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
“성직자들의 사회는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황궁 못지않은 정치와 모략이 판치는 곳이죠.”
이튿날 아침, 부스스한 머리로 빵을 뜯어 먹는 소매치기 소년에게 하란이 단호하게 꺼낸 말이었다.
“……?”
잠이 덜 깬 소년은 어리둥절한 기색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손에 쥔 빵은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꼭 쥐고 있었다. 메르디나가 소년의 앞으로 고기와 채소가 듬뿍 담긴 스튜를 슬쩍 밀어주는 모습이 보였다. 그동안에도 하란의 일장 연설은 더 이어졌다.
“성직자들이 식탁 머리에 앉아서 경건히 기도나 할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칼 없이도 사람을 찔러 죽이고, 신을 참칭해서 삥을 뜯는 게 다프닌교 신관들입니다.”
“…….”
신학교 출신, 아니, 신학교 퇴학생이라는 자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지나치게 과격한 말 아닌가? 그 내용이 사실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말이다.
“솔직히 저는 넨베르그 신전의 헌금 장사 얘기도 별로 놀랍지 않았습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만났던 각종 버러지들이 훗날 다프닌교에서 대신관이니 뭐니 하는 고위직에 앉을 놈들이었으니, 조직이 돌아가는 꼴을 알만 하죠.”
“……너도 성직자 집안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어?”
“네. 그러니 더 잘 압니다. 성직자랍시고 고결한 척하는 족속 중에 뒤에서 구린 짓을 해대는 인간이 얼마나 많은지 말입니다.”
“그래서 결론이 뭐야? 얘를 신전에 보내지 말자고?”
듣다 못한 카르옌이 지루해 죽겠다는 얼굴로 포크를 휘휘 젓다가 물었다.
“아니? 몸을 정갈히 하고 가야 한다는 거지.”
“…….”
장황한 연설에 비해 지나치게 싱거운 결론이었다.
“그게 문제였어? 그럼 그냥…….”
“넌 얌전히 있어.”
카르옌이 금방이라도 ‘청결’ 마법을 써서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소년을 뽀득뽀득 닦아 놓을 기세이기에 토파즈가 단호히 가로막았다.
어젯밤에도 후유증으로 픽 쓰러지듯 잠든 놈이었다. 당분간은 불필요한 일에 습관적으로 마법을 써대지 못하도록 버릇을 단단히 단속할 작정이었다.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은데요……. 그래도 걱정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사르르 웃는 얼굴을 보니 정작 본인은 심각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소년은 곧 욕실로 밀어 넣어졌다. 소년이 자리를 비운 사이 하란이 진지한 낯으로 말했다.
“평생 말단 신관으로 지낼 정도였으면 아무 상관 없었겠지만, 저 애는 그 정도 수준이 아닙니다.”
갓 발현한 아이의 신성력이 선명하게 눈에 보인다는 자체가 드문 일이라고 했다. 요즘은 신관이라도 신성력이 없거나, 있어도 끌어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길거리에서 황금을 주워 왔다는 표현이 과장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뒷배 하나 없는 아이가 우연히 신성력을 발현해서 들어왔다니, 치워 버리기 더없이 좋은 조건이죠.”
곧 욕실에서 나온 소년은 때를 완전히 벗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하란이 준비해 둔―대체 언제 준비했는지 모르겠지만―단정한 옷까지 갖춰 입은 채였다. 하란은 머리도 다듬어야겠다며 혀를 찼지만 지금 모습만 봐도 어제까지 소매치기를 하며 살던 아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역시 사람은 환경이 만드는 것이었다. 귀족들이야 자신들의 혈통이 남다른 것처럼 떠들지만, 누구든 잘 먹이고 잘 씻겨서 교육을 받게 하면 비슷하게 살 수 있었다. 그 기회가 없다는 현실이 문제였으나 다행히도 소년은 행운을 움켜쥔 편이었다.
한 10년쯤 뒤에는 어엿한 신관 노릇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토파즈 역시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10년 전에는 상상하지 못한 모습의 어른이 되어 살고 있으니.
……어쩌면 가넷도 그랬을지도 모른다. 토파즈는 무심코 떠오른 상념을 고개를 내저어 털어냈다.
다음 날 신전에 간 소년은 순조롭게 수습 신관이 되는 절차를 밟았다.
새하얀 돌로 지어진 신전은 보기만 해도 웅장함이 느껴지는 구석이 있었다. 파도가 솟아오르는 모양새의 기둥과 입구 양쪽에 세워진 월계관을 쓴 천사상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건물 자체가 거대했다.
소년은 기가 죽은 것인지 혹은 압도된 것인지 입구에 잠시 멈춰 서 있다가 이내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소년이 신관이 안내하는 대로 반구형 돌 위에 손을 얹자, 돌에서 희게 빛이 났다. 찰나였지만 신전 내부를 환하게 밝힐 정도의 빛이었다.
그 직후 이름과 출신, 종교에 귀의할 것인지 의사를 묻는 간단한 절차가 진행되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 길로 소년은 신전 소속의 수습 신관 신분이 되었다. 아무리 비리 신전이라고 해도 미래의 신관에게까지 돈을 뜯지는 않는 모양인지 금전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소년은 ‘율리안’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게 되었다. 역사 속 성인의 이름과 같았던 덕분이었다. 본래는 여섯 달 동안 교리를 배운 뒤에야 정식으로 새 이름을 받아 수습 신관이 될 수 있었지만 신성력을 가진 이는 예외였다. 신성력을 갖고 있다는 것은 신으로부터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의미이므로 까다로운 검증 절차가 모두 생략되었다.
물론 수습 신관에서 ‘수습’ 자를 떼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과 헌신이 필요하겠지만, 신전 내부를 경탄 어린 눈으로 둘러보는 소년의 낯을 보니 해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게다가 모든 절차를 마친 소년이 하란에게 받은 ‘추천장’을 내민 순간 신관들의 태도가 눈에 띄게 변했다. 신전에 오기 직전까지 망설이던 하란이 한숨을 푹푹 내쉬며 즉석에서 써낸 것이었다.
‘일종의 투자라고 생각하죠, 뭐…….’
내용을 자세히 읽지는 못했지만, 쫓기는 처지에 성직자 집안이라는 자신의 가문 이름을 언급할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니 적당히 다른 방법을 썼을 것이다. 그럼 위조가 아닌가 싶기는 했다만…… 믿는 구석이 있으리라 생각하는 쪽이 마음 편했다.
거액의 기부금 대신 자신의 능력으로 신전에 입성하게 된 소년은 여전히 얼떨떨한 기색이었다. 소년은 신전을 떠나려는 네 사람을 배웅할 기회를 얻어 서둘러 쫓아 나왔다.
“아.”
그때 카르옌이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소년의 눈앞에서 잘게 흔들었다. 소년이 무심코 양손을 모으자 그 위로 끈이 달린 작은 주머니가 툭, 안착했다.
안을 열어 본 소년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얼핏 보니 은화가 한 주먹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약속했던 돈은 줘야죠. 신전에서 지낸다고 돈이 한 푼도 필요 없지는 않을 테고요.”
웃으며 토파즈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는 모습이 꼭 칭찬을 바라는 개 같았지만 무시했다.
“너, 너무 많……. 너무 많은……!”
똘똘해 보이던 모습답지 않게 소년이 말을 더듬거렸다. 그러면서도 끈을 꽉 조여 주머니를 단단히 잠그는 손을 보니 역시 어디 가서 제 몫을 뺏기고 살지는 않을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정말……. 제가 여태까지 살면서 제일 잘한 일이 형, 누나들의 주머니를 턴 일이에요…….”
그게 신전 앞에서 할 말이냐. 토파즈가 헛웃음을 흘렸다. 고개를 푹 숙인 소년, 율리안의 발밑으로 물기가 잔뜩 떨어졌다.
“성함을…… 알려 주시면 안 될까요? 나중에 어디서 만날 수 있는지도요.”
지금은 비록 가진 게 없지만 나중에 반드시 은혜를 갚겠다는 둥, 반쯤 뭉개진 말투로 웅얼거리는 소년을 보자 웃음이 샜다.
“……토파즈.”
반색하던 아이는 곧 이어진 말에 다시 어깨를 늘어뜨렸다.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 난 워낙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자라.”
“…….”
“아마 수도에서 볼 수 있을 확률이 높겠지. 기회가 된다면 말이야.”
자신은 못 보더라도 이 세 사람 중 한 명 정도는 만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
토파즈는 동그란 금갈색 머리통 위에 손을 얹었다. 소년의 머리칼은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 * *
“마차를 잡겠습니다.”
신전을 나선 메르디나가 말을 꺼낸 직후였다. 마차 한 대가 일행의 앞에 와서 멈춰 섰다.
토파즈는 마차에 올라타려는 메르디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뭐 하자는 수작이야.”
“……예?”
메르디나가 드물게도 당황한 얼굴로 토파즈를 바라보았다. 토파즈는 그에게 고개를 내저으며 마부석을 응시했다. 마부석에는 낡은 모자를 깊이 눌러 쓰고 있는 마부가 앉아 있었다. 마부가 모자챙을 들어 올리며 씩 웃었다.
“들켰네.”
“저 사람은…….”
하란이 미간을 좁혔다. 머리 색도 달라진 데다 헐렁한 옷으로 체격을 숨겨 알아보지 못할 뻔했지만 분명 이틀 전 만난 정보상, 마샤였다.
마샤는 붉은색으로 물들인 긴 머리칼을 모자 안으로 말아 넣어 얼핏 보면 짧은 머리를 한 사람처럼 보였다. 코에는 콧수염까지 붙이고 있었다. 토파즈가 짧게 말했다.
“어젯밤 여관 근처에서 기웃거리고 있던 것도 너였군.”
“들켰어? 역시 네 뒤를 밟는 건 재미가 없다니까. 그런데 신전에 들여보낸 애는 뭐야. 설마 네 애는 아니지?”
마샤의 말에 토파즈가 미간을 구겼다.
“싱거운 소리 하러 쫓아올 정도로 할 일이 없어?”
“할 일이 없긴. 이게 내 일인데.”
참 천직이었다. 토파즈가 혀를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