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41)화 (41/110)

#041

북해의 마수 토벌전에서 토파즈가 이끄는 용병대가 또 한 번 대승을 거두며 ‘가넷’의 이름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시기였다. 그 당시 용병의 위세는 제국 역사 천 년 동안 가장 높았다.

타국과의 전쟁이나 마수 토벌전에서 용병이 활약해 온 역사는 길었다. 수많은 용병단이 전장을 거치며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용병의 손을 빌리면서도 정작 실력은 깎아내리는 이들이 여전히 많았다. 기사가 되지 못한 비천한 이들이 택하는 직업이라는 인식과 보수만 받으면 무슨 짓이든 해 준다는 인식이 팽배했기 때문이었다.

탄자는 토파즈를 비롯한 실력 있는 용병들을 내세워 그 편견을 부수고자 했다. 그의 이상에 감화된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주로 용병이라고 무시당하는 세태에 치를 떨거나 명예를 갈구하는 이들이었다.

탄자가 녹스의 수장이 된 것은 고작 스무 살 때였다. 그는 거대 용병단들과 손을 잡아 연합 길드 체제를 만들었다. 일관된 체계로 용병들을 뽑아 훈련하고 관리했으며, 의뢰 수행 중 규율을 어기면 엄격하게 처분했다.

제한된 자유에 불만을 갖는 이들도 있었지만 높은 의뢰 달성률과 보수, 질서와 안정감에 매력을 느끼는 이들이 점점 늘어났다. 이제 용병은 기사의 한 단계 아래가 아니라 기사보다 더 자유로우면서 돈과 명예를 모두 가질 수 있는 집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토파즈도 제법 즐거웠다. ‘가넷’이라는 이름이 제국 전역에 알려진 것은 부질없는 만족감이나마 가져다주었고, 유리가 남긴 용병단을 그의 아들과 함께 이만큼 키웠다는 생각에 보람도 느꼈다. 마음 맞는 동료들과 술집에서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면 평범한 삶을 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차츰 모든 것이 버거워졌다. 그가 하지도 않은 일로 오해를 사는 것도, 눈앞에서 동료를 잃고 계속 나아가야 하는 상황도, 잘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자신을 떠받드는 현상조차도.

한 번은 동료에게 이런 질문을 받은 적도 있었다.

‘가넷, 너 수도가 그리워?’

‘갑자기 무슨 소리야, 베릴.’

‘수도에 있을 때는 꽤 즐거워 보이더니 돌아오자마자 지겨워 보여서.’

‘내가 수도에 있을 땐 즐거워 보였어?’

‘지금보다는 훨씬. 역시 고향이라서 그런가.’

뜻밖이었다. 그에게 수도는 고향이라기보다는 얼룩진 어린 시절을 보낸 장소였을 뿐이었는데. 괜찮은 기억들도 몇 있기는 했지만 그립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었다. 수도에서 만난 사람이 그리웠던 적은 있어도 장소 자체는 토파즈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토파즈는 오랜만에 그의 스승을 떠올렸다. 처음 수도를 떠난 이후 토파즈는 그때와 비교도 안 되는 힘을 길렀지만 여전히 싸우는 데만 사용하고 있었다. 지켜야 할 사람이라고는 그에게 돈을 주는 의뢰인들뿐이었다.

유리가 내게서 원한 모습이 과연 이런 것이었을까?

죽은 이를 붙잡고 묻고 싶었다. 기어이 누군가를 지키다가 떠난 당신은, 그래서 만족스러웠냐고. 매번 혼자 살아남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하냐고.

그러나 죽은 스승에게서는 늘 대답이 없었다.

“용병을 그만두겠다고? 그게 무슨 농담이야?”

제국력 1018년 12월. 스물넷의 토파즈는 녹스를 탈퇴하겠다고 말했다. 정확히는 용병 자체를 그만두겠다는 말이었다.

“농담 아니야.”

“……농담이 아니라니?”

탄자가 충격받은 얼굴로 되물었다.

“말했었잖아. 스물다섯이 되면 그만둘 거라고.”

탄자는 과거에 그들이 주고받았던 대화를 떠올렸는지 헛웃음을 흘렸다.

“그거야 그냥 해 본 말인 줄 알았지.”

“난 진심이었어.”

토파즈의 생일은 1월 첫날이었다. 제국력 1019년 1월 1일이면 그는 스물다섯이 되었다.

물론 실제로 언제 태어났는지 따위는 알지 못했다. 나이는 그보다 더 많거나 적을 수도 있었고 태어난 날은 겨울은커녕 뙤약볕 내리쬐는 한여름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어릴 적 가넷과 그렇게 정했다. 생일 따위 모르더라도 해가 바뀌는 날 함께 나이를 세자고. 그러니 토파즈는 지금 스물넷의 끝자락인 셈이었다.

탄자는 토파즈가 농담을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가넷. 녹스의 최상위 용병 10명에게만 주어지는 적패(赤牌)가 왜 붉은색이 되었는지 몰라?”

알았다. 최초의 의도가 어떻든 토파즈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했을 뿐. 조금도 동요 없는 토파즈를 본 탄자가 머리칼을 헤집었다.

“우리 함께 잘해 왔잖아. 대체 이유가 뭔데. 지쳐서 그래? 의뢰를 좀 줄여 줄까?”

“아니.”

토파즈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 말을 골랐지만, 결국 입 밖으로 튀어나온 것은 가장 솔직하고 초라한 말 한마디뿐이었다.

“그냥 다 지겨워.”

“…….”

탄자의 얼굴은 혼란을 넘어 배신감 어린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가 입술을 꾹 짓씹은 뒤 말했다.

“가넷, 지금 네가 벌어들이는 돈이 얼마인 줄 알아? 넌 제국에서 가장 높은 보수를 받는 최고의 용병이라고.”

“지금도 돈은 충분해. 그리고 용병을 그만두겠다는 거지, 평생 놀고먹겠다는 뜻은 아니야. 다른 일을 할 거야.”

“무슨 일을 할 건데?”

“글쎄. 정원사라도 해 볼까.”

토파즈가 할 줄 아는 일이야 검을 휘두르는 일밖에 없었다. 하지만 똑같이 날붙이를 들더라도 손에 피는 안 묻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탄자는 ‘정원사?’하고 망연하게 중얼거리고는 얼굴을 찡그렸다.

“가넷. 한 번 이쪽에 발을 들인 이상 평화로운 생활은 사치야. 네가 만든 적이 한둘이 아닌데 그들이 과연 널 가만히 둘까? 지금은 우리의 보호가 있지만 혼자가 되면 힘들어질 거야. 아무리 너라도 말이야.”

“상관없어. 내 한 몸 지킬 능력은 되니까.”

탄자는 끈질기게 토파즈를 달래고 붙잡았다. 일이 힘든 거라면 긴 휴가를 주겠다, 네 편의를 최대한 봐 주겠다, 몇 년간 등을 맞대고 싸운 동료들을 생각해 달라……. 그러나 토파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자유. 애초에 토파즈는 그 자유를 위해서 힘을 기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소매치기 따위의 한심한 짓을 하며 살고 싶지 않았고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녹스의 용병 가넷은 더 이상 자유롭지 않았다. 탄자가 곁에 있어 주길 원하는 사람도 친구인 토파즈가 아니라 수많은 공적을 어깨에 두른 용병, 가넷일 터였다.

“설마 다른 용병단에서 제의가 온 건 아니지?”

긴 설득 끝에 그 말까지 나왔을 때 토파즈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탄자, 어차피 우리 계약은 끝났어. 네가 길드장이라고 해서 내 인생까지 이래라저래라할 권한은 없다는 걸 알아 둬.”

그는 일부러 더 단호하게 잘라냈다. 그렇지 않으면 집요한 성미가 있는 탄자가 그를 쉽게 포기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탄자는 뜻을 굽혔다.

“……그래. 네 뜻이 그렇게 확고하다면 내가 강요할 수는 없겠지.”

그 말이 오래전 들었던 말을 떠올리게 했다. 토파즈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흘렸다.

“유리랑 비슷한 말을 하네.”

“……가넷. 넌 늘 내게서 아버지를 보는구나.”

어떤 의미인지 몰라 물끄러미 바라보자, 탄자는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매정하게 바로 떠날 건 아니지? 그동안 같이 지낸 세월이 있는데 인사라도 해야지. 며칠 뒤에 자리 만들게.”

됐다고 거절했지만 이번에는 탄자도 물러서지 않았다. 동료들이 서운해할 거라는 말에 토파즈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뒤, 한밤중에 누군가 다짜고짜 방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자 침침한 복도에 긴 금발을 늘어뜨린 여자가 서 있었다. 앞머리가 눈가를 가릴 정도로 길어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밤눈이 어두웠다면 유령인 줄 알았을 것이다.

“베릴. 머리 잘라야겠다.”

“바빠서 잊어버렸어.”

그의 동료, 베릴이 귀찮다는 듯 머리를 슥슥 옆으로 넘겼다. 눈을 찌를 듯 내려와 있던 머리가 사라지자 맑은 녹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대충 다듬어 줄 테니 들어와.”

베릴이 걸어 들어와 알아서 의자에 앉았다. 베릴은 토파즈와 마찬가지로 적패의 용병이었다. 적패의 소유자 중 유일한 마법사이기도 했다.

화염의 마법사. 사람들은 베릴을 그렇게 부르기도 했다. 정작 그는 더 멋진 칭호는 없냐며 혀를 찼지만.

“가넷. 너 정말 용병 그만둘 거야?”

베릴이 불쑥 입을 열었다. 토파즈는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소문났어?”

“아니, 아직 아무도 몰라. 나만 탄자한테 슬쩍 들었어.”

베릴이 어깨를 으쓱였다. 토파즈는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경고하며 그의 머리칼을 다듬어주었다.

그는 토파즈가 가장 편하게 대하는 동료 중 한 명이었다. 가끔 ‘마법사는 모두 미친놈’이라는 편견을 강화해 주는 짓을 벌이기도 했지만, 평소에는 지극히 상식적인 인간이었다. 귀찮음이 많고 냉소적인 구석이 있기는 해도 그마저 토파즈와는 제법 죽이 맞았다.

“나도 때려치울까.”

……그러니까 이런 말을 충동적으로 할 성격은 아니었다. 토파즈가 의외롭게 물었다.

“너는 왜?”

“나도 이제 전장이 지겨워. 여생은 어디 조용한 시골 구석에 틀어박혀서 연구나 하면서 살까 봐.”

베릴은 황립 아카데미 출신이었다. 졸업장만 있으면 수도 마법사단이며 마탑에서 서로 모셔 가려 애쓴다는 마법부를 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왜 용병을 하고 있느냐고 물으면 그는 늘 ‘책상 앞에만 앉으면 머리에 쥐가 나서’라고 대답했다.

“너랑 정말 안 어울리네.”

“내 생각도 그래.”

시답지 않은 대화에 웃음이 샜다. 웃음소리가 그친 뒤에 베릴은 잠시 침묵했다. 창밖을 바라보는 녹색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은 것 같았다.

“꼭 지겨워서만은 아니고…….”

토파즈는 그가 할 말이 있어서 자신의 방에 찾아왔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베릴이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가넷. 넌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요즘 탄자가 변한 것 같아.”

“……탄자가?”

“최근에 받아 오는 의뢰들이 좀 이상해. 우리한테 숨기는 것도 늘었고.”

토파즈는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정확히 어떻게 이상한데?”

“위험한 사람들과 손을 잡은 것 같아. 얼마 전에 탄자의 방에 갔는데…….”

말을 잇던 베릴이 우뚝 입을 다물었다.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이건 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넌 탄자랑 형제나 다름없는데 괜히 내가 이간질하는 꼴도 우습고. 내가 내일 탄자한테 직접 물을 테니 너도 같이 들어.”

“무슨 일이길래 그래. 위험한 일이야?”

토파즈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베릴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너, 탄자가 욕심 많은 거 알지?”

“왜 모르겠어.”

녹스를 여기까지 이끈 원동력도 그의 욕심이나 다름없었다. 모두가 허무맹랑하다고 비웃을 때도, 여기까지면 충분하다고 달랠 때에도 만족을 모르고 달려오지 않았던가.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베릴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는 좋은 결과만 가져왔지. 그런데 그 욕심이 잘못된 곳으로 향하면 어떻게 될지…… 난 걱정돼.”

짧게 다듬어진 머리칼 덕분에 이제는 그의 눈빛이 잘 보였다. 그건 베릴에게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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