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34)화 (34/110)

#034

“저자는 누구입니까? 전에 말씀하신 정보상인가요?”

카르옌이 마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물었다. 토파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의뢰 결과를 직접 가지고 온 모양이야.”

“흐음.”

카르옌은 목을 울리더니 이내 뜬금없는 것을 물었다.

“개인적으로 가까운 사이신가요?”

“그건 왜.”

“친해 보이셔서요.”

“안 친해.”

토파즈가 딱 잘라 말했다. 귀가 밝은 마샤가 주워듣고는 서운한 척을 했다.

“너무하네. 우리의 뜨거운 인연을 벌써 잊었어?”

“……뜨거운?”

카르옌이 작게 중얼거렸다. 순간 세 사람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토파즈를 향했다. 토파즈가 이마를 짚었다.

“뜨겁긴 했지. 쟤가 불에 타 죽을 뻔한 걸 내가 구해 줬으니.”

“응. 너무 뜨거워서 진짜 화상이 생겼지 뭐야.”

마샤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나저나 그쪽 일행분들은……. 흠, 다들 수도에서 오셨나 보네요.”

“쓸데없는 정보 캐지 말고 본론이나 말해.”

“쓸데가 있을지 없을지는 나중에 가 봐야 아는 일이지만……. 그래, 일단 타. 숙소까지 정상적으로 데려다줄 테니까.”

마샤는 꽤 믿음직스럽게 마차를 가리켰다. 그가 몰고 온 마차는 마부석과 뒷좌석이 커튼 하나로 구분된 작은 마차였다. 4인승이기는 했으나 덩치가 작지 않은 네 사람이 앉자 마차 안이 꽉 찼다.

카르옌은 옆에 앉은 토파즈와 무릎이 스치자 ‘이렇게 손바닥만 한 마차는 처음 봤다’는 얼굴로 눈을 깜빡거렸다.

“일단 이거 받아.”

커튼이 젖혀지고 마부석에서 낡은 종이 한 장이 넘어왔다. 종이를 넘겨준 마샤는 숙소가 어디인지 묻지도 않고 천천히 마차를 몰았다.

토파즈는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낡은 종이는 지명수배지였다. 삼십 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빼빼 마른 남자의 초상이 그려져 있었다. 툭 불거진 광대뼈와 뾰족한 턱, 어두운 눈 밑이 눈에 띄었다.

“이게 뭐야?”

“10년째 도주 중인 지명수배자.”

그거야 수배가 내려진 날짜가 10년 전으로 쓰여 있는 걸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의뢰와 상관없는 내용을 불쑥 들이밀지는 않았을 테니 이 음침하게 생긴 남자가 그 문양과 관련이 있다는 뜻이리라.

카르옌이 상체를 기울여 고개를 들이밀었다. 수배지를 들고 있는 토파즈의 손 위로 가볍게 제 손가락을 얽어 가며 남자의 인상착의를 뚫어져라 보더니, 그 아래에 쓰인 글자를 조곤조곤 읽었다. 토파즈의 손끝에 숨결이 닿았다.

“알베르 카툴로. 당시 45세, 현재 55세 추정. 죄목은 재물 손괴 및 도주……. 음, 의외네요. 사람을 열 명쯤은 죽인 눈빛인데.”

카르옌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등 뒤의 마부석에서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쪽 신사분 말이 아주 틀리진 않아요. 사람이 아니라 가축을 죽였거든요. 어떤 시골 마을의 가축을 모두 죽이고 도주했다나.”

한두 마리도 아니고, 모두? 토파즈가 미간을 좁혔다. 토파즈는 지명수배지의 죄목 옆에 붙어 있는 까만 별 두 개를 바라보았다. 별이 하나 이상 붙어 있는 것은 위험인물이라는 표시였다.

죄목이 폭행이나 살인인 것도, 특별히 위협적으로 보이는 체구인 것도 아닌데 별을 두 개나 달고 있다는 것은 겉만 봐서는 알 수 없는 위험성을 품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를테면……. 옆에서 후드 아래로 드러난 부드러운 턱을 쓰다듬고 있는 저놈처럼.

“마법사인가?”

“정답.”

잘 닦인 도로를 천천히 내달리던 마차가 속도를 더 늦췄다. 일행이 묵는 숙소와 멀지 않은 거리였다. 바퀴 소리와 말발굽 소리 사이로 마샤의 설명이 이어졌다.

“알베르 카툴로는 가축을 제물로 한 마법을 연구하던 흑마법사로 추정돼. 그 흑마법사의 손가락에 네가 보여 준 문양과 똑같은 문신이 새겨져 있었대.”

본래 마법에는 흑과 백이 없고 선과 악이 없었다. 마법을 사용하는 인간의 마음에 선악이 있을 뿐. 흑마법사는 부정한 방법으로 마법을 사용하는 자들이었다.

일반적인 마법사들은 자연의 마나를 자신의 마력으로 다룬다. 그렇기에 재능과 노력의 여하에 따라 성취가 달라졌고 한계도 명확했다.

그러나 흑마법사들은 생명력을 제물 삼아 그 한계를 뛰어넘으려 들었다. 제물 삼는 생명력은 마법사 자신의 수명일 수도, 동물의 목숨일 수도, 사람의 피일 수도 있었다.

“정보의 출처는?”

“그거야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말할 수 없지. 장사 말아먹을 일 있어?”

한번 떠보려던 토파즈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 마법사가 가장 최근에 목격된 장소에 대해서도 알아 왔는데 말이야…….”

곧바로 말하지 않고 질질 끄는 게 수상쩍었다. 아니나 다를까, 마차를 멈춰 세운 마샤가 커튼을 젖혀 수배지를 도로 낚아채 가져가며 눈을 찡긋했다.

“이것까지 공짜로 말해 주긴 어렵지. 돈이 없다는 말을 믿어 주기엔 어젯밤에 너무 좋은 여관에서 묵었던데.”

“그래서. 돈 내라고?”

토파즈가 금방이라도 마차를 박차고 내리는 시늉을 했다. 마샤가 얼른 마부석에서 내려 먼저 마차 문을 활짝 열었다. 햇빛을 등진 마샤가 씩 웃었다.

“성질 급하긴. 돈은 됐어.”

“그럼?”

“돈 대신 몸으로 때워 줬으면 해.”

“……?”

일행의 의아한 혹은 불쾌한 시선이 꽂혀 들었지만 마샤는 개의치 않는 얼굴로 웃었다. 그가 품에서 종이 뭉치를 토파즈에게 건넸다.

“넨베르그에서 동쪽으로 가면 베론이라는 도시가 있어. 요즘 그 도시 부근에서 수상한 실종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나 봐.”

“실종?”

“그래. 인근 도시까지 합치면 정식으로 들어온 실종 신고만 열 건이 넘어. 베론에 사는 실종자 가족에게 의뢰를 받았는데, 내 부하들을 두 번이나 보내 봤지만 별 소득이 없어서 골치 아픈 사건이야.”

“네 부하들이 무능하다는 이야기를 왜 나한테 하지?”

“그 문양을 몸에 새긴 마법사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지 않아?”

토파즈는 마차 문을 활짝 열고 서 있는 마샤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마샤가 굳이 마부로 위장하여 길 한복판에 나타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곳은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이미 길가에 뜬금없이 멈춰 선 마차와 그 안쪽을 힐끔거리는 시선이 적지 않았다. 토파즈의 방식대로 일을 처리하기에 적합한 장소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순순히 말을 들어주는 척하다 중요한 정보는 쏙 빼놓고 거래를 걸어 오다니, 역시 영악한 장사꾼이었다. 토파즈의 심기가 불편해진 것을 눈치채고 실실 웃는 뻔뻔한 얼굴도 그랬다.

“그래서 그 의뢰를 나한테 떠넘기겠다?”

“주고받자는 거지.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야. 네가 가야 할 목적지에서 멀리 돌아갈 필요도 없고 그냥 지나가다가 슬쩍 해결해 주면 돼.”

토파즈가 코웃음을 쳤다. 공들여 밑밥을 까는 꼴을 보니 결코 쉬운 일은 아닐 듯했다. 애초에 쉬운 일이었다면 남에게 부탁할 필요도 없었을 테지만.

“실종된 사람은 있는데 단서가 없어.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시간이 없다는 거야. 그 초상화는 의뢰인의 딸인데 실종된 지 벌써 사흘이 지났어. 이 딸을 무사히 찾아서 데려와 달라는 게 의뢰 내용이야.”

토파즈는 마샤가 건넨 종이 뭉치 가장 앞면에 그려진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갓 성년식을 치렀을 것처럼 앳된 얼굴의 여자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훗날 이런 사건에 연관되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계획적인 납치라면 이미 늦었을 수도 있어.”

“그래, 네 말이 맞아. 만약 잘못됐다면 시신이라도 찾아서 눈앞에 갖다 놓아달라는 게 의뢰인의 요청이야.”

“…….”

입 안이 썼다. 토파즈는 초상화에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우리가 원하는 정보는 언제 얻을 수 있지?”

“의뢰를 해결하지 못해도 좋아. 중요한 실마리를 찾았다는 생각이 들면 베론의 ‘포도나무’라는 식당에서 일하는 금발의 급사를 찾아가. 그가 너희가 원하는 정보를 전달할 거야.”

토파즈는 들고 있던 빳빳한 종이 뭉치를 반으로 접어 품 안에 넣었다. 그것이 수락의 표시임을 눈치챈 마샤가 빼앗아 갔던 지명수배지를 다시 건네며 속삭였다.

“난 네 운을 믿어, 가넷.”

운이라. 그냥 길을 걷다가도 소매치기를 만나고, 낮잠 잘 곳을 찾다가도 암살자를 만나는 그 운을 말하는 거라면…… 그걸 운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불운에 가까우리라고 토파즈는 생각했다.

* * *

마샤가 재수 없는 소리를 할 때부터 불길하더라니.

덜컹, 덜컹. 토파즈는 흔들리는 마차 안에 있었다. 짐마차 뒤 칸에 양 손목과 발목이 묶인 채 앉아 있자니 승차감이 최악이었다.

토파즈는 눈을 굴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마차 안에는 토파즈처럼 손발이 묶인 사람이 다섯 명이나 더 있었다. 그들은 모두 깊게 잠들어 있었다.

납치는 처음인데…….

토파즈는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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