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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토파즈 (39)화 (39/110)

#039

유일한 가족, 가넷을 잃은 직후 토파즈는 희망도 절망도 없이 그저 살아갔다. 숨이 붙어 있기에 살아갈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칼을 갈며 준비해 온 복수가 끝났지만 그는 여전히 썩은 장미의 거리의 천덕꾸러기였고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어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소매치기였다.

당시 토파즈의 나이는 열 살 남짓이었지만 누구도 토파즈를 그 나이로 보지 않았다. 잘 먹지 못해 말랐으나 키는 빗자루처럼 컸고 눈빛도 아이의 눈빛이 아니었던 탓이었다.

덕분에 나이를 속이는 일은 쉬웠다. 토파즈는 누군가 나이를 물으면 반드시 열세 살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종종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출신도 모르고 보호자도 없는 아이에게 주어진 일은 단순히 궂은 일이라고 부르기에도 부족한 일들뿐이었다.

어른들은 서슴없이 아이들을 위험한 자리로 밀어 넣고 착취했다. 고분고분하게 구는 법을 몰랐던 토파즈는 쉽게 눈 밖에 났고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쫓겨나는 일도 많았다. 그럴 때면 토파즈는 하루를 버티기 위해 다시 소매치기로 돌아갔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간밤에 받아 둔 빗물 몇 모금 외에 온종일 아무것도 입에 넣지 못한 토파즈는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먹잇감을 물색했다.

토파즈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하얗게 센 듯한 백발을 가진 젊은 남자였다. 머리칼은 귀밑으로 반 뼘 정도 내려오는 단발이었고 왼쪽 눈썹에 작은 흉터가 있었다. 허리에 검을 차고 있었지만 망토 아래로 보이는 덩치는 그리 크지 않았다.

검을 차고 있는 사람의 주머니를 터는 것은 모험적인 선택이었지만 토파즈는 날렵했기 때문에 실패한 적이 손에 꼽았다.

무엇보다 남자는 벽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 연초를 태우고 있었다. 멍하고 의욕 없어 보이는 표정도 토파즈의 자신감을 북돋웠다. 다른 일에 정신을 팔고 있는 사람은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툭. 토파즈는 바닥을 보고 걷는 척하다가 일부러 그에게 가서 부딪쳤다.

“죄송합니다.”

사과하는 동시에 칼로 주머니를 찢었다. 가죽으로 된 돈지갑이 떨어졌다. 횡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꼬맹아.”

떨어지는 지갑을 낚아채 주머니에 챙기는 순간 팔뚝이 붙잡혔다. 모른 척 털어내려 했지만 팔뚝을 감싸 쥔 아귀힘은 고작 열몇 살짜리 소년이 털어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리자 백발의 남자가 여전히 맹해 보이는 눈으로 토파즈를 바라보고 있었다. 딴생각 중인 게 아니라 원래 생긴 게 저따위인가 보다.

횡재했다는 생각은 단숨에 사라졌다. 남자가 한 손으로 피우던 연초를 끄며 토파즈를 향해 히죽 웃었다.

“도둑질도 사람 봐 가면서 해야지.”

“……씨발.”

아니라고, 사람 잘못 봤다고 발뺌부터 해야 했는데 암담한 상황에 저절로 욕이 튀어 나갔다.

“어쭈, 욕해? 주머니 털린 건 난데 왜 네가 욕을 하냐.”

“죄송합니다. 한 번만 봐주세요…….”

“으응, 그래. 영혼 없는 사과 잘 들었어.”

아무래도 또라이한테 잘못 걸린 것 같았다. 빠르게 판단을 마친 토파즈는 팔뚝을 붙든 힘이 약해진 틈을 타 남자를 밀치고 도망쳤다. 그동안 토파즈의 목숨을 수없이 살려 준 두 발이었다. 그는 발이 빨라서 작정하고 달렸을 때 한 번도 붙잡혀 본 적이 없었다.

“달리기 빠르네?”

“…….”

그러나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토파즈의 옆을 따라붙었다. 죽을힘을 다해 도망치는 토파즈와 달리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남자는 집요하게 뒤따라오면서도 토파즈를 잡아채거나 지갑을 돌려달라고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나란히 달리기 경주라도 하는 꼴이 되었다.

“너 말이야. 소매치기보다는 다른 게 어울리겠어.”

흥미 어린 시선이 왜 그렇게까지 거슬리고 화가 났는지. 토파즈는 도망을 멈췄다. 그리고 평소라면 고르지 않았을 어리석은 선택지를 고르고 말았다. 텅 빈 위장이 사리 분별을 흐리게 만든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봐달라고 했잖아.”

토파즈는 짓씹듯 말하며 남자의 옆구리에 칼을 들이댔다. 갑자기 달리다가 멈춰 선 두 사람을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바짝 붙어 서 있었기 때문에 토파즈가 칼을 들이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본인들뿐이었다.

토파즈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이건 소매치기가 아니라 강도질이었다. 재물을 빼앗는다는 결과가 같다면 둘에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토파즈에게는 완전히 달랐다. 그는 먹고살기 어렵다는 이유로 강도질을 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가넷이 알았다면 어떤 얼굴을 했을까.

……하긴, 어차피 이미 사람도 죽였는데. 게다가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기회가 올지 모른다. 도저히 내일까지 굶어서 버틸 자신이 없었다. 경비대에 신고를 당하기라도 하면 큰 고초를 치를 터였다. 토파즈는 속으로 변명을 주워섬기며 동생의 얼굴을 떨쳐냈다.

핏발 선 눈을 들어 올리자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기묘한 보랏빛 눈동자였다. 조금만 잘못 움직이면 칼에 찔릴 상황인데도 그는 당황하거나 겁에 질린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입꼬리를 당기며 웃고 있었다.

다음 순간 토파즈는 땅에 메다 꽂혔다. 발을 걸어 중심을 무너뜨리고 칼을 쥔 손목을 가볍게 비트는 움직임을 느꼈지만 느끼기만 할 뿐 저항할 수는 없었다.

“윽!”

퍽! 남자는 빼앗은 칼을 휘휘 돌리다가 토파즈의 얼굴 옆에 꽂아 넣었다. 천도 겨우 찢을 정도로 낡고 무딘 칼이 돌바닥에 한 뼘이나 박혀 들어갔다.

“허억.”

허리춤에 검을 차고 으스대는 어중이떠중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남자였다. 악을 쓰며 버둥거리던 토파즈는 두려움이 서린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죽겠구나 했다. 허무했다. 어차피 이럴 거면 칼을 들이대지는 말걸. 그냥 굶어 죽을걸. 아득바득 살아 봤자 의미 있는 삶도 아닌데 죽는 순간까지 꼴사납고 무력한 자신에게 화가 났다.

남자는 몰려드는 구경꾼들에게 갈 길 가라며 성의 없이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바닥에 누워 몸을 떨면서도 씨근덕거리는 토파즈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토파즈가 이를 바득 갈았다.

“처웃지 말고 경비대에 넘기든 죽이든 해.”

그가 손을 뻗어 토파즈의 턱을 고정했다. 손바닥은 생각보다 더 커다랬고 굳은살이 박여 거칠었다.

“맹랑하긴. 누가 너 죽인대? 너 나 좀 보자.”

“보긴 뭘, 읍. 지갑 돌려줄 테니까 꺼져, 좀.”

뺨을 쥐고 제멋대로 돌려대며 얼굴을 살피는 시선이 느껴졌다.

“몇 살이야?”

“열세 살.”

“거짓말 같은데…….”

미친놈이 이제는 길바닥에서 몸까지 만지작거렸다. 어깨와 가슴의 골격을 살피는 듯한 손길이었지만 불쾌한 건 매한가지였다.

“아저씨 변태야? 왜 주물럭거려?”

“내가 너만 한 아들이 있는데 설마.”

남자가 양손을 모두 떼어내 어깨 옆으로 들어 올리며 결백하다는 시늉을 했다. 토파즈만 한 아들이 있다는 그의 말은 전혀 믿기지 않았다. 그는 많이 쳐 줘도 이십 대 후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토파즈에게 손을 내밀었다. 토파즈는 그 손을 잡지 않고 혼자 일어섰다. 남자가 피식 웃으며 주머니에 양손을 꽂았다.

“좀 궁금해서. 내 주머니를 터는 데 성공한 사람은 네가 처음이거든.”

“실패했는데.”

토파즈가 불퉁하게 대답했다. 왠지 얄밉게 웃고 있는 이 남자가 자신을 죽이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이려면 진작 죽이지 않았겠는가.

“아, 뭐어. 이 정도면 절반의 성공이라고 봐야지. 네가 코앞까지 다가오는데 전혀 못 느꼈거든. 말이 돼?”

“말이 안 될 건 또 뭔데? 방심하다가 주머니 털리는 한심한 놈들이 한둘인 줄 알아? 넌 뭐가 그렇게 다르다고.”

“이야. 싹퉁머리 없는 것까지 딱, 너는 소매치기보다는 검사가 어울린다.”

“어쩌라는 거야? 안 죽일 거면 지갑 돌려줄 테니까 갈 길 가.”

토파즈는 남자의 지갑을 돌려주었다. 남자는 지갑을 건네받더니 흐음, 목이 울리는 소리를 냈다.

“왠지 지갑이 좀 얇아진 것 같은데?”

“……뭔 헛소리야.”

몰래 동전 한 닢을 빼놓았던 토파즈가 발뺌했지만 남자는 이미 확신한 듯 키득거렸다. 귀밑에서 짧은 백발이 흔들렸다.

“너 같은 애가 함부로 무기를 드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는데, 신기하게도 꼭 무기를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더라.”

이런 게 운명인가? 남자가 알 수 없는 소리를 떠들어대며 토파즈를 바라보았다. 당시에는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마 그는 토파즈가 마나를 다루는 자질이 있음을 한눈에 알아본 것이었을 테다.

토파즈가 한 귀로 흘려들으며 얼굴을 찡그리자 남자가 처음으로 진지한 눈을 했다.

“그러니까 제대로 드는 방법을 알아야 한단 이야기야. 너, 누군가를 다치게 하는 힘이 아니라 지키는 힘을 갖고 싶지 않아?”

토파즈가 행동을 우뚝 멈췄다. 지키는 힘. 한때 토파즈에게 가장 필요했던 힘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더는 지킬 사람도 없는데 그딴 힘을 가져서 뭐 해.”

“언제 생길지 모르는 네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지.”

“필요 없어.”

더는 소중한 사람 따위 만들지 않을 테니까. 토파즈는 속으로만 덧붙였다.

“그래. 네 선택이 그렇다면야 내가 강요할 수는 없지.”

남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토파즈는 잘 가라며 손을 휘적대는 그의 인사를 무시하고 발길을 돌렸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은 다행스럽지만 다시 생각해도 별난 인간이었다. 토파즈는 상념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내젓다가 문득 주머니가 무거운 기분에 멈춰 섰다.

“…….”

앞주머니를 더듬자, 분명 돌려주었던 지갑이 다시 토파즈에게 돌아와 있었다. 안에는 돈이 가득 차 있었다.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지만 남자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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