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35)화 (35/110)

#035

토파즈 일행은 제국 동부의 도시, 베론에 도착했다. 넨베르그보다 조금 아래에 있는 도시로 험한 산맥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분지 지형이라 그동안 지나온 도시들에 비해 기후가 한층 온화했다.

“어서 오세요!”

여관의 문을 열어젖히자마자 밝은 목소리가 날아왔다. 식당 겸 홀을 바쁘게 오가던 젊은 급사가 일행을 안내했다. 목소리가 쾌활한 남자였다.

“그럼 객실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계단 조심하세요!”

네 사람이 묵을 가장 넓은 객실은 여관의 꼭대기 층에 있었다. 남의 돈으로 하는 사치에 제법 익숙해진 토파즈도 군말 없이 뒤를 따랐다.

“베론에는 처음 방문하셨나요?”

“예. 처음 왔는데 풍경이 운치 있고 좋네요.”

젊다 못해 앳된 얼굴을 한 급사의 물음에 하란이 대답했다.

“여행객이신가 보네요. 베론은 조용한 도시라서 여행을 오시는 분들이 많지는 않거든요. 다들 잠깐 들렀다가 넨베르그나 메이온으로 가시죠. 저희 여관에 머물러 주셔서 영광입니다.”

붙임성이 좋은 급사에게서 베론은 어디가 볼만한지, 유명한 음식은 뭔지 따위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금방 객실이 보였다.

“발코니가 딸려 있으니 혹시 연초를 태우실 거라면 그쪽을 이용해 주세요. 저녁 식사는 방으로 올려드릴까요, 아니면 1층에 준비해 드릴까요?”

“내려가서 먹을게요. 아까 보니까 식당 분위기가 좋던데, 거기서 먹어야 더 맛있을 것 같은 느낌이에요.”

하란이 서글서글한 눈매를 접어 웃으며 말했다. 주목적은 정보를 주워듣기 위해서겠지만 말만은 그럴싸했다. 젊은 급사는 여관 칭찬에 기쁜 기색이었다.

“저희 주방장님 솜씨가 무척 뛰어나니 꼭 드시러 오세요. 따로 드시고 싶은 메뉴가 있거나 방에서 드시길 원하시면 언제든 저를 호출해서 말씀해 주시고요.”

“신경 써 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런데 아까 오다가 슬쩍 들은 이야기인데……. 혹시 요즘 이 도시에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하란이 천연덕스럽게 모른 척하며 물었다. 시종일관 밝은 얼굴로 말을 붙이던 급사의 낯빛이 일순간 어두워졌다.

“혹시 실종 사건 말씀이신가요? 요즘 거리에서 다들 그 이야기죠?”

“네. 그렇더라고요.”

“안 그래도 손님들께도 꼭 주의 드리고 있어요. 베론이 볼 건 없어도 늘 온화하고 평화로운 도시였는데…… 최근에는 흉흉한 일이 벌어지고 있거든요.”

“누가 실종됐다는 소문이 사실인가요? 대체 어쩌다가요?”

급사의 말에 따르면 베론에서만 연이어 다섯 명의 젊은이들이 사라졌다고 했다.

“사실 아직은 밝혀진 게 없어요. 납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단순 가출이나 사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왜냐면 실종자들 사이의 공통점이 서른 살 이하의 성인이라는 점뿐이거든요.”

납치되는 현장을 본 목격자는커녕 수상한 비명 소리 하나 들은 사람도 없다고 했다. 평소와 다른 것은 며칠에 한 번꼴로 누군가가 말없이 사라진다는 사실 뿐이라고.

“그래도 전 조금 수상하다고 생각해요. 인근 마을에서 오가는 손님들에게 들었는데, 근처의 다른 도시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대요. 옆 도시에서는 어린아이들도 몇 명 사라졌다고 해요.”

“무섭네요. 인신매매 같은 걸까요?”

“정말 그럴지도 모르죠……. 그러니 여러분도 해가 지면 되도록 여관 밖으로 나가지 마세요. 다들 조심하는 분위기거든요. 손님들께서는 길도 익숙지 않으실 테니 더욱 주의하셔야 해요.”

급사는 마지막으로 재차 당부하고는 객실을 나섰다.

간신히 평화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던 도시는 해 질 녘이 되자 분위기를 달리했다. 그 시각 토파즈 일행은 1층의 식당 겸 홀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주방장의 솜씨가 훌륭하다는 급사의 말은 허풍이 아니라, 1층에는 숙박객보다도 잠시 식사하러 들른 손님의 수가 더욱 많아 보였다.

“이봐, 벌써 일몰이야.”

한 사람의 말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창밖을 살폈다. 해가 산 너머로 넘어가고 있었다. 홀이 금방 부산스러워졌다.

“아이들은?”

“여섯 시 전에 집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지.”

“또 친구들이랑 논답시고 밖에 나와 있을지 모르니 가면서 살펴보세.”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여관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일행들도 식사를 서둘렀다.

“아휴, 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지 모르겠네.”

“엊그제는 잡화점네 둘째 아들이 사라졌다며?”

“그 집 아들은 가출한 걸지도 모른다고 하던데. 큰 도시로 떠나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었대.”

“그래도 그렇지, 가족한테 말도 없이 훌쩍 떠났다고? 경비대는 뭐라고 해?”

“뭐라고 하긴. 열심히 찾고 있지만 단서가 너무 부족하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지. 그래도 순찰을 강화한 것 같긴 하던데…… 설마 오늘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겠지?”

그때 대화를 주고받던 이들 중 한 명이 목소리를 낮췄다.

“혹시 그 소문이 사실 아니야? 왜, ‘이교도’가 사람들 세뇌시키려고 데려간다는 소문.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잖아.”

“아, 그 어린애들 꾀어다가 교리를 가르치니 뭐니 하면서 데려간 거?”

이교도? 몰래 귀를 기울이며 훔쳐 듣던 토파즈가 미간을 좁혔다. 이교도는 국교인 다프닌교를 배척하고 새로운 교리를 설파하는 종교였다.

그러나 제국에서 다프닌교를 부정하는 것은 곧 황실의 정통성을 흔드는 일이었다. 그들은 오랜 시간 탄압받으며 몸을 움츠려 왔지만, 제국력 800년을 전후로 마법이 쇠퇴하며 세력을 불렸다. 반마법주의자들이 이교도에 가세한 덕분이었다.

마수의 침입과 자연재해가 유독 잦았던 900년대 후반에는 이교도가 전성기를 누렸다. 제국력 천 년을 기점으로 마법이 소멸하고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는 종말론이 횡행하던 때였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에게는 혼란이 곧 기회였다. 다양한 욕망과 두려움을 가진 이들이 이교도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제국력 천 년. 달력이 넘어가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다. 어제와 똑같이 해가 뜨고 질 뿐이었다.

더군다나 예언을 받고 태어난 2황자를 비롯해 젊은 마법사들이 나타나며 마법은 소멸은커녕 제2의 부흥기를 노리고 있었다. 반마법주의를 표방하던 이교도 세력이 주춤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에이, 설마…….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삼십 년은 되지 않았나?”

“이교도 놈들이야 여전히 활개를 치고 다니는 것 같으니 혹시 모르지. 반역죄로 싹 잡아넣어야 하는 것 아닌가?”

사람들은 아무튼 흉흉해서 못 살겠다는 둥 이야기를 더 떠들다가 해가 완전히 넘어가기 전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가하려는 사람들과 막 객실을 잡으러 들어오는 사람들이 뒤섞여 여관이 혼잡해졌다.

토파즈는 대화를 훔쳐 들으면서도 부지런히 움직이던 스푼을 내려놓았다. 마찬가지로 접시를 깨끗하게 비운 세 사람과 시선을 교환하고 사람들 틈에 끼여 문가로 향했다.

“조심히 들어가세……. 어! 손님분들, 밖에 나가시려고요?”

식사를 마치고 귀가하는 손님들에게 인사를 건네던 아까 그 젊은 급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가왔다.

“보아하니 아직은 거리에 사람들이 꽤 다니는 것 같아서요. 그렇게 위험해 보이지 않는데요?”

“지금은 그렇지만 금방 어두워질 텐데요……. 꼭 나가셔야 한다면 이 램프라도 가져가세요.”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던 급사가 작은 램프를 하나 쥐여 주었다. 건네받은 하란이 인사를 건네며 씩 웃었다.

“그런데, 넷이 우르르 몰려다니면 저희가 더 수상해 보일 것 같지 않나요?”

카르옌의 말이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는 판단하에 일행은 둘씩 찢어졌다. 카르옌은 당연하다는 듯이 토파즈의 옆으로 붙어 섰다. 빤히 쳐다보자 고개를 기울이며 생긋 웃는 얼굴이 무슨 문제 있냐고 묻는 것 같았다.

딱히 문제는 없었다. 원래 알고 지내던 친구들보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고용인을 더 의지하는 모습이 퍽 수상쩍었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하며 카르옌을 꽁무니에 달고 다니는 토파즈였다.

해가 완전히 지고 어둠이 밀려오자 거리는 순식간에 적막해졌다. 낮의 활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사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노동자와 떨어진 재료를 사러 급히 나서는 식당 점원, 아픈 아이를 안고 가는 부부 등이 길을 바삐 오갔다.

아무리 흉흉한 소문이 떠돈다 해도 불가피하게 밖을 나서야 하는 상황은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순찰을 강화했다는 말이 사실인지 경비병들도 자주 지나다녔다.

경비병들은 후드를 푹 눌러쓴 두 사람을 보며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다가도 대화 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워지면 금세 의심을 거두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이런 식이기 때문이었다.

“무섭지 않으세요? 저희 손 잡고 걸을까요?”

“개수작 부리지 말고.”

“네. 그런데 여기도 아이스크림을 파네요. 아이스크림 드실래요?”

“…….”

토파즈는 카르옌의 기다란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드문드문 불이 꺼진 거리에서 환하게 불이 밝혀진 몇 안 되는 노점 중 하나였다.

[베론산 토종꿀을 곁들여 먹는 아이스크림!]

입간판에는 이 도시의 특산품이라는 꿀이 올라간 아이스크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 외에도 온도 조절 마도구로 완벽한 온도와 형태의 아이스크림을 즐길 수 있다는 설명이 구구절절 쓰여 있었다.

카르옌은 넨베르그의 포탈 광장에서 처음 먹어 봤다는 아이스크림이 제법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몸도 허약하면서 이렇게 찬 음식에 맛을 들여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토파즈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으나 기대에 차 반짝거리는 눈길을 외면하지 못하고 노점으로 향했다.

앞에 놓여 있는 몇 안 되는 의자는 이미 술에 취한 젊은이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와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는 이들에게서는 으스스한 소문 따위는 자신과 상관없다고 믿는 젊은 혈기가 느껴졌다.

토파즈는 그 옆에 비딱하게 서서 입간판을 훑었다. 얹어 주는 꿀은 고작 한두 스푼이었지만 일반 아이스크림과 가격 차이가 엄청났다. 그러나 카르옌은 가격표를 보지도 않고 주문을 마쳤다.

아이스크림 세 덩어리가 노란 꿀벌 그림이 그려진 컵 안에 곱게 담겨서 나왔다. 카르옌은 앙증맞은 스푼 하나를 토파즈에게 건네준 뒤 아이스크림을 떠서 입에 넣었다. 고작 길거리 간식일 뿐인데도 음미하듯 입 안에서 굴리더니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토파즈가 헛웃음을 흘렸다. 카르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생각을 하셨길래 웃으세요?”

“겁 없는 네가 마법사가 아니었다면 꽤 곤란했을 거라는 생각.”

뭐가 곤란하냐며 고개를 갸웃거릴 줄 알았는데, 카르옌은 나지막이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마법사가 아니었다면……. 그런 가정은 처음 해 보는데, 확실히 여러모로 곤란했겠네요.”

“넌 언제 네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았는데?”

“처음부터요.”

“처음?”

“네. 처음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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