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36)화 (36/110)

#036

기억이 있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인가?

마나를 다루는 힘, 즉 마력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라고 해도 그것을 언제 깨닫는지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이었다.

제국의 의무 교육기관인 기초 학교에서는 마법을 가르치지 않았다. 이론으로 배운다 해서 마력이 있는 모든 사람이 마법을 펼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씨앗을 가지고 있는 것과 싹을 틔우는 것에는 차이가 있었으므로.

마력을 탐지하는 마도구도 있었지만 그것은 마법사에게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정예 검사에게도 반응해 정확도가 떨어졌고, 대중화되기에는 가격도 비쌌다.

그래서 세상에는 자신이 마법사의 소질을 갖고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수십 년을 사는 사람도 있었고, 끝내 모른 채로 죽는 사람도 있었다. 마법사들의 평균 연령이 높은 것도 이 문제와 관련이 있었다.

그러나 카르옌 정도로 강력한 마법사라면 어린 시절에 이미 재능을 깨달았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토파즈는 어렵지 않게 납득했다.

거리를 순찰하듯 여기저기 돌아다녀 봤지만 카르옌이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었다는 것 외에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여관 앞에서 재회한 하란과 메르디나 역시 별달리 수상한 움직임은 보지 못했다고 했다.

문제는 여관 안으로 들어왔을 때 발생했다.

토파즈는 문을 열어젖히자마자 낯빛이 파리하게 질린 여관 주인과 마주쳤다. 세 시간 전까지만 해도 능숙한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일행을 안내해 주던 남자였다.

토파즈는 1층 홀을 둘러보았다. 저녁 시간이 지난 여관에는 아까보다 적은 사람들이 있었다. 낯빛이 좋지 않은 여관 주인과 벽에 힘없이 몸을 기댄 젊은 여자, 몇 없는 숙박객들뿐이었다.

젊은 여자는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가 토파즈 일행을 확인하고 다시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손님들 역시 심각하게 무언가를 소곤거렸다.

곧 여관 주인이 일행에게 다가와 물었다.

“저기, 꼭대기 층에 묵으시는 손님들 맞으시지요? 혹시 밖에서 제 아들을 못 보셨습니까?”

“아들?”

“아까 손님들을 방까지 안내해드렸던 놈 말입니다. 그 애가 제 아들입니다.”

토파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램프를 손에 쥐여 주던 남자를 떠올렸다. 평범한 급사가 아니라 여관 주인의 아들이었던 모양이다. 여관을 자랑스레 여기던 태도가 이해가 갔다.

“못 봤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하란의 물음에 여관 주인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대답했다.

“제 아들이 사라졌습니다…….”

* * *

오늘 토파즈와 같은 방을 쓰게 된 카르옌은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본인 말로는 원래 잠귀가 예민하고 잠자리를 가린다고 하던데, 그동안 지켜본 바로는 믿기 힘든 주장이었다.

토파즈로서는 활동 범위가 넓어진 것이라 나쁘지 않았다. 깨어 있으면 너무 달라붙는단 말이야……. 뭐 하나를 해도 같이해야 직성이 풀리는 일곱 살짜리 어린애 같았다.

토파즈는 제 활동을 제약하는 첫 번째 방해물을 뒤로하고 방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조용히 거실 창문을 열고 창틀 밖으로 막 다리를 내미는데, 두 번째 방해물을 맞닥뜨리고 말았다.

“어디 가십니까?”

“…….”

메르디나였다. 방에서 기척을 듣고 나왔는지 편안한 잠옷 위에 숄을 두른 차림이었다. 메르디나가 가까이 다가와서 섰다.

“시간이 늦었습니다만. 여관 직원의 이야기가 신경 쓰여서 그러십니까?”

여관 주인의 아들은 아까 토파즈 일행이 밖으로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여관을 나섰다고 했다. 정확히는 약혼자의 집이었다.

그는 최근 결혼 준비를 하느라 바빠 일을 마치고 약혼자의 집으로 퇴근하고 있었다. 아까 넋이 나간 얼굴로 앉아 있던 여자가 그의 소꿉친구이자 약혼자였다.

약혼자의 집은 여관에서 고작 3분 거리였다. 도시에 흉흉한 일이 벌어진 이후로 남자는 비슷한 방향에 사는 다른 직원과 함께 늘 같은 시간에 퇴근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직원이 요리를 옮기다가 화상을 입어 일찍 퇴근했다고 했다.

남자는 가까우니 괜찮을 거라며 아버지를 안심시키고 혼자 여관을 나섰다. 그러나 약혼자의 집에 도착하지 못했다.

약혼자는 삼십 분이 넘도록 남자가 오지 않자 곧바로 여관으로 찾아왔다. 그리고 남자가 이미 출발했지만 도착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평소에도 여관이랑 저희 집만 오가는 애예요. 제가 시간 맞춰 기다린다는 걸 알면서 애먼 데 들를 리도 없고요. 요즘 벌어진 실종 사건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애는 아니었어요. 저한테도 항상 조심하라고 당부하고 마중도 못 나오게 했다고요. 걔가 겁이 얼마나 많은데…….’

경비대에 신고하고 기다린 지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도 소식은 없었다.

이야기를 들은 토파즈는 카르옌에게 한 가지 사실만을 확인했다.

‘여관 주인의 아들이라는 남자, 마법사 아니었어?’

‘용케 알아보셨네요. 미약하지만 심장에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카르옌은 덧붙였다.

‘제가 보기엔 마법을 다룰 줄 아는 자는 아니었습니다. 마력을 타고나기는 했지만 너무 미약해서 본인도 모르고 살았을 가능성이 커요. 평민 중에는 그런 자들이 제법 많거든요.’

여러모로 신경 쓰였다. 게다가 실마리를 얻지 못하는 동안 또 한 번의 사건이 발생했으니 가만히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겸사겸사.”

“그렇다면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토파즈는 늘 그렇듯 침착한 얼굴을 한 메르디나를 바라보았다.

“너도 날 감시하려고?”

메르디나가 고개를 기울였다. 짧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지자 군인처럼 딱딱한 말투와는 달리 앳된 뺨이 드러났다.

“제가 왜 토파즈님을 감시하려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글쎄. 수상하니까?”

“수상한 쪽으로 따지자면 토파즈님보다는 저희 셋이 더 수상하다고 생각합니다만.”

토파즈가 피식 웃었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네.”

메르디나가 몇 걸음 다가와 거리를 좁혔다. 창으로 쏟아져 들어온 달빛에 짧은 잿빛 머리칼이 은실처럼 반짝였다. 문득 그 얼굴이 카르옌과 조금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데, 메르디나가 상념을 깨듯 입을 열었다.

“딱히 수상하게 여긴 적은 없습니다. 토파즈님의 사정이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저희에게 해를 끼칠 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슨 근거로?”

“고작 말 몇 마디 섞어 본 직원의 행방이 걱정되어 직접 찾으러 나가시는 분이, 이제 와서 저희를 배신하리라는 의심은 별로 합리적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세상이 늘 합리적으로 돌아가진 않지.”

“만약 제가 틀렸다면 그때는 목숨을 걸고 토파즈님을 막아야겠죠. 하지만 그런 일은 아직 벌어지지 않았으니, 괜히 머리 아프게 의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토파즈가 헛웃음을 흘렸다.

“넌 정말…… 기사답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메르디나가 입술을 당겨 희미하게 웃었다. 엷은 미소만으로 차가운 인상이 누그러들었다. 토파즈가 어깨를 으쓱였다.

“너그럽게 봐준 건 고맙지만 역시 동행은 힘들겠어. 혼자 다녀야 수확이 있을 것 같거든.”

실종자들의 공통점은 젊은이라는 점, 그리고 그들의 실종을 목격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었다. 동행 없이 혼자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 외에도 아직 밝혀지지 않은 몇 가지 특징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거야 꼬리를 잡으면 알게 될 터였다.

토파즈는 허리춤에서 검집을 풀었다. 그리고 메르디나에게 건넸다.

“좀 맡아주겠어?”

메르디나가 얼굴을 굳혔다. 별다른 특색 없이 단출한 검집이었으나 저 안에는 잘 벼려진 검이 들어 있었다. 무엇보다 검은 쥐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그 위력을 달리할 수 있는 무기였다.

“검사에게 검은 목숨과 같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평생 위험한 일만 하고 살았는데 새삼스럽게.”

“카르옌이 깨어나면 서운해할 겁니다.”

“네가 잘 달래줘. 자기 빼고 놀았다고 서운해할 나이는 지났잖아?”

“…….”

메르디나가 양손을 뻗어 천천히 검집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훌쩍 사라질 것 같은 토파즈에게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대신 이걸 빌려드리겠습니다.”

달빛 아래에 드러난 것은 호신용 은장도였다. 겨우 손가락만 한 굵기였지만 유려한 형체며 장식이 언뜻 봐도 귀한 물건처럼 보였다.

“잃어버렸다가는 삼 대가 용병질을 해도 못 갚을 빚이 생길 것 같은데.”

“제게 소중한 것이니, 두 시간 내에 돌려주러 오지 않으시면 직접 찾으러 가겠습니다.”

“빠듯하네.”

작게 중얼거린 토파즈가 은장도를 건네받아 품에 넣었다. 그리고 그대로 뒤를 돌아 창틀을 밟고 뛰어내렸다. 바람이 거꾸로 쏟아졌다.

바닥에 조용히 착지해 고개를 들자 어둑한 창가에 선 인영이 보였다. 토파즈는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대충 손을 휘젓고 적막한 거리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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