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38)화 (38/110)

#038

‘예하’? 종교에서 추기경이나 대주교 등 고위 성직자를 가리키는 칭호였지만 제국민들에게는 낯선 단어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교주라는 단어도 얼핏 들은 것 같았다.

제국에서 유일하게 공인된 종교인 다프닌교에서는 성직자들을 오로지 신관으로만 칭했다. 그들은 성직자이면서 동시에 관직자이기 때문이었다.

‘혹시 그 소문이 사실 아니야? 왜, 이교도가 사람들 세뇌시키려고 데려간다는 소문.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잖아.’

이교도가 연관되어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던 걸까. 이교도에서 자기들끼리 추기경이니 뭐니 하는 칭호를 사용한다는 것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마 곧 근거지를 옮기라고 명령하실 것 같다. 준비해 둬.”

“예, 알겠습니다.”

토파즈는 저도 모르게 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갔다가 검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팔을 내렸다. 그는 언제든 튀어 나갈 수 있도록 짐칸 한쪽 벽에 기대어 서서 바깥을 살폈다.

얼마 뒤, 바퀴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소리가 멈추고 마차 문이 열렸다. 용병으로 추정되는 열 명의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도열하는 소리가 들렸다.

“추기경 예하,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마차에서 새롭게 내린 인원은 총 넷이었다. 그중 둘은 민간인, 둘은 자신의 기척을 숨기는 데 능숙한 이들이었다. 적이 늘어나는 것은 토파즈로서 전혀 반갑지 않은 일이었다.

“지나던 길일세. 아니면 내가 친히 여기까지 올 일이 있겠는가?”

추기경이라고 불린 자는 목소리가 낮은 여자였다. 고압적인 어조에 남부식 억양이 묻어났다.

“새장의 새는 총 몇 마리입니까?”

낯선 목소리가 추기경 대신 입을 열었다.

“그제와 어제는 각 셋, 오늘은 여섯으로 총 열둘입니다.”

“적은데.”

추기경이 짧게 말했다.

“요즘 이 인근 영지민들의 경계가 심해졌습니다. 작은 도시라 소문이 빠르고 경계가 심해 밤이 되면 다들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질 않습니다.”

“예하께서도 그 점을 염려하시어 직접 살펴보러 오신 겁니다. 날이 밝기 전에 새장을 옮기고 이곳을 정리하십시오.”

“지금 바로 말입니까?”

“아무리 돈을 찔러 줘도 꼬리가 길면 잡히게 되어 있어. 그러게 무작정 잡아들이지 말고 뒤탈이 없는 것들로 잘 골랐어야지.”

추기경의 말에 상대가 말끝을 흐렸다.

“그렇게 하면 수급을 맞추기가 쉽지 않아서…….”

“지금 그대들의 무능력을 시인하는 건가? 최고의 용병들만 모아놨다고 들었는데, 내 기대가 컸던 것 같군.”

최고의 용병? 숨죽인 채 대화를 듣던 토파즈가 얼굴을 굳혔다. 자연스럽게 최고라고 칭할 만한 용병단은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는데. 설마…….

“예하, 너무 노여워 마시지요. 새들의 수가 적으니 찾기 어려운 것이 당연합니다. 속도를 우선시하느라 사소한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뒤탈은 없을 것입니다. 녹스가 아닙니까.”

추기경의 수하로 추정되는 자가 그를 달래듯 말했다. 그 입에서 흘러나온 단어가 토파즈의 귀에 박혔다.

녹스. 잊으려 해도 자꾸만 그 이름이 튀어나온다. 토파즈가 기대하지 않았던 순간에.

“모두 마법사의 자질을 가진 이가 맞는지 확인해 봐야겠다.”

“이쪽입니다.”

녹스의 용병들이 왜 이런 사건에 엮여 있는지, 일부의 일탈인지, 윗선의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는지 가늠하느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지금 답을 내릴 수 있는 문제는 하나도 없었다.

저벅저벅, 여기저기로 흩어져서 움직이는 발소리가 들렸다. 토파즈가 탄 마차로 다가오는 발걸음도 있었다.

토파즈는 머릿속을 가득 채운 혼란을 밀어내고 후드를 푹 눌러 썼다. 길게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상대가 틈을 보일 만한 시간은 지금뿐이었다.

곧 끼이익, 낡은 경첩 소리와 함께 짐칸의 낡은 문이 열렸다. 가림막용으로 덧대어 있던 천막이 바람에 휘날렸다. 토파즈가 몸을 날린 것은 그 틈이었다.

“헉!”

토파즈는 마차 밖에 서 있던 무리의 머리 위로 높게 뛰어올랐다. 후드 자락이 펄럭였다. 토파즈는 문 앞에 멍청히 서 있는 용병의 허리춤에서 검을 빼앗았다. 토파즈를 여기까지 짐짝처럼 싣고 온 남자였다.

마나로 강화하지 못한 신체로 이 구속구를 부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코끼리라도 불가능했다. 그러나 불가능한 건 손목을 감싼 동그란 구속구 본체일 뿐, 두 손목 사이를 잇고 있는 쇠사슬은 평범한 강도였다. 토파즈는 진작 그 사슬을 끊어낸 지 오래였다.

두 손이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지만 대충 모래주머니를 매달고 있다고 생각하면 괜찮았다. 마나 감응력이 있는 정예 검사들은 마나로 강화한 제 몸만 믿고 싸우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검사가 마나를 못 쓴다고 싸움을 못 하면 그냥 관짝에 들어가야 한다는 게 토파즈의 생각이었다.

이곳에 있는 적은 총 열넷. 추기경을 포함한 민간인 둘을 제외하면 열둘이었다. 토파즈는 빼앗은 검을 휘둘러 가까이에 서 있던 두 사람의 목부터 차례대로 꿰뚫었다. 토파즈를 납치해 온 삼인조 중 젊은 남녀였다. 토파즈는 크게 뜬 채 굳은 눈을 싸늘히 마주했다.

“당장 붙잡아!”

토파즈가 달려오는 용병들을 차례대로 베어내느라 뒤를 신경 쓰지 못하는 동안, 누군가 문이 열린 짐칸으로 들어갔다.

“마을에서 고용한 용병인가? 당장 검 내려놔.”

말을 건 이는 토파즈를 기절시킨 장본인이었다. 그는 스무 살은 되었을까 싶은 기절한 여자의 목에 단도를 들이대고 있었다.

“당장 검 버리지 않으면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죽여, 컥……!”

그러나 인질로 잡으려던 시도는 말을 끝맺기도 전에 실패로 돌아갔다. 아이의 목에 단도를 들이대던 남자의 미간에 짧지만 날카로운 은장도가 꽂혀 있었다. 남자의 몸이 뒤로 풀썩 쓰러졌다.

토파즈는 저벅저벅 다가가 미간을 꿰뚫은 은장도를 뽑았다. 치덕치덕 묻은 피를 남자의 옷깃으로 닦아냈다.

아이를 떼어내 다시 마차 안에 눕혀 놓고, 남자의 옷자락을 붙잡아 뒤에서 접근하는 다른 적에게 날렸다. 앞에 오던 놈이 남자의 몸에 깔려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토파즈는 주변을 짧게 둘러보았다. 전력을 모르는 상태로 남은 적들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토파즈는 추기경이라고 불린 자부터 찾아냈다.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혼란 속에서 맞서 싸우는 대신 귀한 자기 몸부터 보신하려고 마차로 향하는 이를 찾으면 되었다. 토파즈는 날아오는 검들을 쳐내며 곧바로 추기경에게 달려가 그의 목에 검 끝을 들이댔다.

“예하인지 성하인지 죽이고 싶지 않으면 검 내려.”

용병들이 머뭇거리며 고용주, 즉 추기경의 눈치를 살폈다. 생각할 시간을 오래 주어서는 안 됐다.

“이, 이 건방진 자식이…….”

토파즈는 몸을 떨면서도 입을 다물지 않는 추기경의 목에 검을 더 가까이 붙였다. 목에서 선혈이 흘러내렸다. 여기가 어딘지는 몰라도 이대로 인질로 잡아서 마차를 타면…….

푹. 그때 뒤에서 찔러 들어온 검이 왼쪽 어깻죽지를 파고들었다.

이렇게 깊게 찔려 본 게 얼마 만이더라. 최근 몇 년이 꽤 평화롭기는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파즈는 몸을 비틀어 어깨에 박힌 검을 빼내고 곧바로 몸을 젖혔다. 거친 움직임에 후드의 어깨 부분이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지만 이미 입은 상처에 신경 쓰다가는 목숨마저 내주기 십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토파즈가 피하자마자 그 자리로 검이 찔러 들어왔다. 추기경은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인질을 붙들고 상대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본능적인 판단 때문이었다. 토파즈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 거리를 벌리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상대는 검은 로브를 입고 있었다. 얼굴은 가리고 있어 보이지 않았지만 추기경과 함께 나타난 네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추기경이라고 불리는 이의 호위를 맡을 정도이니 이 중에서는 가장 실력자겠지. 그는 왼손으로 검을 들고 있었다.

긴장감 때문일까. 심장이 둔중하게 뛰었다.

토파즈는 검은 로브의 목을 노리고 검을 길게 휘둘렀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날 정도로 날렵한 공격이었지만 상대는 목을 젖혀 가볍게 피했다. 틈을 노려 연이어 옆구리를 공격했다. 검은 로브는 공중에서 몸을 한 바퀴 돌렸다. 공격을 피하는 동시에 거리를 벌리는 움직임이었다.

그때 상대가 쓰고 있던 후드가 벗겨지며 새카만 로브와 대조되는 하얀 머리칼이 쏟아졌다.

두근, 두근. 토파즈의 심장이 무언가를 예감한 듯 세차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자세를 회복하고 선공해 왔다. 토파즈는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서 막았다. 챙, 귀를 찢을 듯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팽팽하게 부딪치는 검을 사이에 두고 시선이 마주쳤다.

“……!”

눈처럼 새하얀 백발에 어두운 보랏빛 눈동자.

지금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활동명을 ‘가넷’으로 하겠다고? 너 보석을 그렇게까지 좋아했었나?’

경악한 목소리가 어제 들은 것처럼 귓가에 선명했다. 그에 대답하는 자신의 불퉁한 목소리도.

‘제대로 본 적도 없는데 무슨.’

‘그럼 왜?’

‘내 동생 이름이었어.’

그는 동생 ‘이름이었다’는 말에 무슨 소리냐고 되묻지 않을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미안하다며 의미 모를 사과를 건네지도 않았다. 한때는 그게 배려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저 턱을 괴더니 흐음, 낮게 목을 울렸다. 하나로 길게 땋아 묶은 머리칼을 습관처럼 손가락으로 휘휘 감았다.

‘나도 너 따라서 지어볼까? 보석 이름이 또 뭐가 있지.’

‘내가 알 거라고 생각해?’

‘하긴.’

시큰둥한 대답에도 즐겁다는 듯한 웃음소리가 뒤따라왔다.

그는 여기저기에 보석 이름을 묻고 다니는 것 같더니 얼마 뒤 토파즈를 붙잡고 눈을 반짝였다.

‘‘탄자’ 어때? 내 눈동자가 보라색이잖아. 클로에가 그러는데 비슷한 이름의 보석이 있대. 그리고 자기 활동명은 베릴이라고 짓겠다던데.’

‘유치해.’

‘잘됐네. 내가 원하던 게 딱 그거야. 난 평소에 너무 진중해서 좀 유치할 필요가 있거든.’

탄자. 멀쩡한 본명을 두고 그런 가명을 쓰던 놈이었다.

장난처럼 지은 이름이었지만 이제는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제국에 흩어져 있던 무수히 많은 용병단을 하나로 통합한 거대 길드, 녹스의 수장.

한때 토파즈가 등을 맡겼던 동료이자, 4년 전 그의 등에 검을 꽂은 장본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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