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
운명의 장난처럼 토파즈는 얼마 뒤 남자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작은 상단에 일자리를 구한 토파즈가 아이들에게 위험한 심부름을 시키는 상단주의 코뼈를 내려 앉힌 뒤, 사환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쫓겨난 날이었다.
골목 사이에 주저앉아 있는 토파즈에게 남자가 먼저 말을 걸었다.
“어디서 이렇게 얻어맞고 왔어?”
누가 보면 어제도 봤던 사이인 줄 알겠다. 남자를 다시 만난 것은 한 달만이었다. 토파즈는 붓고 찢어진 입술을 달싹여 말했다.
“그때 지갑 왜 주고 갔어?”
“아아, 그거? 어차피 몇 푼 없었는데?”
“그래. 정말 몇 푼 없더라.”
뻔뻔한 대꾸에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남자는 토파즈의 앞에 몸을 굽혀 앉았다.
“지금도 생각 없어?”
“…….”
“너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옳은 힘은 필요해.”
옳은 힘? 참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토파즈가 일부러 이죽거렸다.
“필요하다고 하면, 당신이 가르쳐 주기라도 할 거야?”
“안 가르쳐 줄 거면 내가 뭐 하러 말을 걸겠어?”
“글쎄. 희망을 줬다가 빼앗는 걸 즐기는 변태 새끼일지도 모르지.”
“넌 내가 그렇게 부지런하고 열성적인 인간으로 보여?”
턱을 괸 채 시큰둥하게 묻는 얼굴을 보자 대답은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거봐.”
남자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똑바로 앉을 힘도 없어 담벼락에 대충 등을 기대고 앉은 토파즈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토파즈는 망설이다가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굳은살 박인 단단한 손은 어린애의 몸 정도는 별 힘도 들이지 않고 쑥 끌어 올렸다.
“근데 너 이름이 뭐야?”
“……토파즈.”
“오. 멋진 이름이네.”
그 순간 남자를 향한 토파즈의 삐딱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누그러들었다. 토파즈는 나름대로 성의껏 질문을 되돌려 주었다.
“당신 이름은?”
“흠, 안 가르쳐줘. 스승님이라고 부르든지.”
“…….”
진짜 제멋대로인 인간. 그게 재회한 그를 향한 토파즈의 감상이었다.
그가 토파즈에게서 스승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린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아직은 이름을 모르는 그를 토파즈는 ‘너’, ‘당신’ 따위의 호칭으로 불러 댔지만 그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는 토파즈에게 마나를 운용하는 법을 알려 주었다. 그 외에도 하루에 바이올렛 강을 따라 몇 바퀴를 뛰라느니, 짐을 들고 시장을 따라다니라느니 시답지 않은 일들을 시켜 댔다.
다시 생각해 보니 마지막은 그냥 짐꾼으로 이용당했을 뿐인 것 같았다. 심부름 값을 받기는 했지만 뒤늦게 깨달으니 언짢았다.
“대체 검술은 언제 알려 주는 건데?”
“넌 아직 멀었어. 스승님한테 반말을 찍찍 써 대는 버르장머리 없는 꼬맹아.”
“난 원래 그딴 거 없어.”
“와, 나랑 너무 비슷해. 그래서 자꾸 눈이 가나.”
용병이라는 그는 나이가 삼십 대 초반이었고, 정말로 토파즈 또래의 아들이 있다고 했다. 뭣도 모르는 젊은 시절에 어떤 담대한 여자에게 코가 꿰여서 정신 차려 보니 이미 아들까지 있었다나. 정말이지 인생을 되는대로 산다는 인상의 어른이었다.
그래도 그는 토파즈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것을 올바르게 가꿔야겠다고 생각해 준 최초의 사람이었다.
“근데 당신 할 일 없어? 왜 맨날 날 만나러 와?”
“내가 언제 맨날 왔냐. 근데 할 일 없는 건 맞아.”
“……한심하네. 그렇게 벌어서 아들은 어떻게 키우려고 그래?”
“내 아내가 나랑 다르게 똑똑하고 성실해서 괜찮아.”
“대체 그분은 왜 당신 같은 한량이랑 결혼한 거야?”
“꼬맹아, 정말 모르겠어?”
눈을 반쯤 뜬 남자가 자신감 넘치게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얼굴이잖아, 얼굴.”
“…….”
“내 아내가 미남한테 약해.”
“진짜 별…….”
“부정은 못 하겠지?”
그 후로도 남자는 토파즈에게 바닥에서 주운 나뭇가지 하나를 쥐여 줘 놓고 ‘찌르기 천 번’ 따위를 시킨 뒤 옆에서 꾸벅꾸벅 졸거나 농담 따먹기를 해댔다. 매일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며칠에 한 번 정도 찾아오는 게 다였다.
한 번은 열흘 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기에 ‘정말 나한테 스승님이라고 불릴 생각이 있긴 한 거냐’고 물었더니 ‘귀찮아서 침대에서 못 일어났다’며 대꾸해 왔다. 그러나 처음 만났을 때보다 조금 자란 머리칼을 긁적이는 남자에게서는 희미한 피 냄새가 났다.
한량 같아 보이는 태도와 달리 남자가 그저 그런 용병이 아니라는 사실은 토파즈도 진작 알고 있었다. 그는 토파즈의 앞에서 함부로 검을 뽑지 않았지만 굳이 검을 휘두르지 않아도 실력은 걸음걸이에서부터 티가 나기 마련이었다.
그즈음부터 남자가 토파즈를 만나러 오는 주기가 점점 길어졌다. 사흘에서 일주일, 일주일에서 보름, 보름에서 한 달까지.
올 때마다 꼭 빵 따위를 한 바구니 들고 와 ‘너 먹어라’하며 던져 주고, 한 번은 그의 고용주의 앞에서 보호자 행세까지 해 준 남자의 존재는 어느덧 토파즈의 일상에 크게 자리 잡았다.
그만큼 그가 오지 않는 날이면 허전했지만 토파즈는 그 공백을 채우듯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소매치기를 완전히 그만둔 토파즈가 마나를 다룰 수 있게 되고, 검술을 겨우 흉내 낼 수 있게 되었을 무렵이었다.
“토파즈.”
매일 건방진 꼬맹이 따위로 불러 대던 남자가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러 왔을 때부터, 토파즈는 그날 그가 평소와 다른 말을 꺼내리라는 사실을 예감했다.
“나 이제 널 만나러 오기 힘들 것 같아.”
“……왜 못 오는데?”
토파즈는 내심 충격받았지만 그렇지 않은 척 물었다. 남자는 복잡한 얼굴로 토파즈의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토파즈는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서운해?”
“당연한 거 아니야? 내 인생에 어른 같은 어른이라고는 당신뿐이었는데.”
“겨우 나 같은 게 괜찮은 어른으로 보인다니 세상 참 암울하네.”
남자가 쓰게 웃었다.
“그래서 왜 못 오느냐고.”
“난 용병이야. 원래 여기저기 떠도는 게 일이지. 그동안 수도에 오래 머물렀던 게 오히려 특별한 일이었어.”
토파즈에게는 인생이 바뀔 정도의 만남이 그에게는 어쩌다 만난 아이에게 베푼 짧은 친절일 뿐이었다. 알고 있었음에도 그가 오늘 찾아오지 않았다면 어디로 사라졌는지조차 몰랐으리라는 깨달음이 뼈아팠다. 토파즈가 이를 악물었다.
“나도 따라갈래.”
“애들이 갈 만한 곳이 아니야.”
“그럼 뭐, 여기는 애들이 있을 만한 곳이고?”
남자가 한숨을 내쉬며 주머니에서 연초를 꺼냈다. 그는 불붙이지 않은 연초 끄트머리를 잘근잘근 씹어 댔다. 명백히 흔들리고 있었다. 토파즈가 그를 올려다보며 쐐기를 박았다.
“데려가 줘, 스승님.”
“…….”
남자의 입에서 연초가 툭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난 아직 배울 게 많아. 민폐 끼치지 않을게. 하루에 한 끼만 주면 뭐든 시켜도 돼.”
“……누굴 쓰레기로 만들 생각이야……?”
그는 궁시렁거리면서도 거칠게 머리칼을 헤집었다. 남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토파즈에게 다시 한번 손을 내밀었다.
“내 이름은 유리야. 스승의 존함 정도는 알고 있어야지.”
허락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토파즈는 숨을 들이켜며 남자, 유리의 손을 꽉 붙잡았다.
“진짜 안 어울리는 이름이네.”
유리는 피식 웃으며 맞잡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용병들 사이에서 ‘유리’라는 이름 두 글자는 무척 유명했다. 그는 제국에서 손에 꼽게 이름 날리던 용병단의 단장이었다. 지금은 녹스의 전신이 된 곳이었다.
토파즈는 그를 따라 용병단에 들어갔다. 정식 입단이 아닌 심부름꾼 같은 위치였지만 용병단원들은 토파즈를 성가시게 여기지 않았다. 그저 ‘단장이 하다 하다 이제는 어린애까지 주워 왔다’며 혀를 끌끌 찰 뿐이었다.
“안녕. 네가 토파즈구나.”
토파즈는 그곳에서 탄자를 만났다. 눈처럼 흰 백발을 길게 기른 탄자는 한눈에 봐도 유리의 아들이었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는 유리보다 조금 어두운 색이었다.
탄자는 토파즈보다 한 살이 많았다. 아직은 탄자라는 멋없는 별칭 대신 어머니가 직접 지어 준 이름을 쓰고 있었지만 토파즈는 그 이름을 불러 준 적이 몇 번 없었다.
꼴사납게도, 어린 토파즈는 탄자를 질투했다. 그가 유리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부모가 있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부러웠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성격도 극과 극이었다. 토파즈는 검 외에 다른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탄자는 음악도, 시도, 사람도 좋아했다. 음식이야 배만 채우면 된다고 생각하는 토파즈와 달리 입맛이 까다로웠으며 대책 없이 낙관적이었다. 현실적이다 못해 비관적인 토파즈가 듣기에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늘어놓기도 했다.
‘대체 넌 누굴 닮은 거야? 유리도 너만큼 머리가 꽃밭이진 않아.’
‘난 아버지 안 닮았어. 나보단 네가 아버지를 닮았지.’
‘거울 안 봐?’
탄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얼굴 빼고는.’
둘은 아웅다웅 싸우면서도 유년기를 함께 보냈다.
유리와 그의 부인인 라리사가 입버릇대로 동료들을 지키다가 목숨을 잃었을 때도, 토파즈가 고작 열여덟 살에 마수로부터 수도를 지키고 영웅이라는 과분한 위명을 얻었을 때도.
‘용병들에게는 너무 체계가 없는 것 같지 않아? 이름 있는 소수의 용병단을 제외하면 다들 실력도 들쭉날쭉한 데다, 같은 용병이라고 연대하거나 돕는 경우도 없어. 무질서한 까마귀들 같지.’
‘그래서?’
‘자유와 질서는 양립할 수 없는 걸까? 자유를 바탕으로 하더라도 일관된 체계나 규율이 있었으면 좋겠어. 기사단처럼 말이야.’
‘…….’
‘토파즈. 네 활약 덕분에 지금 용병에 대한 인식은 그 어느 때보다 좋아. 적절한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아?’
토파즈가 시큰둥한 얼굴을 하자 탄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넌 관심 없어?’
‘어. 난 스물다섯 살까지만 용병 하고 때려치울 거야.’
토파즈는 단호하게 대꾸했고 탄자는 그게 농담인 줄 알았던지 피식 웃었다. ‘용병 가넷’의 이름값은 토파즈 본인도 어찌하지 못할 만큼 치솟고 있었고, 스물다섯이면 한창 전성기를 누릴 나이였으니 그렇게 여기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토파즈는 더없이 진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