탄자가 물었다. 사뭇 진지한 어조였다.

“……내가 없어도 넌 잘할 거잖아. 이미 잘해 왔고.”

“아버지와 네 명성에 의지해 온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유리도 그럴 거고.”

탄자가 입꼬리를 당겼다. 문득 술잔을 쥔 탄자의 손에 핏줄이 불거져 있는 것이 보였다. 다시 보려는 순간 탄자가 잔을 놓고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가 입가를 쓸며 눈을 내리깔았다. 어두운 보랏빛 눈동자가 속눈썹에 가려졌다.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들어. 넌 내가 ‘유리의 아들’이라서 잘해 준 게 아닐까 하는…….”

“그게 무슨 헛소리야?”

토파즈가 인상을 썼다.

“만약 아버지가 계속 용병단을 이끌고 있었더라도 네가 이렇게 쉽게 그만둔다는 말을 했을까?”

“…….”

“거봐, 가넷. 아무 말 못 하지.”

맞은편에서 빈 잔을 거칠게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베릴이었다. 그가 한심하다는 눈길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오랜만에 옛날 얘기했다고 또 애들처럼 싸우려고 들어?”

탄자가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한쪽 뺨에 보조개가 드러날 정도로 환한 미소였다. 자주 보던 얼굴인데도 어쩐지 그 미소가 낯설다는 생각이 들었다.

“싸우는 게 아니야, 베릴. 그저…… 확인할 뿐이지.”

탄자가 느릿하게 말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때 주방 쪽에서 무언가 쏟아지고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토파즈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우고, 무슨 일이야?”

토파즈가 목소리를 높여 물었으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베릴이 척척 걸어 주방 쪽으로 다가갔다. 토파즈는 그를 말리기 위해 손을 뻗으며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런데 순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푸욱!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익숙하지만 지금 이곳에서 들릴 리는 없는 소리였다. 토파즈는 멍하니 아래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복부로 무언가가 뚫고 나왔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과정이 꿈결처럼 느껴졌다.

등 뒤에서 꽂아 넣은 은빛 검날이 뼈 사이를 비집고 복부를 비스듬히 관통해 있었다. 흰 검날이 붉게 젖어 들어갔다. 자신의 피였다.

“아, 살짝 피했네.”

등 뒤에서 아쉽다는 듯 읊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실수로 술을 흘렸다는 탄식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어조였다.

……제 뒤에 서 있을 사람이라고는 한 명뿐이었다.

“탄, 헉…….”

배를 꿰뚫은 검이 쑥 뽑혀 나갔다. 상처가 헤집어지며 피가 터져 나왔다. 내장이 모두 흘러내릴 것 같았다. 뜨거운 피가 목 안으로 치솟았다.

등 뒤에서 다시 한번 검을 휘두르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지금 피하지 못하면 죽는다. 토파즈의 본능이 말했다.

토파즈는 몸을 피하며 순식간에 발검해 검을 맞댔다. 쾅! 검날을 부딪치는 힘에 상처가 벌어지며 쿨럭, 기침이 터져 나왔다. 입가를 타고 피가 주룩 흘렀다.

복부의 상처가 작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었더라면 검을 들기는커녕 그대로 눈을 감고 죽음을 맞이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토파즈도 결국엔 인간이었다. 치명상을 아슬아슬하게 피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과다출혈을 막지 못할 것이다. 더군다나, 상대는 토파즈와 같은 정예 검사였다.

토파즈는 검을 맞댄 상대를 바라보았다. 눈처럼 흰 머리칼에 보랏빛 눈동자. 그의 인생을 바꿔 준 스승과 꼭 닮은 얼굴이 토파즈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탄자.”

토파즈에게 칼을 꽂은 사람은 전장에서 평생 등을 맡겨 온 동료였다. 형제와 다름없다고 생각했던 친우였다. 여력이 있었다면 웃음을 흘렸을 것이다. 자신을 향한 비웃음이었다.

“그냥 단칼에 죽었으면 편했잖아, 토파즈.”

여전히 부드러운 음성에 소름이 끼쳤다. 바뀐 것은 정식 용병이 된 이후 늘 가넷이라고 불러 주던 호칭뿐이었다. 동시에 토파즈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베릴이 너무 조용했다. 목덜미가 선득했다.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을 홉뜬 얼굴을 마주했다.

“……베릴.”

살면서 그렇게 멍청하게 반응해 본 적이 없었다. 토파즈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베릴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러나 평생 수많은 주문을 외우며 살아온 마법사의 입술은 마지막 순간에 아무 말도 토해 내지 못했다.

쿵, 베릴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가슴에 휑하니 난 구멍에서 피가 쏟아졌다. 며칠 전 다듬어 준 금빛 머리카락이 바닥에 부채처럼 펼쳐져 있었다.

“너…….”

베릴의 뒤에는 우고가 서 있었다. 그는 아까 본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무뚝뚝한 얼굴로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배 속은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웠지만 머리는 오히려 차갑게 식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한눈을 파는 토파즈를 향해 탄자의 검이 날아왔다. 정확히 목을 노린 공격을 고개를 젖혀 피하고 단번에 그의 심장에 검을 내질렀다.

탄자는 몸을 비틀었지만 오른쪽 어깨가 찔리는 것은 피하지 못했다. 토파즈는 그의 팔을 잘라낼 기세로 검을 깊이 찔러 넣었다. 이렇게 이를 악물고 힘을 쏟아 낸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씨근덕거리는 숨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자신의 숨소리였다.

팔이 너덜너덜해진 탄자가 신음을 삼키며 뒤로 물러났다. 토파즈는 그를 쫓아가 일격을 가하는 대신 몸을 돌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베릴의 곁에 다다른 토파즈는 악에 받쳐 검을 휘둘렀다. 검날이 우고의 목젖을 정확히 꿰뚫었다. 토파즈는 망설임 없이 검날을 횡으로 갈랐다. 검 끝에 닿는 뼈의 단단한 감촉이 손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았으나 망설임은 없었다.

어제까지 동료였던 이의 목이 잘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피가 쏟아져 나와 토파즈의 붉은 머리칼 위에 끼얹어졌다. 전장에서 아군마저 두려움에 떨게 했던 핏빛 검, 그 자체였다.

새카만 눈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배신감과 분노, 슬픔이 뒤엉킨 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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