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토파즈 (32)화 (32/110)

#032

“오랜만이야, 마샤.”

‘마샤’라고 불린 넨베르그의 정보상은 무척 평범하게 생긴 여자였다. 길을 걷다가 한 번쯤 어깨가 부딪혔을 것 같은, 그런 적이 있다 해도 인상에 남지 않을 얼굴이었다. 또한 키가 크고 중성적인 외모라 언뜻 스치면 성별을 구분하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정보상 겸 해결사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막연히 떠올린 것보다는 훨씬 어려 보인다는 점만이 눈에 띄었다.

“그래, 오랜만이네. 그런데 언제부터 목에 칼을 대고 인사를 나누는 게 예의가 되었어?”

“나야 원체 예의를 모르는 자라.”

토파즈는 스스로를 무뢰한처럼 소개했지만, 먼저 검을 꺼내 진입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목에 검 끝이 닿아 있는 사람은 토파즈와 하란이었을 것이다.

마샤는 어깨 옆으로 들어 올리고 있던 오른손을 휘적이며 씩 웃었다.

“다들 물러나. 내 오랜 친우에게 더 무례를 범할 수는 없지.”

그 말에 검을 겨누고 있던 호위들이 일제히 검을 내렸다. 그러나 토파즈는 마샤의 목에 댄 검 끝을 치우는 대신 더 가까이 붙였다. 조금만 더 파고들면 살갗이 베일 것 같았다.

다시 방 안의 긴장감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정작 긴장감을 치솟게 한 토파즈는 무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세 명 더 있잖아. 건너편 건물에서 주시하고 있는 마법사 포함.”

“……진짜 귀신 같네.”

“귀신이나 다름없긴 하지.”

“저 셋을 물리는 대신 여기 두 사람은 안에 있게 해. 너희도 둘이잖아.”

토파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한 명.”

토파즈는 마샤의 중재안을 완전히 무시하며 목에 닿은 검을 툭, 툭 두드렸다. 지루하다는 기색이 노골적으로 담긴 움직임에 마샤가 이를 바득 갈았다.

“나도 호위는 있어야지. 네가 갑자기 날 죽이려 들면 억울해서 어떡하라고?”

“내가 널 죽일 거라면 이렇게 번거롭게 대화를 시도할까? 문 열자마자 너도 죽이고 쟤네도 다 죽이면 됐는데.”

토파즈의 협박은 언제나 진실을 기반으로 했고, 그를 아는 자들이라면 통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마샤가 반박하지 못하고 이를 부득 갈았다.

“하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다들 나가.”

방 안에 있던 호위가 모두 방 밖으로 나가고 맞은편 건물의 그림자마저 사라진 후에야 토파즈가 검을 내렸다.

“남의 집에 쳐들어와서 아주 자기 멋대로네. 재회 인사 한번 제대로야.”

“지하로 내려가라고 먼저 헛수작 부린 게 누군데.”

“아, 그거야 너인 걸 몰랐으니까. 그나저나 너 어디서 뭘 하다가 이제야 나타난 거야? 잠깐……. 설마 며칠 전에 시모네에서 마수를 쫓아냈다는 붉은 머리 용병이 너야?”

“질문할 거면 돈 내고 해.”

“그건 정보상인 내가 해야 할 대사 아니야?”

토파즈가 어깨를 으쓱였다.

“난 돈 없어.”

“미친놈…….”

뻔뻔하기 그지없는 대사에 옆에 얌전히 서 있던 하란마저 감탄할 뻔했다. 마샤는 아직 선득한 감각이 남은 듯한 목덜미를 손으로 쓸어내리고는 물었다.

“그래서. 갑자기 나한테 왜 왔는데?”

“왜 왔겠어. 알고 싶은 정보가 있어서지.”

“흠. 얼마짜리 의뢰인데?”

“글쎄, 얼마려나.”

토파즈는 마샤의 긴 흑발 사이로 드러난 목덜미를 뚫어져라 보며 말했다.

“네 목은 얼마 정도지?”

“…….”

“내 대가는 지금 널 죽이지 않는 거야, 마샤.”

담담한 어조라 더욱 오싹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마샤는 무심코 목을 감싸며 침음을 삼켰다.

“난 그런 식으로 거래 안 해, 토파즈.”

“안타깝지만 난 원래 이런 식으로 거래해. 너도 알다시피 가진 게 별로 없거든.”

“……나보고 맞추라는 소리군.”

“그래 주면 고맙지.”

“체면 상하네. 날 이따위로 다루는 사람은 너뿐이야.”

마샤가 목을 감싸고 있던 손을 떼어내며 말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약점이 있거든. 가족, 친구, 과거에 저지른 악행, 미치도록 이루고 싶은 욕망……. 내가 그중 하나만 쥐고 흔들어도 다들 날 두려워하는데 너만 늘 그렇게 시큰둥한 낯이야. 언젠간 겁에 질린 네 얼굴을 보고 싶은걸.”

“약점 쥐고 협박한다는 말을 길게도 떠드는군.”

무감한 말에 마샤가 피식 웃었다.

“잃을 게 없는 사람이 가장 무섭다는 말, 난 너 때문에 믿어. 그래서…… 같이 온 미남은 새로운 동료? 아님 애인인가?”

습관적으로 떠보고 정보를 캐내는 말버릇은 마샤의 직업병이었다. 다행히 하란은 ‘얼굴도 안 보이는데 미남인 줄 어떻게 아느냐’ 따위의 대꾸로 목소리를 노출하지 않았다. 쉽게 말려들지 않자 마샤가 칫, 노골적으로 혀를 찼다.

“알고 싶은 건 뭔데? 네가 몇 년 만에 갑자기 나타나서 나를 쥐 잡듯이 잡으니 흥미가 생기네.”

토파즈는 그제야 마샤의 맞은편에 놓인 푹 꺼진 소파에 앉았다. 하란은 함께 앉는 대신 그 뒤의 한 걸음 떨어진 곳에 뒷짐을 지고 섰다. 경계심을 놓지 않는 놈다운 처사였지만 꼭 팔자에도 없는 호위를 받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지금부터 물어볼 정보, 누가 와서 찾더라면서 되팔 거면 미리 말해. 나중에 죽이러 오기 번거로우니까.”

“내가 의뢰 내용 발설하거나 역으로 팔아먹을 정도로 멍청이였으면 지금까지 이 바닥에 발붙이고 있겠어?”

“의외로 멍청이들 명줄이 제법 길어서.”

“흐음……. 동의하지만 난 너한테 밉보일 정도로 무모하지는 않으니 안심해. 난 오래 살고 싶다고.”

뭐, 입을 놀려야 할 때와 아닐 때도 구분하지 못하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면 애초에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토파즈는 품 안에서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메르디나가 그려 준 끊어진 별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마샤는 테이블 가운데 놓인 종이를 끌어와 눈앞에 대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흠……. 간단해 보이면서도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을 것 같은 문양이네. 뭐지? 어떤 집단이 공유하는 상징물인가?”

“그걸 알아봐 주는 게 네가 할 일이야.”

“알아봐 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시간이 필요해.”

“얼마나?”

“글쎄……. 사흘 정도?”

“이틀 안에 할 수 있다는 뜻이네.”

토파즈가 팔짱을 끼며 기한을 당기자 마샤가 인상을 팍 썼다.

“너 이거 노동력 착취야.”

“네가 내게 쌓아 둔 빚이 몇 갠지는 기억해? 기억하면 그런 말 못 할 텐데.”

“기억하니까 늘 네 행패에도 입 꽉 다물고 있는 거지.”

“여태 입을 다물고 있던 거였나?”

“…….”

입을 다물고도 떠들 수 있는 줄은 몰랐다는 눈으로 쳐다보자 마샤가 웃으며 이를 갈았다. 저러다 이가 남아나질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하나 더 물어볼 게 있는데.”

토파즈는 말을 끊으며 뒤에 서 있는 하란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이건 내 개인적인 문제니 잠깐 먼저 나가서 기다려 줘.”

“…….”

하란이 말없이 토파즈를 응시했다. 눈은 후드 아래에 가려져 있지만 안 봐도 ‘수상쩍어서 미치겠다’라는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 예상되었다.

“5분이면 돼.”

하란은 몹시 불만스러워 보였지만, 정보를 노출해서 좋을 것 없다는 판단 때문인지 입을 열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 문밖으로 나갔다. 역시나 꽤 현명했다.

그리고 하란이 문밖으로 나가자마자 마샤가 속삭였다.

“쟨 뭐야? 뭔데 달고 다녀? 딱 봐도 기사 같은데. 그것도 정예 기사.”

하여튼 쓸데없이 예민해서 왜 정보상을 하는지 알 것 같은 인물이었다.

“그건 알 거 없어.”

토파즈는 정보를 캐내려는 수작을 익숙하게 넘겼다. 마샤도 딱히 통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는지 가볍게 혀를 찰 뿐이었다.

“그래. 또 묻고 싶은 건 뭔데?”

토파즈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1018년 겨울, 그 이후 내 행적.”

“…….”

두 사람이 침묵 속에서 시선을 교환했다. 마샤는 토파즈가 말하는 때가 언제인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것은 토파즈가 사라진, 대외적으로 ‘사망’했다고 알려진 시점이었다.

“없어.”

“없다고? 전혀?”

토파즈가 눈썹을 까딱이며 물었다.

“그래. 증발한 것처럼 아주 깨끗해. 그러니 나조차 당연히 네가 죽었다고 생각했지. 나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 모두가.”

“……네가 아는 대로 말해 봐.”

“공식적으로 너는 마수와 싸우다가 사망한 걸로 알려져 있어. 너희 길드, 녹스에서 직접 발표했지. 뭔가 수상하다고 생각해서 알아봤는데 네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건물이 전소된 것만 확인했어. 시체도 없이 사라졌다는 기록이 끝이고, 더 찾아도 나오는 게 없었어.”

“…….”

토파즈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1018년, 그 해는 토파즈가 마지막으로 용병으로 활동하던 시기였다. 그는 동료의 배신으로 목숨을 잃을 뻔했다가 살아남아 단신으로 키올렌에 떨어졌다.

그리고 여태까지 가장 중요한 조각 하나를 찾지 못했다. 바로 자신이 어떻게 살아났는지, 왜 키올렌에 있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부상이 심한 상태였기에 기억이 사라진 것 자체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누가 왜 자신을 살렸는지는 짐작 가는 일이 전혀 없었다.

“길드에서 뭔가 일이 있었던 거지? 그러게, 내가 그 새끼 눈빛이 수상쩍다고 했잖아.”

토파즈는 마샤의 말에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마샤는 의뢰 때문에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 새끼’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 그때 마샤의 말을 믿었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이제 와서 생각해도 부질없는 이야기였다. 한낱 인간은 시간을 돌릴 수 없었으므로.

“더 아는 거 없으면 그 얘기는 됐어. 이 문양에 대한 거나 똑바로 알아봐 줘.”

토파즈는 문밖에서 귀를 바짝 세우고 있을 하란을 의식해 말을 끊어냈다. 마샤의 응접실이 이 정도 방음도 되지 않을 리는 없었지만 늦게 나온다면 또 어디까지 상상력을 부풀릴지 모른다. 하필이면 가장 깐깐한 놈에게 이미 너무 많은 정보를 듣게 했다.

토파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용건은 없었다.

“너 정말 돈 안 낼 거야?”

“돈 없다니까. 그리고 너, 언제는 나보고 생명의 은인이니 돈 안 받겠다고 한 거 잊었어?”

“어, 잊었어. 돈은 왜 없는데?”

“소매치기 당했어.”

“진짜 미친놈…….”

똑같이 뻔뻔하게 대꾸하자 토파즈가 전직 소매치기였다는 사실을 아는 마샤가 헛웃음을 흘렸다. 어차피 마샤와는 예전부터 이런 관계였다. 서로에게 빚을 지고 지우던 사이.

“아.”

토파즈는 방을 나서기 전에 한 가지 덧붙였다.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너 하나뿐이야. 그러니 소문이라도 난다면 범인은 무조건 너겠지.”

“…….”

“쓸데없이 입을 놀리는 자들이 어떻게 되는지는 네가 가장 잘 알 거야. 그러니 입조심해, 마샤.”

서로를 오랜 시간 동안 알고 있던 자들에게는 더 긴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 명심하지. 용서를 모르는 가넷.”

동생에게서 빌려 온, 4년 전에 버린 가명이 아주 오랜만에 귓전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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