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37)화 (37/110)

#037

검을 차지 않고 돌아다니는 것은 무척 오랜만이었다. 토파즈는 허전함을 잊기 위해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토파즈는 미리 주머니에 챙겨 뒀던 손바닥만 한 술병을 땄다. 양은 적지만 그만큼 독한 술이었다. 술병을 입에 대어 혀끝만 살짝 적시고 남은 술은 머리칼과 옷 위에 조금씩 뿌렸다. 마지막으로 일부러 후드를 반쯤 젖혀 얼굴을 드러냈다.

아까까지만 해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면, 새벽이 깊은 지금은 그야말로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적막했다. 실종 사건 따위가 없었더라도 모두가 잠들었을 시간이었다.

간혹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토파즈처럼 술 냄새를 풍기는 취객들뿐이었다. 그리고 위험한 일은 대부분 이런 어둠을 틈타 벌어졌다.

토파즈는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잘 걷다가 비틀거리거나 중간중간 멈춰 서는 모습이 뒤에서 보면 영락없는 만취객이었다.

“으, 흡!”

그때 멀지 않은 골목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입이 막힌 채로 비명을 지르는 소리와 버둥거리면서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 머지않아 고요해지는 기척까지 토파즈의 귀에 선명하게 잡혔다. 토파즈는 발소리를 숨기지 않고 그 방향으로 걸어갔다.

골목 안쪽에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이 서 있었다. 남자는 축 늘어진 인영을 등에 업고 있었고 여자는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새카맣고 네모난 상자였는데 가운데에 동그란 보석 같은 것이 박혀 있었다.

“거기 무슨 일이에요?”

“아이, 별일 아니에요. 친구가 술에 취해서요. 야, 이 새끼야. 좀 일어나 봐아!”

혀가 꼬인 발음으로 묻자 마찬가지로 뭉개진 발음의 대답이 돌아왔다. 등에 업은 이의 어깨를 허물없이 두드리는 그들은 겉만 봐서는 아까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철없이 떠들던 젊은이들과 전혀 다를 바 없이 보였다. 편안한 옷차림에 가벼운 말투, 천진한 표정까지 모두 그랬다.

납치범이라면 음침하게 후드나 복면 따위를 쓰고 얼굴을 가리고 있을 것이라는 편견에 따르면 그들보다는 토파즈 쪽이 더 납치범 같아 보였다.

실제로 그들에게서는 술 냄새가 코를 찌를 듯이 풍겼다. 그러나 토파즈의 눈에는 그들의 옷깃과 바닥에 덜 마른 물기가 스며 있는 흔적이 보였다. 조금 전 토파즈가 한 행동을 그들도 똑같이 한 것이었다.

독한 술 냄새 사이로 희미하지만 이질적인 냄새도 섞여 있었다. 아마도 등에 업은 이를 기절하게 만들었을 향이다.

“도와줄까요?”

토파즈가 휘청거리며 조금 더 가까이 가자 여자의 손에 쥐어져 있던 보석이 희미하게 노란빛으로 빛났다.

“아니.”

대답은 등 뒤에서 들려 왔다. 후욱, 코를 찌르는 알싸한 향기와 함께 뒤에서 누군가가 팔을 뻗었다. 곧 축축한 천이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토파즈는 코를 찌르는 냄새에 얼굴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축 늘어지는 몸을 받아 안은 사람은 새롭게 나타난 조금 더 나이가 있는 남자였다.

“무슨 색이야?”

“노란색. 엄청 희미한데…… 설마 기사는 아니겠지?”

“눈이 있으면 좀 봐, 멍청아. 검 안 차고 있잖아. 한 방에 두 명이라니 이게 웬 횡재야?”

“조용히 하고 얼른 태워. 시간 없어.”

납치범 삼인조는 토파즈를 업고 빠르게 움직였다. 허술해 보이던 겉모습과 달리 기척을 숨기는 실력과 움직임 모두 수준급이었다.

토파즈는 짐짝처럼 어딘가에 실렸다. 길가에 세워져 있던 4인승 마차였다. 외곽을 달리던 마차는 중간에 경비병에게 검문을 당했지만, 납치범들은 천연덕스럽게 술 취한 연기를 하며 의심 선상에서 벗어났다. 마부 행세를 하던 남자 역시 어렵지 않게 신분을 증명해 냈다. 빨리 지나가게 해 달라며 돈주머니를 슬쩍 건네기도 했다.

그들은 중간에 마차를 한 번 갈아탔다. 짐이나 가축을 운송하는 용도로 쓰는 커다란 짐마차였다.

끼이익. 납치범 삼인조는 토파즈를 짐칸에 싣고 손목과 발목을 묶었다. 발목은 평범한 밧줄로 묶었지만 손목에 채워진 것은 두께가 손가락 두 마디 굵기에 가까운 쇳덩이였다.

토파즈는 주변이 조용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눈을 떴다. 애초에 잠이 든 적은 없었다. 마수를 잡기 위해서는 마수 굴에 들어가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을 뿐.

빛 한 점 없이 캄캄했지만 그의 눈은 금세 어둠에 적응했다. 짐칸에는 토파즈를 제외하고도 다섯 명의 사람이 있었다. 모두 손발이 묶인 채로 잠들어 있었다.

그는 마차 안을 둘러보다가 예상대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여관 주인의 아들이었다. 짚 더미 위에 엎어져 있는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잠들었을 뿐 특별히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토파즈는 일단 발목을 하나로 묶고 있는 밧줄을 힘으로 끊었다. 밧줄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풀렸다. 문제는 손목에 채워진 족쇄였다.

이 족쇄가 손목에 닿은 순간에는 기절한 척하던 것도 잊고 얼굴을 굳힐 뻔했다. 지금이라도 그들을 후려치고 다른 방법을 찾아볼까 고민도 했다.

하지만 고민은 짧았다. 이들이 결코 평범한 납치범이나 노예상 따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족쇄가 손목을 구속하는 순간 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 났다. 정확히는 힘이 아닌 마나였다. 이것은 평범한 수갑이 아니라 마나 구속구였다. 마법사가 마법을 쓰지 못하게 만들고, 검사는 몸 안에서 마나를 운용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족쇄.

마석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진짜 쇳덩이처럼 무겁지는 않았지만 묵직한 모래주머니를 차고 있는 듯한 느낌은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양 손목을 가운데로 모으는 짧은 쇠사슬이 이어져 있어 운신이 불편했다.

마나 구속구는 나라에서 범죄자를 구속하기 위해 쓰이는 물건이었다. 악용을 막기 위해 까다롭게 생산되고 유통은 철저히 통제되었다.

없는 게 없는 암시장에서는 몇 번 본 적 있었지만, 워낙 공급이 귀한 물건이라 가격은 부르는 사람 마음대로였다. 토파즈는 이 구속구 한 쌍의 가격이 10골드 이하로 내려간 것은 본 적이 없었다. 가격으로만 따지면 손목에 보석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일개 납치범이나 인신매매범들이 ‘혹시 이 중에 마법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드문 가정 때문에 일일이 채워 놓기에는 지나치게 귀한 물건이라는 뜻이었다.

토파즈는 마차 안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모두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로 보이는 앳된 얼굴들이었다. 그리고 토파즈를 제외한 다섯 명 중 네 명에게서 그가 감지할 수 있을 만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마법사, 혹은 마법사의 소질을 타고난 이들이라는 뜻이었다.

납치범으로 위장한 훈련받은 용병들, 마력이 느껴지는 어린 피해자들, 마나 구속구……. 토파즈의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여러 정황이 하나로 도달했다.

이건 마법사를 대상으로 한 계획적인 납치일지도 모른다.

* * *

토파즈는 바깥의 동태에 귀를 기울였다. 마차는 외진 숲길을 지나는지 연신 덜컹거렸다. 나무 틈으로 희미한 빛줄기가 새어 들어왔다. 짹짹, 마차 위에 참새라도 올라탄 것인지 연신 재잘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동이 텄다는 이야기였다.

지금부터 뛰어간다고 쳐도 두 시간 안에 돌아가기는 글렀다. 토파즈는 가볍게 체념했다.

동시에 미약한 불안감이 샘솟았다. 아직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들이 마법사를 표적으로 삼은 것이 맞다면, 가장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 그의 일행 중에 있지 않은가. 괜히 자신을 찾겠답시고 나돌아다니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토파즈는 사람들의 발목에 묶인 밧줄을 느슨하게 풀어놓고 몸가짐을 점검한 뒤 몸을 비틀었다. 슬슬 지루했다. 그냥 지금이라도 뛰쳐나가서 앞에 앉은 놈들을 쥐어팰까 고민하는데 때마침 마차가 멈춰 섰다.

바깥에서 느껴지는 기척이 늘어났다. 하나, 둘, 셋…… 총 일곱 명이었다. 이 마차에 타고 있는 놈들까지 합하면 열. 모두 훈련받은 움직임이었다.

“몇 명이지?”

“총 여섯.”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와 바닥의 질감, 흙냄새로 추측해 보자면 숲 한가운데에 있는 공터 같았다. 면적이 작지 않은 것 같은데 어떻게 여태까지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었는지 의문스러웠다. 이런 곳에 마법사들을 잡아다가 뭘 하려는 것인지도 궁금했다.

그 의문을 가진 사람이 토파즈만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토파즈를 잡아 온 세 사람이 마차에서 내리더니 저들끼리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근데 ‘새’들을 잡아서 어쩌려는 거야? 쓸모가 있나?”

“글쎄. 우리 쪽으로 포섭하려고?”

“교주님은 새를 싫어하시잖아. 혹시 그냥 데려가서 죽이려는 거 아니야?”

“그럴 거면 뭐 하러 힘들게 산 채로 잡아가냐? 처음부터 죽이는 편이 우리도 편한데.”

“어, 그러게?”

“그건 너희가 궁금해할 영역이 아니니까 신경 꺼. 우리는 시키는 일만 돈 받은 대로 하면 되는 거야.”

“예엡.”

‘새’는 마법사를 칭하는 은어 같았다. 그리고 세 명 중에서는 토파즈를 뒤에서 덮친 남자가 리더 격으로 보였다. 말투나 행동을 봐서는 누군가에게 고용된 용병 같았다.

대체 어느 용병단이지? 아무리 용병이 돈에 움직이는 집단이라도 사람으로서 해도 되는 짓과 안 되는 짓이 있었다. 민간인을 납치하는 의뢰를 거리낌 없이 맡다니, 세간에 알려진다면 비난을 막지 못할 터였다. 만에 하나 용병 길드 소속이라면 자격 박탈 및 영구 제명 감이었다.

그때 마차 밖이 부산스러워져 토파즈는 벽에 기대어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어수선한 기척과 소곤거림이 이어지더니 가까운 곳에서 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예하께서 직접 오신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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